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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환 Apr 18. 2024

벌처럼 날아올라


한기가 밀려와 눈을 떴다.

어젯밤에 창문을 닫지 않고 잠들었던 모양이다.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수면을 괴롭히기엔 충분히 서늘하고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비집고 들락거린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지만 침대방을 마다하고 작은 쪽방에서 바닥에 누워서 잠든 지 사흘째이다.

H가 호텔방에 포근한 침대에서 잠을 들었을지 아니면 좁고 불편한 어는 곳에 있을지 알 길이 없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불편함을 택했다.

H의 부재를 너무 편하고 좋다고 하기에는 마음이 꺼림칙했고 자학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스스로 자위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다 부질없고 쓸데없는 고집이다. 보아줄 이도 알아줄 이도 없는데 투정 부리는 아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매일 저녁이면 술을 마셨고 취하질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면 냉장고를 열어 요기할 만한 것들을 꺼내어 먹었다.

저장강박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 H는 항상 음식들 식자재들을 소분하여 종류별로 가득히 냉장고 김치 냉장고 냉동고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H를 걱정하기보다는 H가 넣어둔 음식들이 손길이 가지 않으면 곧 모두 상해버릴지 몰라 아깝다는 걱정과 조바심이 났다.

아마도 H는 나의 이런 마음을 보았으면 식자재만도 못한 자신을 대하는 나를 호되게 질타하였을 것이다.

나는 변명반 지기 싫은 마음에 합리성을 내세우며 이야기하겠지.

"사람은 적어도 썩어서 버리지는 않지 식자재는 이렇게 정성을 들여 소분하고 진공팩에 넣고 들인 시간과 비용을 헛되게 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야" 

"나는 음식 버리지 말라고 어려서 배웠어 그러게 남도 나눠주는 것도 인색하고 혼자 욕심내다 묵혀서 버리는 것을 왜 그리 집착하고 많이 사니? 이 작은 집에 냉장고가 3대가 말이 되니?"

H가 고함을 지른다

"식자재가 아니라 내 몸에 곰팡이들이 물들고 나는 썩어가고 있다고!"

나는 깜짝 놀라 냉장고의 문을 닫고 주방에서 나왔다.

냉장고 속에서 웅얼거리는 모터의 소음이 귓등을 자꾸 맴돌고 있다.


베란다창문을 열고 어퍼진 크록스 신발을 꾀어 차고 테라스를 나왔다.

H가 없기에 이젠 테라스에서 마음대로 담배를 파워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담배를 피우며 건너편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아파트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 불이 꺼져있고 드믄드믄 불 켜진 집의 거실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벌집이 된 듯 칸칸이 나누어진 저 공간에서 사람들이 벌처럼 날아오를 것이다.

집집마다 여왕벌이 있어 숫벌들은 부지런히 티브이와 냉장고 세탁기 멋진 소파와 침대며 여왕벌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물어오기 위해 날아간다.

이제 곧 잠에서 깨기 시작하면 벌들의 웅웅 거리는 날개 짓이 새벽에 적막을 깨울 것이다.

여왕벌이 사라진 나는 무엇을 위해 날갯짓을 해야 하는 건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H가 아이가 없어서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면 나는 너무 미안할 것이다.

H와 나는 처음부터 세상에서 조금 삐딱하게 살아보자고 하였다.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 모르겠지만 딩크라고 불리는 매력적이고 현실적인 관계를 지켜왔다.

중남미에 사는 히야신티나난초벌 (Euglossa hyacinthina)처럼 여왕벌과 일벌의 구분이 없이 종족번식에 함몰된 보통의 방식을 벗어나 살고자 했다.

그렇지만 나는 알을 품지 않아도 H가 여왕벌같이 살고 싶다고 해도 좋았다.

H는 여왕벌이며 일벌이길 원했던 것 같다.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관계를 용납하지 않았다.

담배 두 가치를 연달아 다 피우며 H의 생각을 미루어두고 다시 움직여야 한다.

인생에 있어 매번 심사숙고보다 관성으로 흘러가는 많은 일들이 있고 그런 루틴들에서 쉽게 벋어나기는 쉽지 않다.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나는 오늘 하루도 날개를 떨며 낮게라도 날아올라야 한다.

이미 해는 많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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