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2
어딘가에 속했을 때 한 명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사람들과 소통하고 가까이 지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친구가 많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감히 건방지게도 나를 좋아해 주는 '안전한' 친구보다, 이후 관계의 지속성이 어찌 될지 모르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친구를 만났다.
10대에 만난 여러 친구들 중, 마음을 터 놓은 친구는 한 명이었다.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그때, 섬세하게 이야기하는 타입이 못 되어서 여러 친구들의 마음을 서운하게 했다. "내가 왜 네 이야기를 다른 사람 입에서 들어야 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라는 식의 정답 없는 질문 세례를 받을 때면, 도무지 모르겠는 정답을 맞혀야 할 것 같아서 눈만 동그랗게 떴다.
20대에는 더 많은 사람들을 짧은 시간 안에 만났는데,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학교와 집'에서 형성되던 관계에 '아르바이트', '교회', '동아리', 등이 더해졌지만, 여전히 속한 곳에서의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주 빠르게 휘몰아치듯 살아냈던 나의 21살부터 33살까지. 나는 줄곧 1-2명의 친구와 소통하며 내 삶을 보이고, 그들의 삶을 통해 다른 세상을 구경했다. 친구 K는 나와 아주 다른 외모와 성향이었는데(겁나 예쁨+성격 쏘쿨) 우리의 유일하게 공통적인 부분은 함부로 서로의 삶에 선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사건들을 겪으며 살아낼 때에도, 그때그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오고 나서도 마음 편히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 이토록 깊이 있게 살아갈 수 있다니. 놀라웠다. 나에게 세 번째 언니가 있다면 그건 바로 친구 K 었다. 세련되고 예쁜 외모와 달리, 생각도 말도 구수하기 그지없는. 최소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통찰력과 혜안이 뛰어났던 친구였다.
가치관이나 우선순위, 사랑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부대끼는 모두와 살아가는 방식이 그녀의 가치관을 보여주었으니까. K가 조심스레 본인의 치부를 꺼내 들었을 때, 나에게 이야기해주어 참 고마웠다. 그녀를 위해서 보다 명확히 기도 할 수 있었으니까. 나의 치부를 그녀에게 자발적으로 나서서 보일 때에도 , 말할 수 있고 힘입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기뻤다.
아주 많이 만나면 계절마다 한번, 그렇지 않을 때에는 1년에 두어 번만 만나도 그 관계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여름과 겨울에 서로의 생일이 있어 아무리 못 만나도, 여름과 겨울에 휴가를 써가며 생일 당일 점심만큼은 함께했다.
그러던 작년 내 생일. 하루 종일 K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늘 생일날 자정이면 시간 맞추어 연락이 오던 친구였기에 '바쁜가 보다 ' 했고, 오후가 되니 '까먹었나?' 싶었다. 섭섭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하루가 지나서 출근을 하는데 분명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며 전화를 두어 번 걸었다.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서너 시간 뒤에 돌아온 장문의 메시지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한 문장.
'인생에 Reset 버튼이 있다면 거침없이 눌러버리고 싶어'
함께 보내온 내용에는 아무 일도 없지만, 당분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생일인걸 알고 있었지만, 진심 어린 축하를 해줄 수 없어서 도무지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나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어안이 벙벙해서, 어떻게 회신해야 할 지모르겠지만 답은 보내야겠어서. 그때의 마음에 더하거나 덜어낼 것 없이 생각한 그대로를 적어 보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짧게 줄이는 법을 몰라서, 읽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구구절절. K에 대한 걱정과 속상함으로 똘똘 뭉쳐진 마음이 배꼽 아래로 저만치 내려가 불안해 한 군데로만 시선을 둘 수 없었다. 두서없이 보낸 메시지에 회신을 받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 몰랐다. 수일 내에, 몇 주내에 연락이 오겠지. 아무리 길더라도 한 계절을 넘어서리라고는 그때는 생각 못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는 데, 함부로 K의 마음을 헤집을 수는 없어서. 마냥 걱정하고 마냥 기다렸다. 그렇게나 가까웠는데 K가 그어놓은 경계선을 기준으로 나는,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허탈하고 허황해서 마음에 구멍이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았다. 일과 가정에 집중하느라 바쁜 일상에도 잠깐 멍해지는 찰나에는 어김없이 '도대체 왜?' '내가 잘못한 게 뭐였지?' '이것도 잘못, 이것도 잘못...' 몇 번이고 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분노했다가 억울했다가, 이내 추스를 수 없는 마음에 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연거푸 속상해하는 나를 보며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잔인하지만 맞는 말.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서글프고 또 그렇게나 위로가 되었다. 실제로 나는 K가 위급한 상황에 놓였거나, 뉴스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에 휘말린 건 아닌지 매일같이 걱정을 했다. 남편의 말처럼 그녀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보다 나와의 관계만 정리되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그렇게 위로 아닌 위로로 또다시 여러 계절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며 K가 그어두었던 경계선에서 나는 한참이나 더 멀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K를 상처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내게 그녀는 누구에게도 '내 친구' 였으며 내 자랑이자, 내 가족이니까. 인내심 제로에 더러운 성질머리를 소유한 나를, 기다림에 대해 알게 해 주고 애잔함을 느끼게 해주는 이는 K가 유일할 거다.
잠깐 만료인 줄 알았던 관계의 유통기한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K를 언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있는 힘껏 끌어안아줄 거다.
#보고싶은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