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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Feb 18. 2021

러시아어 수업 (1)

한국인 선생님이 스웨덴 어른들에게 러시아어 가르치면

오늘은 개강일이다. 집에서 근무를 마치고 5분 만에 이른 저녁을 먹고 학교로 갔다. 스웨덴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지 10년. 올겨울/봄이 어느덧 20번째 학기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개강일만 되면 새 학기에는 어떤 학생들을 만나게 될까 하는 생각에 늘 마음이 설렌다. 그리고 학생들이 어떤 사연과 동기로 흔치 않은 한국어나 러시아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는지 궁금하다.

작년 가을부터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급속도로 늘어서 스테판 뢰벤 스웨덴 국무총리는 대면 모임은 인원은 최대 8명까지만 허용한다는 것, 또 권고사항이었던 코로나 지침을 수정, 강화하였다. 이것은 국회의 논의를 거쳐 법적 효력이 있는 법안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학교 수업 역시 대부분 온라인 강의로 전환이 되었다. 첨단 기술 국가인 스웨덴 사람 중에 온라인 강의보다 교실 수업을 선호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몇 개의 강의는 한 수업 당 7-8명 단위로 잘라서 교실 수업을 하기로 했다. 내가 맡게 된 러시아어 강의도 마찬가지다.


교실에 들어가서 노트북을 켰다. 아니나 다를까, 학생들은 교실에 들어오려다가 먼저 온 나를 보고 웬 동양인 여자가 (패션과 화장이 러시아에 사는 동양인이나 러시아어를 쓰는 중앙아시아 여자와는 사뭇 다른) 앉아있나 하면서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어떤 학생은 문에 달린 강의실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러 교실에서 나갔다.  

"여러분, 러시아어 수업에 오신 걸 환영해요." 우선 영어와 스웨덴어로 말을 하자 학생들은 그때서야 '이 사람은 뭐지'하는 표정으로 다시 교실에 들어와 책상에 앉는다. 

이게 내가 러시아어 첫 수업 시간만 되면 겪는 일이다. 

얼굴 표정 기본값이 무표정인 스웨덴 사람들 (일부러 포카 페이스를 하는 것은 아니다. 스웨덴 문화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미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 유학시절에 스웨덴 학생들을 가르쳤던 러시아 선생님들이 스웨덴 학생은 얼굴 표정 변화가 없어서 수업에 대한 반응을 알 수 없어 답답하고 힘들다고 한 생각이 난다. 그래도 다행히 스웨덴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서 이제 나는 그 무표정의 미세한 변화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다. 

자, 여기서 내가 쭈삣거리거나 주춤하면 절대 안 된다. 자신 있는 표정으로 나의 검은 고동색 눈을 학생 한 명 한 명의 파란 눈, 초록 눈, 밝은 갈색 눈과 맞추며 러시아어로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요. 내 이름은 XXX라고 해요. 여러분은 왜 러시아어를 배우나요? 자, 한 명씩 돌아가면서 말해볼까요?"라고 영어/스웨덴어로 먼저 말하고 다시 러시아어로 말한다. 


20대로 보이는 남학생은 대학교에서 러시아 친구가 많아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다고 한다. 한 스웨덴 직장여성은 코로나인데 사람들도 만날 수도 없고 너무 심심해서 뭔가 신박한 것을 배우고 싶어서 러시아어를 선택했단다. 한 중년 직장인은 상뜨 페테르부르크에서 프로젝트를 하며 2년 살았는데 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면서 러시아어 공부를 병행하기가 어려웠단다. 코로나 때문에 스웨덴에 귀국하게 되었는데 아파트를 사놓고 왔단다. 다시 러시아에 가서 살게 될 때를 대비해서 지금 러시아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단다. 또 한 학생은 스웨덴에서 자라서 40대에 접어든 러시아 사람인데 어린 시절 집에서 부모가 러시아어를 들으면서 자랐지만 본인은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이제 어른이 되어서 다시 모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단다. 20대로 보이는 어린 여학생 한 명은 어머니는 러시아 사람이고, 아버지는 스웨덴 사람이어서 스웨덴어만 사용했단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니 자신의 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단다. 코로나가 지나고 모스크바에 방문하면 그곳에 사는 친척들과 러시아어를 하고 싶어서 수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두 학생이 나를 보고 '어.. 러시아 사람도 아닌 저 한국 사람도 러시아어를 배워서 가르치는데 나는 어렸을 때 러시아말을 들었으니까 이제 공부하면 더 빨리 잘하게 될 거야"라는 자신감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카리스마 작렬하는 다른 학생 두 명은 직장동료인데 유럽연합위원회에 안보 관련 스웨덴 대표로 파견되어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업무를 한 후 스웨덴에 귀국했단다. 몇 년 후 다시 러시아어권 국가에 파견되면 러시아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싶어서 수강신청을 했단다.


오픈대학교에서 강의의 묘미 중 하나는 나 역시 언젠가 학생이었고, 직장 생활을 한 지도 오래되어서 다양한 연령층과 사회적 배경의 학생들과 좀 더 쉽게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수업 시간에 교실에 앉아 있을 때는 다 같은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귀 기울여보면 한 명 한 명이 저마다의 사연과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 재미있다. 사람 한 명 한 명의 삶의 모습은 얼마나 다양한지 모른다. 그리고 나이에 상관없이 생업과 공부로 바빠도 뭔가 배우고 발전하고자 시간을 할애해서 빠지지 않고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좋은 자극을 받는다.   


한 시간이 지나고 잠깐 쉬는 시간을 갖는데 한 학생이 "몇 살이세요?"... 여기서 좀처럼 서로 안 하는 질문을 한다. 아... 내가 소련 붕괴 후 90년대 초반에 러시아에 교환학생으로 처음 갔는데 가게에 갔더니 사람들이 탈론 끊고 줄 서 있고 물건도 별로 없더라 뭐 이런 이야기를 해서 그렇구나... 그건 그렇고 "라때는 말이야..."를 내가 스웨덴 학생들 앞에서 하게 되다니...

갑자기 기억이 났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을 때 약간 마르고 단단해 보이던 체구에 짙은 갈색의 짧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실용 러시아어 선생님께서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 첫 수업시간에 당당하게 "난 40살이야. 내 나이를 숨기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나는 그때 그 교수님보다 나이가 많다. 나도 웃으면서 당당하게 내 나이를 밝혔다.(그런데 내 나이를 듣고 동공이 흔들리는 다른 학생들을 보자 살짝 후회가 되었다). 그러자 다른 여학생이 "선생님 진짜 젊어 보여요" (내가 동안이어서가 아니라, 유럽에 사는 동양인이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페테르부르크에 유학 가기 전 한국에서 박사과정 하던 시절, 우리나라 학생들을 가르칠 때와 지금 스웨덴 학생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맛이 또 다르다. 스웨덴 학생들에게도 슬라브어인 러시아어는 모국어인 북유럽 어와 다른 점이 많아 선뜻 선택하기 힘든 언어이다. 게다가 끼릴 문자에 대한 부담감도 있어 러시아어는 이 곳에서도 생소한 언어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처음에는 약간 겁을 내는 경향이 있는데 첫 수업 시간에는 우선 스웨덴어와 비슷한 점 위주로 시작하면서 "스웨덴어랑 러시아어 참 비슷한 게 많지?"라고 유사점을 강조하면 웃으면서 잘 따라온다. 일단 첫 수업시간에 전자 출석부가 있어도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물어 칠판에 스웨덴어로 적고 그 옆에 러시아 문자로도 적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 성경 맨 첫 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피조물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었다. 학생들은 자신의 이름에 포함된 문자는 라틴문자와 전혀 다르게 생겼어도 금방 잘 외운다. 쉬는 시간 빼고 쉴 틈을 안 주고 계속 돌아가면서 연습하게 한다.

두 시간 정도 수업을 한 후에 느끼는 보람의 크기는 매일 최소 8시간 하는 회사일을 한 후에 느끼는 보람에 비해 절대 덜하지 않다. 강의실에는 스트레스는 없고, 기분 좋은 긴장감이 곁든 즐거움과 명랑함이 있다. 그리고 시험 점수가 목표가 아닌 내적, 외적 동기로 스스로 원해서 뭔가 배우는 사람들이 주는 경쾌한 진지함이 느껴진다. 

술은 맥주도 잘 못 마시는 내게 케이크를 먹는 행위는 술 마실 줄 아는 사람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캔맥주를 마시거나 치맥을 먹는 행위와 같다. 신기하게도 회사 퇴근 후에는 그다지 케이크가 먹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강의가 끝나면 나는 늘 내게 케이크를 사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집에 오는 길에 속에 크림이 잔뜩 든 부다페스트 케이크를 사 왔다. 


새해가 오면 늘 계획하는 다이어트는 올해도 계속 꾸준히 작심삼일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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