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책 원고가 퇴고 중 사라졌다
어제 아침 식사하고 설거지를 마친 후 서재로 들어갔다. 다른 날 같으면 식사 후 걷기 운동부터 하는데, 9월로 다가온 책 인쇄작업 들어가야 하는 일이 급하게 되었다. 글을 같이 쓰는 문우 출판사에 출간을 부탁했는데 한 달이 넘은 후에야 일이 많아 도저히 못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마음이 급해졌다.
책 출간은 올봄, 우리 지역 문화 관광재단에서 창작지원금을 받았기 때문에 내는 책이다.
11월까지, 출간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출판사에서 편집을 해 준다는 말을 믿고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있었다. 그러다 가을이 오면서 마음이 바쁘기 시작했다. 책 출간을 맡겨야 하는 출판사가 일이 많아 9월까지 원고를 주어야 한다는 대표님 말을 듣고부터다. 조바심으로 수험생처럼 밤늦게까지 퇴고를 하고 혼자 오타도 보고 이것 무슨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가을이 가고 나면 금세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시간은 빛의 속도로 흘러간다. 가을은 축제도 많고 해야 할 일이 줄줄이 굴비 엮어 매달아 놓은 모양이다. 나이 80이 넘은 나는 왜 이리 바쁠까? 숨을 한번 고르고 차분이 생각을 정리한다. 먼저 해야 할 일 순서를 정하고 해야 할 것 같다..
수험생도 아니면서 어떤 날은 수험생처럼 밤 12까지,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맞긴 하다. 가을이 돌아오면서 시 낭송 모임은 시에서 주관하는 행사 참여가 많다. 할 일들이 줄줄이 모여 있고 마음이 바빠온다. 그 와중에 부지런히 퇴고를 해서 며칠이면 끝나겠지 하고 한숨 돌리고 있었는데, 이제 며칠만 고생하면 끝날 것 같아 내심 마음이 가벼웠는데.
그런데, 사고가 생겼다.
어제 이침 컴퓨터를 열고 바탕 화면에 깔아 놓은 책 시안 글을 클릭했는데 무슨 파일이 깨져 복구해야 한다는 말과 복구를 누르니 복구할 수 없다는 글이 뜬다. 그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멘붕이 왔다. 이걸 어쩐다. 마치 길거리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어디 있을 것 같아 이곳저곳을 찾아보듯 했지만 허사였다. 찾을 만한 곳은 다 뒤져도 행방이 묘연했다. 심지어 휴지통 까지도 열어 보았으나 내 글들은 간 곳이 없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컴퓨터 앞에 앉아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사람은 때때로 고난이 오면 인내심을 시험하는 그 누군가 있지 않을까 의심이 간다. 이걸 어쩌지?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어 마음이 막막하다. 가슴이 뛴다. 행여 저장이 안 될까 봐 작업을 마치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저장을 했었는데 어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처음 겪는 난감한 일에 울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다.
어쩔 수 없이 출근할지 모르는 세쨋 사위에게 전화를 했다. 아침 9시 정도 시간이라서 꼭 출근하는 시간 은 아닐까 싶어 전화하는 것도 미안해 낮은 소리로 사정이야기를 했다.
"유서방, 지금 출근하는 시간 아니야?"
"괜찮아요, 오늘 재택 해요."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근무시간인데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내가 지금 처한 정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글 원본은 오마이 뉴스와 브런치에 글이 있어 그 글을 다시 모으는 작업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영상 통화를 하면서 오후 3시까지 글을 모아 간신히 지금까지 책에 넣으려는 글은 다 모아졌다.
이 만큼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능력 밖의 일을 하고 있지 않는가. 여러 생각이 겹친다. 책을 내는 출판사에 전화해서 물었다. 내가 원하는 날까지 책을 내려면 9월까지는 글 원고를 주어야 올해 안으로 책을 출간할 수 있다는 대답이다. 글이 날아가지 않았으면 며칠이면 끝났을 일인데 이게 웬일인지.
"사위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어머니 더 좋은 일이 있으려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 몰라요."라고 나를 위로한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된다. 사위가 모아 보낸 글을 다시 퇴고를 하기 시작한다. 힘든 만큼 더 마음을 단단히 하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를 갖는다. 아침에 글이 사라진 후 멘붕이 오면서 책 출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문득 들 정도로 막막했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사위가 구세주였다. 자기 할 일을 뒤로하고 내일을 해 주기 위해 한나절이 넘는 시간을 절치부심하며 글을 모아 주었을 사위 생각에 마음이 울컥해 온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곁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든든하다.
9월이 며칠 안 남았지만 나는 해 낼 것이다. 책 원고 마감 할 때까지 나는 당분간 그림도 쉬고 글 퇴고하는데 전념해야겠다. 일주일에 두 번 나가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림 선생님에게 사정이야기를 하고 양해를 구했다. 또 한길 문고 목요 글쓰기 방에 가는 일도 결석을 하려고 작가님에게 사정이야기를 했는데
작가님이 걱정을 하시며 무언가 도울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말만 들어도 기운이 난다.
점심은 빨리 먹기 위해 깨죽을 끓였다. 결석하려 했던 목요 글쓰기 방에 가기 위해서다. 지난주 수업하고 놓아두었었던 노트북을 꺼내 충전을 하고 배낭에 가져가야 할 짐을 챙긴다. 말이란 이 처럼 사람 마음을 바꾸어 놓는다. 여기저기에서 응원을 해 주니 꼭 잘 해낼 것 같은 느낌이다. 모두 내일처럼 걱정해 준다.
우린 살면서 서로 에너지로 세상의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간다. 사실 쉬려고 했다가 한길 문고에 가니 작가님이 반가워하신다. 그 기운이 사람을 살게 한다. 나는 80이 넘는 나이에 백팩을 메고 노인정이 아닌 서점에 글을 쓰고 있으니 이만 하면 복 받은 사람 아닌가. 이 나이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설령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좋은 에너지로 잘 살아 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82세 할머니. 모두 조용히 앉아 글 쓰고 있는 이런 분위가 나는 좋다. 그리고 감사하다. 옛날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을 나는 지금 하고 있다. 나 개인으로 독립된 자아를 찾아 내 인생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때론 우연히 마주치는 글을 쓰게 되면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내 삶도 아마 기울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