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업계의 서브컬처 열풍, 그리고 캐릭터의 역할
'캐릭터'와 '스토리'는 콘텐츠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요소입니다. 좋은 스토리와 매력적인 캐릭터가 만난다면 그 콘텐츠는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겠죠. 가령 둘 중 하나만 훌륭해도 콘텐츠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가 남는 콘텐츠, 스토리가 남는 콘텐츠처럼 말이죠.
[이제는 아이템이 아닌 캐릭터로 돈을 번다]
콘텐츠 산업의 핵심 카테고리 중 하나인 게임 업계에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 게임에는 기술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었습니다. 화려한 타격감과 효과, 그래픽 퀄리티, 카메라 앵글 같은 것들이 몰입감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근래 들어 퀄리티 상향 평준화가 이뤄지며 이런 기술적인 요소로는 격차를 만 늘어내는 데 한계가 나타났습니다. 흥미로운 세계관과 스토리, 캐릭터의 서사가 중요해졌고 특히 MMORPG 영역에서 이런 내러티브는 큰 성공사례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게임회사들은 이 위에 '확률형 아이템'으로 대표되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고객들은 더 많은 돈을 주고 더 강력한 아이템을 구매함으로써, 상대방보다 강하고 화려한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과금은 성공적이었고, 몇몇 회사를 거대한 기업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이런 기조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무리한 과금에 대한 유저들의 피로감도 극에 달하던 시점 등장한 게 중국 게임회사인 미호요(miHoYo, 米哈游)의 원신(Genshin)입니다. 누적매출 6조 원을 돌파하며 메가 히트작으로 자리매김한 원신은 온라인 게임이자 RPG 장르지만 기본적으로 싱글 플레이 게임입니다. 누구와 비교하고 경쟁하는 방식이 아닌 거죠. 원신의 성공은 국내 MMORPG가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던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캐릭터에 서사가 부여되다]
원신의 가장 큰 특징은 '확률형 아이템'이 '확률형 캐릭터'로 변경되었다는 점입니다. 단어에서 볼 수 있듯 원신 역시 기존 RPG게임과 동일하게 확률형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캐릭터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했죠. 게임 내에서 서사를 부여하는 대상이 세계관에서 캐릭터로 확장되었고, 고객들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갖기 위해 과금합니다. 미호요는 같은 방식으로 '붕괴:스타레일' 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확률형 아이템과 확률형 캐릭터,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캐릭터에 대한 유저의 몰입감은 아이템보다 강력합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일 역시 난도가 높습니다. 설득력 있는 '스토리 텔링'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죠
[컷신(Cut scene)과 스토리텔링]
게임에서의 컷신, 또는 이벤트 신(Event scene)은 보통 '건너뛰기'를 누르는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게임은 플레이가 중심이고 스토리는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원신의 컷신은 유저들이 함께 즐기고 빠져들 수 있는 하나의 콘텐츠가 되었습니다. 원신이 갖고 있는 스토리가 탄탄하고 몰입감 있었기 때문도 있었고, 그 스토리를 표현하는 애니메이션에 상당한 공을 들였기 때문도 있었습니다. 높은 퀄리티의 캐릭터 소개 영상은 특히 유저들에게 큰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원신의 공식 캐릭터 영상은 수백만 회에서 천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신규 유저를 게임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원신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캐릭터 중 하나인 '종려(Zhongli)'의 캐릭터 소개 영상은 무려 3,300만회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https://youtu.be/4oBpaBEMBIM?si=QuBjdMV3nqKyDMDx
여기에 컷신이 실제 플레이와도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액션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점 역시 유저의 몰입감을 배가시킵니다. 컷신만 화려한 것이 아니라, 진짜 게임에서도 동일한 형태의 그래픽 퀄리티가 구현되도록 만들었죠. 이런 세세한 노력들이 유저들의 몰입감을 한 층 끌어올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보입니다.
https://youtu.be/nw-kKwHbEos?si=ludfvHdb69sJPWHu
이러한 캐릭터 판매는 원신 성공에 큰 뒷받침이 되었습니다. 원신의 핵심 캐릭터 중 하나인 '라이덴 쇼군'은 출시 이후 몇 주만에 수백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원신이 빠르게 성장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게임의 전체 성장을 이끈 셈이죠(라이덴 쇼군은 글로벌 AI 채팅 서비스인 character.ai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미호요는 캐릭터의 3D 모델링 파일을 배포해 팬들의 2차 창작을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애니메이션 작업이지만 팬들이 만든 팬메이드 영상은 캐릭터들의 노출빈도를 올리고, 이를 통해 유입된 유저들이 다시 게임으로 전환되는 순환구조를 만들기도 했죠.
https://www.g-enews.com/article/ICT/2023/01/202301161202244800c5fa75ef86_1
국내에서는 시프트업의 '승리의 여신 : 니케'나 '블루아카이브'와 같은 게임들이 비슷한 로직으로 성공사례를 만들었습니다. 강력하고 희귀한 아이템이 아닌 매력적인 캐릭터와 스토리를 중심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고, 그런 캐릭터들을 판매해 수입을 창출했죠. 이러한 게임들은 종종 '서브컬처'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이는데, 이는 현재 서브컬처 캐릭터들이 시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상업성도 가장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서브컬처의 성공인가? 캐릭터와 서사의 성공인가? 하면 둘 다 맞는 말이지만, 후자의 개념을 함께 갖고 있어야 현재의 트렌드를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셈입니다.
물론 누구나 원신, 니케, 블루아카이브와 같은 사례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스토리와 캐릭터를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컷씬과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데 들어가는 리소스가 게임 전체 제작과정에서 상당한 부담을 주게 된다는 점 또한 높은 진입장벽입니다. 게임 플레이 액션과 모션, 배경 등 다양한 에셋을 제작하고 개발하는 것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이런 높은 퀄리티의 애니메이션을 다량 제작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공수가 추가되는 셈이죠.
(블루아카이브의 애니메이션 예시) https://youtu.be/Q4sWF6z9TuE?si=G0z10ZrRTD89yFaL
여기에 제작사 입장에서는 어떤 캐릭터가 잘될지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그 말은 과거 몇몇 캐릭터에만 집중했던 과거와 달리,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에 서사, 그래픽, 액션 등에서 높은 공을 들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게임회사가 일하는 방식이나 요구하는 역량에도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달라진 소비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획과 개발이 수반되어야 하고, 전에 없던 스타일을 구현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죠. 결정적으로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적합한 인력과 팀'이 있어야 하는데 국내에 많은 게임회사들이 이런 방식의 게임 개발을 해오지 않았다 보니 핵심 리더의 역량에 많이 의존하게 됩니다. 미호요의 류웨이 대표, 시프트업의 김형태 대표, 블루아카이브의 김용하 PD 등은 업계에서 이런 프로젝트를 리드할 수 있는 손꼽히는 프로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화하는 트렌드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강자들은 게임업계 주류로 떠오르고,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회사들은 점차 동력을 잃어가는 상황입니다.
결국 이러한 격차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기술입니다. 마지막에 완벽한 100%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예술성과 창작성이 첨가되어야 하지만, 그 앞의 70% ~ 80%를 완성하는 데는 기술을 통한 해결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만큼 AI 및 관련 기술을 활용한 게임제작, 애니메이션 및 영상 제작에 대한 수요는 점차 커질 것으로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