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제 오랜만에 전에 모시던 상사를 만났다. 감사의 뜻을 꼭 전할 일이 있어서 오래 전부터 어렵게 약속하고 기다리던 만남이었다. 지금 한 중견기업의 대표를 맡고 계시는 분이다. 오랜만에 얼굴 뵈면 좋을 것 같고, 따뜻한 분이라 참 즐거운 시간일 거라는 생각은 하고 나갔지만, 2시간 뵙고 이야기하는 동안 너무나 많은 위로와 깨달음을 얻어서 잊기 전에 기록해본다.
이 분은 신앙이 깊기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새벽 기도도 꾸준하게 하시고, 성경 공부도 많이 하시고. 무엇보다 신앙의 가르침을 삶에서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분. 그러나 종교를 강요하는 분은 아니셨다. 이 날도 성경에 기반한 신앙에 기초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러나 난 신앙이 없으므로 그 철학만 받아들였다. 믿음이 없더라도 진리는 통한다고 생각한다. 가져야 할 마음자세를 ‘하느님의 뜻’으로 보느냐 아니면 ‘인생 살아가는데 필요한 진리’로 보느냐의 차이인 것 같고 그 핵심은 같다고 생각한다.
가장 크게 와 닿은 부분은 인생 살면서 힘을 빼야 한다는 것. 신앙의 언어로 하면 어차피 인생은 ‘하느님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 지금 일어나는 일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막상 그 일이 닥쳤을 때 생각해보면 좌절이고, 부정적인 사건이지만, 길게 보면 하느님께서 다 뜻하는 바가 있어서 배치해 놓은 설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상사께서는 대기업에서 임원을 하시다가 구조조정의 바람에 혼을 쏟아 일하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비자발적으로 그만두게 되셨다. 억울한 면도 많을 법한 인사였다. 그러나 이런 일을 당하시고도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셨다고 한다. 그 동안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협력사들 그리고 고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충분히 전하고, 좋은 마음으로 회사를 그만 두셨다고 한다. 쉬는 동안 성경공부를 6개월 동안 열심히 하시던 중 이전보다 더 큰 계열사에 더 좋은 자리로 복직하시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전에 쌓아 놓으셨던 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상사의 인품과 능력을 좋게 기억하고 계셨던 경영자들께서 다시 불러야 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내셔서 그룹으로 돌아오시게 되셨다고 한다. 새로운 일을 하면서도 힘든 부분이 많이 있었지만, 역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지내시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지금 회사의 대표 제의를 받고 이직하시게 된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가족이 있는 상태에서 회사를 강제로 그만두게 되는 것은 분명 엄청난 시련이고 좌절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계기가 되었으므로 그 모든 시련은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다 성장에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큰 설계의 한 조각.
이런 사례는 각자의 삶에도 주변에도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 때는 좌절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도움이 된 사례들. 하느님께서 설계하셨으니…라고 생각해도 좋고 아니면 모든 일에는 분명 배울 점이 있다, 모든 시련에는 이겨내기만하면 분명 내 자산으로 만들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또한 지금 안 좋아 보이는 것들이 나중에 어떻게 좋게 연결될 지 모른다는 사실, 그러니 인생을 짧게 잘라서 그때 그때의 유불리를 따질 것이 아니라 길게 보고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지금 당장의 일에 너무 아둥바둥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지금 하는 일이 성공하도록 절박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일에서 설사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을 길게 봤을 때 마이너스일지 플러스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만에 하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교훈을 얻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힘을 빼라는 것이다. ‘결과’에 집착하면 ‘본질’에 힘을 쓸 수가 없다. 어떻게든 지금 당장 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잘 내야 한다는 마음이 지나치게 커지면, 조급해지고, 꼼수를 쓰게 되고, 팀원들을 몰아치게 되고, 평정을 잃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러면 잘 될 일도 안될 뿐더러 이 시기에 얻어야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없게 된다. 무엇보다 긍정적이고 행복하게 살 수 없다. 그래서 힘을 빼야 한다. 신앙인이라면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즉 설계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난 그것에 맞추어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비신앙인이라면 ‘결과’ 보다는 ‘과정’에 충실하고 본질에 집중하자는 마음자세를 가지면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힘을 빼야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내가 성장할 수 있고, 그리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돈도 명예도 다 마찮가지라고 하셨다. 돈을 손에 꼭 움켜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단기적으로는 돈을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지키는 것이 힘들다. 돈은 그것을 벌고 유지할 수 있는 마음과 역량의 크기가 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돈 자체에 집착하면 안된다. 오히려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돈이라는 것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결과’이다. 본인의 능력과 전문성을 열심히 키우다 보면 언제가 임계치가 넘으면 그때부터 돈이 들어오는 것이고 쌓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도는 없다. 우연히 행운으로 로또나 주식으로 벌어도 본인의 역량으로 버는 것이 아니면 지속가능하지 못하다. 명예도 마찮가지이다. 집착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용써서 혹은 운으로 얻어봤자 길게 지켜내지 못한다. 그러니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다보면 따라오는 것이 돈과 명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자유로워진다. 돈과 명예와 당장 하는 일에서의 성공여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멀리 보고 하루하루 본질적인 인격과 실력을 쌓는 것에 집중한다. 인생은 장기투자이다. 축구선수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님은 그의 책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에서 인생은 선불이라고 했다. 지금 하는 투자가 10년 뒤 혹은 15년뒤에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니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가면 된다. 살아가다가 뜻대로 안 풀리는 날이 있더라도 그것에서 교훈을 얻고, 결국은 장기적으로는 득이 되는 선물 하나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아가자. 그러면 된다.
기업에서의 성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처음 임원이 되고 나서 팀장일 때보다 훨씬 더 ‘성과’라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다. 임원의 세계는 냉정해서 모든 것을 ‘성과’로 평가 받는 곳이고, ‘성과’가 없으면 나의 내일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바로 성과 나지 않는 것에 꽤나 괴로워했다. 솔직히 ‘이러다 잘리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도 정말 많이 했다. 고백하건데 나의 성공을 위해서 직원들을 몰아친 적도 많다. 상사는 생각이 좀 다르다고 했다. 기업에서의 ‘성과’나 ‘성공’이 반드시 본인이 자리에 있을 때 날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 보통 성과나 성공이라는 것은 리드타임이 있기 때문에 씨를 뿌려놓더라도 그것을 거둘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하여 그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했을 때 이후에 성과가 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셨다. 해서 지금도 같은 마음이라고 하신다. 결국은 회사가 잘 되어서 그 회사에 있는 사람들이 배우고 성장하고 행복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꼭 본인이 있을 때 꽃을 피워서 그 공을 가져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쉽게 동의가 안되는 사람이 많을 지 모르겠다. 난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항상 일을 하는 이유가 나와 동료들의 ‘성장’과 ‘행복’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사실은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했던 것이다. 만약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나와 동료들의 성장과 행복이라면 성과가 나중에 나와도 결국은 내가 성장하는 것이고, 동료들도 성장하는 것이다. 1년이 걸리든 2년, 3년이 걸리든 결국 우리가 쏟았던 노력이 빛을 본다면 그것이 틀리지 않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성장한 것은 결국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머리에 남는 것인데. 내가 너무 단기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었구나.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돈’과 ‘명예’에서 자유롭고 장기적으로 본질에 집중하면 된다는 믿음만 있다면 단기적인 성과에 있어도 자유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을 과연 나의 상사나 회사가 알아봐 줄 것이냐의 문제가 있지만, 진정성 있는 노력을 보여주고, 그것이 반드시 장기적으로 회사의 가치를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설득한다면 분명 믿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존경하는 정신분석 전문의 김혜남 선생님은 하나의 문이 닫히면 하나의 문이 또 열린다고 했다. 만약 지금 이 길이 나와 맞지 않아 닫힌다고 해도 분명 나에게는 또 다른 더 좋은 하나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문을 너무 꼭 붙잡고 집착하지 않아도 좋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리는가? 돌아보면 내가 존경하는 모든 영웅들 – 손정의, 손웅정, 손흥민, 스티브 잡스, 마스다 무네아키, 이나모리 가즈오, 모 가댓, 구본형, 토이 셰이 – 그들은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유롭게 한발 한발 원하는 삶을 만들어 간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작은 시련에 마음쓰지 않고, 혹은 우쭐해 하지도 않고, 모든 것에 감사하고 배움으로 여기며 과정에 집중하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그들의 성공 (돈, 명예가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가치를 이뤄낸 것)을 통해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힘을 빼자는 것이 ‘열심히 살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는 높은 뜻을 가지고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절박하게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언젠가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힘만 뺀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Input이 들어가야 Output이 나온다. 다만 과정과 결과를 분리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자는 것이다.
전혀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하루하루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는 살아 내기가 쉽지 않은 이 가치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은 약한 인간이기에 지속적으로 이런 자극이 필요한 것 같다. 내 인생에 이렇게 멋진 조언과 자극을 주는 멘토들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마음 속 깊이 감사하며,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내려놓자. 힘을 빼자. 결과에 집착하지 말자. 과정에 최선을 다 하자. 인생을 길게 보자. 시련이 있다면 오히려 배움을 얻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자. 오늘 이 순간을 즐기자.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자.
그리하여 돈, 명예, 성과의 노예가 아닌 그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