보통 사람들이 비행기 혹은 비행을 생각할 때는 뭔가 가슴 설레고 멋진, 아니면 낭만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물리법칙을 거스르고 (정확히는 물리법칙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공중으로 날아올라 구름을 뚫고 올라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날아다닌다는 것은 땅붙이 삶이 필연적인 모든 동물들의 로망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비행이라는 감정은 보통 사람들, 그러니까 비행기를 타는 일반 승객들에게 더 널리 퍼져 있을 것이다. 승객들이 창 밖의 멋진 풍경과 아름다운 구름을 찍고 있는 그 순간 칵핏에서는 자연을 거스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종사들이 있다. 하늘을 날기 위한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비행기와 그 안에 탑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비 중 흘린 나사 한 개, 프로그래밍 도중 실수한 소수점 한 개, 실수로 작동시킨 손톱만 한 스위치 하나하나가 비행 중에는 아주 끔찍한 참사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에 조종사들에게 있어서 비행이라는 행동은 언제나 신중하고 진중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항공기를 운항하는 조종사들은 신중함과 침착함을 평생 유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앞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기에 집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뒤로 웃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비행기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공간이다.
이렇다 보니 비행은 필연적으로 '진중'해 질 수밖에 없어진다. 대부분의 통신용어는 간결하고 무미건조하며 단지 어떠한 행동과 알림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무서운 느낌도 든다. 몇 년 전에 유행한 개그맨이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시리즈는 시장에 큰 파장을 남기지 못하고 소리소문 없이 묻혔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재미있는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비행 중 통신용어는 매우 정확하고 신속한 전달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저런 시도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이런 암울한 생각조차 비행을 무미건조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행인(조종사뿐만이 아니라 관제사 등을 포함한 통신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딱딱하고 웃음기 없는 것은 아니다. 조그마한 틈만 있다면 비집고 들어가 웃음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나 똑같지 않은가. 인터넷에 ATC joke 등으로 검색하면 재미있는 예가 많이 나오고 유튜브 등에는 실제 재미있는 ATC를 녹음하여 편집 후 업로드 한 동영상도 많이 있다.
또한 다른 예로는 통신용어라기보다는 지명(?)에 관련된 것이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겠지만 땅에는 도로가 있듯이 하늘에도 도로가 있고 이정표가 있으며 어느 한 지점을 콕 집어 이르는 지명도 있다. 잘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위의 사진에서 오른쪽 큰 화면에 드문드문 있는 하늘색 삼각형 모양을 Waypoint라고 하는데 GPS 위성을 사용하여 지구상 어떠한 좌표 위에 지정해 둔 일종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이 포인트는 알파벳 5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보통은 WALIK, MRLIN, DEKAL 등 그냥 읽어지기만 하면 되는 조합으로 만든다. 하지만 우리의 비행인들은 이곳에서도 장난을 멈추지 않는다.
아래는 내가 찾은 몇몇의 재밌는 예시다.
이것은 제주도를 이어주는 Y722 루트에 있는 국내 웨이포인트이다.
비단 저런 재미있는 예뿐만 아니라 비행의 세계에는 가장 심각한 순간에 가장 따뜻한 용어를 쓰는 순간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용어이기도 한데 이 표현이야말로 비행인들이 항상 심각하고 감정 없는 차가운 피의 사람들이 아니라 인간애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보통 조종사들이 응급상황을 인지하고 Emergency란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여러 절차가 요구된다. 애초에 Emergency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하거나 급한 상황이라는 뜻이며 이 상태를 선포한 항공기는 주변의 모든 항공기보다 착륙, 통신 등에 있어서 우선권을 갖는다. 이럴 때 관제탑, 혹은 관제소에서는 해당 항공기 기장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그중에는 탑승자 숫자, 탑재된 연료량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쓰는 통신용어는 people, passanger 등이 아닌 바로 'soul'이다. 비상상황이 선포됐을 때의 통신을 들어보면 반드시 나오는 표현이다. "How many souls on board?'
이는 나에게 비단 탑승한 승객들의 숫자를 파악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혹시나 안 좋은 결과가 있었을 때 좀 더 효율적인 조사를 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신체적 뿐만이 아닌 정신적 고통도 함께 느끼겠다는 말로 들린다. 나는 비행 중에 실제로 Emergency를 선포할 상황은 다행히도 겪지 않았지만, 그보다 한 단계 낮은 Urgency 상황은 겪어 본 적이 있다. 엔진에 들어가는 연료량에 문제가 있었는지 출력이 계속해서 급격히 감소하다가 올라가는 현상이었다. 설마 내가 비행기 안에서 'How many souls on board'를 들을 줄이야. 다행히 우리는 무사히 착륙했지만 활주로 옆에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와 소방차를 보는 것은 또 다른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 후 FAA의 사람들과 해당 상황에 대해 짤막한 인터뷰를 했던 것 역시 잊지 못할 추억이다.
계기비행 중에는 통신의 중요도가 시계비행과는 달리 수직으로 상승한다. 편하게 통신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즐거운 말도 툭툭 던져보는 지금에 비해 처음 계기비행을 나갔을 때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교관에게 도움의 눈빛을 던지던 그때를 뒤돌아보면 나도 어느새 여기까지 왔구나 하며 입가에 창피한 미소가 번진다.
처음으로 솔로비행을 끝냈을 때 지상관제소에서 congratulation을 말해주던 그 감동을 나는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항상 이니셜 컨택트를 할 때에 Good morning, Good afternoon 혹은 관제가 이양될 때 Good day 등의 인사를 건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간단하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가 차가운 주파수의 온도를 올려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앞으로 비행인으로서의 갈 길은 지금까지 날아왔던 것보다 훨씬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자신감 있게, 자만심 없이 날아보자는 마음가짐을 또 한 번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