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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타이퍼 Jun 01. 2020

끝이 끝나는 건...

텅빈 마음으로 흘러가는 일




  한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물건은 몇 가지나 되는 걸까. 정리를 하고 또 해도 짐이 태산 같다. 다 이고 지고 갈 수는 없으니 과감히 여러가지를 포기해야만 한다. 없어도 살아지는 것들과 있으면 편한 것들,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을 나누기로 했다. 그런데 대부분이 없어도 살아는 지지만 있으면 편한 것들이다. 또 일부는 지금은 없어도 살아지지만 필요할 때가 올 것만 같은 것들이다. 큰 맘을 먹고 버릴 것들을 추려내겠다고 쓰레기봉투를 꺼내 앉아서는 버릴 것을 다 가리지 못하고 도로 집어 넣었다. 이러기를 몇 주째다.


  내 짐 중에 가장 큰 짐인 고양이를 두고도 다섯 달을 고민했다. 살 집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하루에도 수차례 결정을 번복했다. 내 처지에 지금 고양이는 무리다 다 주고 나만 나오자의 지극히 이기적 현실주의자인 나와, 자식 같은 애들인데 포기할 수 없다 무리하더라도 데리고 나가자의  이타적 윤리주의자인 내가 끊임없이 다투었다. 어느 날은 내 다리를 베고 자는 녀석이 짠해서 이대로 헤어질 순 없을 것 같다며 이타적 윤리주의자가 됐다가 또 다른 어느 날은 해결해야 할 부채와 내 밥벌이력의 갭을 생각하며 이기적 현실주의자로 돌아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며 몇 달을 보내면서 한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후회는 따라오리라는 것을. 지금은 양쪽의 후회를 고려하여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내 결정에 확신이 없다. 한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물건의 가짓수와  필요한 고양이의 마릿수를 생각해 본다.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로만 간소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그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은 어떻게 감당해 보기도 전에 알아서 결정할 수 있는 걸까.



  끝은 어떻게 나는 걸까. 이렇게 물건을 버릴지 가질지 결정하고 고양이를 데려갈지 두고 갈지 결정하면 끝이 나는 걸까. 내 십 년의 삶이 끝나는 순간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아니면 이미 끝은 지났고 어떤 형태로든 세리머니만 남겨둔 상태인걸까. 수업은 끝났지만 졸업식이 아직 남은 고3처럼. 내 고등학교 졸업의 기억을 되짚어 본다. 나는 대학의 입학식에 가서야 고등학교의 졸업을 제대로 실감했었다. 완전히 달라진 환경, 주변 사람 그리고 새로운 분위기에 그제야 다른 신분의 나를 자각하게 됐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를 하고, 살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살기 시작하고, 적당히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내 십 년 세월의 끝을 실감하게 되는 걸까.




  물건 정리도 고양이 선택도 이 끝의 끝도 모두 내 인생에 필요한 일이라면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 곧 졸업식도 없이, 졸업식 사진도 없이, 짜장면 탕수육도 없이 이 끝은 끝나겠구나.







  호주의 가을과 겨울사이의 날이 시작되자 고양이들이 전기장판을 소지한 내게 들러붙는다. 새벽에 눈뜨니 네 마리가 다닥다닥 내 옆에 붙어 있었다.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이 세상 최고 꼴통 첫째는 내가 아니라면 누구도 사랑해 주지 못할 것 같아서 데려가기로 했다. 내 손으로 직접 사인해서 완벽한 자의로 입양한 둘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책임지고 싶어서 데려가기로 했다. 내 의사에 반해서 그가 제멋대로 들였던 셋째와 넷째를 그의 책임으로 남겨두는 것이 가장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사람에게만 공평한 것이다. 고양이들의 의견은 다를지도 모른다.


내 품에 안겨 자는 걸 좋아하는 셋째가 이불을 들추니 쏙 들어와 내 팔을 베고 눕는다. 마음이 텅 비어버린다. 죄책감이 들어 찰 자리를 만드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친구 W는 이런 고민을 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돌볼 여력이 안되면서 키우겠다고 덤비는 놈이 바로 애니멀 호더다.]


  내게 모두를 돌볼 여력이 지금으로선 없다.  두 마리 조차 무리가 있다. 하우스 쉐어에 고양이 두 마리를 데리고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같이 살자고 먼저 제안해 준 해와 헌 부부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고양이 둘을 데리고 오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모두를 포기하고 나와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하늘이 돕는 인복으로 겨우 둘이라도 챙길 수 있게 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텅 빈 마음 대신, 어떻게든 빨리 상황을 수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 울지 않을 자신이 없고, 그리워하지 않을 자신이 없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이불을 들추면 들어와 안겨 잠드는 아이를 떼어놓고 갈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지금이지만 그게 최고로 자신이 없다. 얼마나 많이 시간이 흘러야 그 죄책감으로 채워진 텅 빈 마음이 멀쩡해질 수 있을까.





  이사를 일주일 앞두고 해헌네를 다시 찾았다. 이사 날짜가 갑자기 결정된 것은 내가 마감일이 없으면 일 진행을 잘 못하는 전형적인 INTP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짐을 싸겠다고 박스만 하나 둘 쟁이고 버릴 걸 정리하겠다며 쓰레기봉투만 자꾸 만지다가 아무 진척이 없으니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덥석 이삿짐 아저씨에게 연락을 했다. 딱히 가구를 옮기는 것도 아니라서 혼자 할까 했지만 아무래도 허리병의 후유증이 있는 상태이다 보니 자칫 무리가 될까봐 이삿짐 서비스를 신청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내가 혼자 짐을 옮긴다고 궁상을 떨고 있으면 보고만 있기가 힘든 해헌부부가 도와준다고 나설게 뻔하니까 그런 폐 끼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도 그게 맞는 거 같았다.


  아저씨에게 이사 날짜를 예약하고나니 발등에 불이 떨어져 전에 없던 스피드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마감일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마감의 노예였다. 시험 전날에 가장 공부가 잘되고 과제 제출 기한일 바로 전날 밤에 가장 과제가 잘 되는 그런 시간 압박필수형 인간으로 살아온 세월의 짬바가 쉽게 사라질 리 없다. 짐을 싸면서 고민했던 것은 다시 렌트를 해서 나올 때를 대비해 더 챙겨야 할지, 당분간의 생존만을 대비해 최소한의 것들만 챙겨야 할지의 문제였다. 언제까지나 해헌의 집에 얹혀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다리고 있는 이하가 한국에서 돌아오면 함께 렌트를 할 계획도 있다. 하지만 해헌의 집에 내 물건을 짐처럼 쌓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몹시 신중하게 선별적으로 짐을 싸야 했다.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다 결국 빼 버린 것과 끝내 챙긴 것들은 어떤 확고한 기준에 의해 분류되기보다는 그 순간의 직감으로 그리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마도 후에 이딴 건 대체 왜 챙겨 온 건가 싶은 것들과 아 그때 그걸 챙겼어야 했는데의 그것들이 마구잡이로 생겨날 것이다.


  해헌의 집에서 내가 살게 될 방안에는 고양이들의 필수품인 스크레쳐가 도착해있었다. 내 변변찮은 밥벌이력을 고려해 집에 쓰던 것을 들고 갈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아무 죄 없는 셋째와 넷째를, 특히 나를 믿고 좋아해 주는 셋째를 여기에 두고 가는 매정한 전 보호자가 될 텐데 그들의 소중한 스크레쳐까지 훔쳐 갈 수는 없다. 차라리 내가 좀 더 가난하기로 하고 주문을 미리 해 두었다. 어차피 렌트를 하려고 했으면 이보다 더 큰 지출이 있었을 것이고 장기적으로도 하우스 쉐어에 비해 큰 금액이 고정지출로 빠졌을 테니 그에 비하면 이런 작은 지출은 감내할 만하다며 이 소비에 대해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고양이 가구 중에 가장 중요한 스크레쳐는 일단 해결이 되었고 인간의 가구 중에 가장 중요한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므로 제외하면) 책상이 아직 미결 상태이다. 지금 쓰고 있는 책상은 사실 책상이 아니라 작은 식탁으로 나온 것이라 사이즈가 작은 방에 들어가기엔 부담스럽다. 책상 없이 살아볼 까도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내가 알고 있는 책상 중 가장 저렴한 IKEA 책상을 구매하려고 했는데 하필 품절이다. 이게 다 바이러스 시국으로 인해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책상과 책상용 의자가 불티나게 팔려나간 탓이라 했다. 다른 가구 전문점의 가장 저렴한 책상 라인들도 하나같이 품절이었다. 이 바이러스 시국은 여러모로 내 행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만 그게 비단 내게만 일어난 불운은 아니니 마음을 비우고 책상이 재입고 되기를 차분히 기다리기로 한다.


  고양이의 가구로 돌아가서, 두 번째로 중요한 (어쩌면 인간의 입장에선 첫 번째인) 똥간을 하나만 새로 구입했다. 원래 쓰던 고양이 화장실을 반 나누어 가져가지 않는 것은 남겨질 아이들의 삶의 질을 위해서이다. 앞으로 그들을 전적으로 돌봐야 하는 의무자의 성실성에 대해 이 세상 누구보다 큰 불신을 가지고 있는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고양이 화장실의 개수가 줄어드는 것은 곧 화장실 교체의 빈도수가 줄어드는 것임을. 하지만 나도 땅 파서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니  6개 중에 하나는 가져가고 5개는 그들의 보호 의무자가 부디 제때 갈고 씻고 말려 주길 바라며 남겨두기로 했다. 나도 하나로는 모자라니 한 개 더 구매를 했다. 이렇게 어제보다 오늘 1불치라도 더 부자가 되겠다는 내 원대한 소망의 실현을 잠시 미룬다.


  이삿짐 서비스는 예약이 되었고, 짐은  이상이 박스에 단단히 싸여 있고, 고양이의 필수품  가지가 구비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나는 어떠한가. 나는 준비가 되었는가? 나는 아직 '모르니요' 상태에 있다. 준비가    같기도 하고   같기도 하고 모르겠는 중이다. 하지만 마감일에 의해 움직이는 압박필수형 노예는 당일이 되면 마음의 준비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사를 차질 없이 해낼 것이고 데리고 나온 아이들이  환경에 적응할  있게  신경을 집중할 것이다.  마음의 준비 같은  필요가 없는 일이 되어 흘러갈 것이다.  마음의 준비는 영영  리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편이 차라리 다행인 걸지도 모른다. 사라져버릴 셋째의 나와  비어버릴 나의 셋째, 영영 준비될 리가 없는 일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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