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버섯의 생태가 소구하는 사고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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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부)
개괄
애나 칭(2023)이 송이버섯과 송이버섯 산업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한 마디로 요약해본다면, 단일한 힘으로 작동하지 않는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부와 하부가 뒤집혔을 뿐 헤겔의 변증법을 토대로 한 진보적 사관으로 자본주의를 익히 그려왔던 우리에게 송이버섯은 자본주의가 패치에 가까운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의도를 가지고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규모와 시간선을 바탕으로 각자의 리듬이 ‘번역’되는 과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은 프런티어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세계를 움직이지 않는다. 자본이 미처 계획하지 못한 것은 자본의 외부가 아니며, 오히려 자본주의의 통제 바깥에 있는 것은 자본의 축적을 위한 좋은 계기가 된다(120). 칭은 이를 자본주의 주변부(pericapitalist)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제축적(salvage accumulation)이라고 부른다(같은 쪽).
전통적인 맑스주의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생산수단과 봉건사회의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이중으로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를 규율하고 통제하는 임금 노동 체계에서 한참 떨어진 노동 조건과 함께 송이버섯을 채집하고, 경매하는 채집인과 구매인, 도매상의 삶은 자본주의 패치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 중 하나다. 이들이 모인 배경에는 또한 ‘자유’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것은 각각의 시기에 따라 상이한 정치적, 민족적, 역사적 배경이 혼종된 ‘코즈모폴리턴’적인 경계물이다. 송이버섯은 자유를 상징하는 트로피, 선물, 상품이라는 옷을 재빠르게 갈아입으며 자본주의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상기한 내용이 저자가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성을 해체했던 작업이라면 책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3, 4부에서는 우리가 익히 생각해왔던 과학, 생태, 보존과 보전을 중심으로 인습적으로 붙들어 왔던 진보와 근대를 내려놓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때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는 ‘교란’과 ‘상호 오염’이라고 할 수 있다.
2. 종별 구분과 오염하는 송이버섯
근대의 생명과학은 생물종 사이의 경계를 긋는 작업을 바탕으로 발전해왔다. 다윈의 획기적인 발견에서부터 ‘현대 종합설’에 이르기까지 이 생물과 저 생물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한 개체가 자신의 자손에게 자신의 유전적 형질을 종적 차원에서의 세대 재생산을 가능케하는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근대 생물학의 주된 관심이었던 것이다. “고전적으로 생물종의 경계를 긋는 기준은 쌍방의 개체들이 짝짓기 했을 때 생식력이 있는 후손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 여부로 결정(409)”되었는데, 이러한 설명 체계는 개체군 내의 세대적 재생산이 가능하냐의 여부를 가장 중심에 둔다는 차원에서 두가지 층위의 ‘확장성(scalability)’과 관련된다. 일차적으로 종을 구분하는 데에 있어 유성생식을 중심으로 자손을 남김으로써 ‘멸종’의 위험에서 피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이 이론을 생산한 과학적 시각이 ‘후손 생산’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분류틀을 만들고자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해당 기준이 유성생식을 하는 척추동물을 중심으로 하는 분류체계인지라 그 이외 종류의 동물과 식물로 시선을 돌린다면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재생산이 대부분이라는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잠시 미뤄두고서라도, 송이버섯 군락을 이루는 숲을 둘러본다면 이러한 전제가 생존을 유지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지 못하게 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버섯은 기본적으로 곰팡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곰팡이는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을 가리지 않고 둘 모두를 가로지르며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이종 교배, 다배체화, 염색체 복제를 비롯하여 박테리아의 전체나 일부를 자신의 게놈으로 흡수하여 복제하는 방식을 채택한다(413). 버섯이 퍼뜨리는 포자 조차도 염색체의 반쪽만 가지고 있는 반수체의 특징을 갖기 때문에 높은 유전적 개방성과 자유도를 가지고 자신의 모체와 결합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포자를 찾아 떠다니기도 한다.
이러한 송이버섯과 송이버섯 곰팡이의 재생산 방식은 종적 경계를 어디에서 그을 수 있는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다른 존재를 자신의 생명정보 일부로 흡수하고, 또 때로는 자기 자신과 짝짓기 하는 버섯 포자는 DNA 코드를 바탕으로 동종과 이종을 판단하는 현대 과학의 체계에조차도 혼돈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참나무를 사랑하는 중국 송이버섯(Tricholoma znagii)”과 “소나무와 관계를 맺는” 일본 송이 버섯 사이에 종을 구분할 만큼 유의미한 염기서열 상 차이가 없었다는 점(411)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같은 혼종성은 버섯과 곰팡이만의 ‘예외적인’ 현상은 아니다. “산도를 빠져나오면서 처음으로 얻는 이로운 박테리아 없이는 음식을 소화할 수 없[으며] 인간 신체의 세포를 이루는 90퍼센트는 박테리아(260)”라는 사실, “인간의 DNA도 부분적으로 바이러스(263)”라는 점에서 인간종 또한 진화발생학적으로 작은 생물들의 마주침과 함께살기, 함께되기를 통해 만들어진 생명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앞선 사례는 과학이 얼마나 역사 속에 있는지를 예시하기도 하는데, 이는 서구를 중심으로 재편된 생물종의 학명체계를 흡수할 수 없었던 중국의 정치적 배경 위에서 훗날 중국에서 발견된 모든 종들 앞에 ‘시노sino’라는 학명을 덧붙이는 것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사례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과학을 비롯한 이론이 역사를 인정하고 ‘알아차리기의 기술’을 발휘하는 대신 일반원칙에 세부 사례를 끼워넣으려고 할 때, 그 원칙은 얼마나 무색해지는가.
종간 구분은 개별 종이 자손번식을 통해 다른 종과 경쟁하여 유리한 삶의 방식을 획득하는 전형적인 약육강식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칭이 지적하듯, “이러한 세계관에서 생물종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 자체가 서로의 소멸을 의미하는 포식자-먹이 관계(255)”다. 그러나 송이버섯이 소나무(중국의 경우에는 종종 참나무)와 함께 삶을 이루며 살아가는 명민한 방식은 이러한 포식 관계와 개별 종 재생산으로는 담기지 못한다. 송이버섯은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균근균(菌根菌)이기 때문이다.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버섯을 나무 뿌리와 떼어놓고 상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곰팡이는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동물처럼 먹을 것을 찾아야만 한다(252).” 균근 곰팡이는 그 파트너로 나무의 뿌리를 찾는다. 곰팡이는 나무의 뿌리에 스스로를 접합하여 나무로부터 탄수화물을 얻는다.그런데 곰팡이는 세포 외 소화를 하기 때문에 소화한 물질을 다시 나무에게 공급하여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돕고, 나무에게 해로운 여타의 곰팡이로부터 자신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뿌리를 보호한다(299). 이러한 곰팡이의 기작은 소나무와 (송이)버섯이 각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이유다. 상대적으로 잎이 좁고 뾰족하여 활엽수에 비해 광합성에서 불리하고, 따라서 생장에 필요한 양분섭취가 늘 문제였던 소나무에게 버섯은 알맞은 공생 파트너였던 것이다. 특히 송이버섯은 강력한 산을 바탕으로 모래, 바위와 같은 무기질에서도 소나무에게 양분을 전해줄 수 있으므로 둘은 척박한 환경에서 더욱 더 두터운 관계를 맺는다(301).
3. 인간이 만든 폐허, 움트는 송이버섯
소나무와 버섯 사이의 종을 가로지르는 생존과 번영의 방식은 비단 그 둘의 관계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글로벌 자본주의 패치라는 훨씬 더 큰 배치 안에서 인간에 의해 형성되고 동시에 인간의 삶의 조건을 구성한다. 숲은 오랫동안 근대 관료주의 정부의 관리 대상으로 유지되어온 바, 인간의 개입 바깥에 있는 ‘순수한 자연’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더불어 숲에는 성층권에 셀 수 없이 떠다니는 포자를 포함하여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으므로 인간 바깥의 존재들과도 끊임없이 마주치고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숲에 있는 나무는 오랫동안 건축자재, 군수 물품 등과 같이 인간의 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여겨졌고, (비록 많은 나라의 정부가 금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화전 등과 같이 산 속에 불을 질러 숲 속 나무의 개체수를 관리하는 일 또한 유구하게 이어진 관행이다. 현재 녹색운동의 일환으로 행해지는 일본식 ‘숲 재생 사업’이나 미국식 ‘숲 방치’ 모두 인간이 숲에 불러오는 유의미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애나 칭은 여기에 더해 홍수, 산불과 같은 ‘자연재해’도 통틀어 ‘교란’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교란은 손상과는 구분되는 것으로(285), 교란 이전의 조화로웠던 상태를 상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교란이 일어나지 않은 ‘순수한 숲’은 없다. “교란은 새로운 풍경의 배치를 가능케 하면서 변형을 가능케 하는 마주침이 발생하도록 그 풍경을 개방(284)”하는 과정으로, 늘 앞선 교란에 따라 일어나는 과정이자 다른 교란이 뒤따라오는 과정이다.
벌목 등으로 대표되는 ‘폐허 만들기’ 또한 인간이 숲에 불러 일으키는 대표적 교란 중 하나인데, 산에 있는 나무를 모두 베어버린 후에 가장 먼저 자라기 시작하는 것은 소나무다. 혹은 사람들이 목재생산에 목적을 둔 플랜테이션으로 소나무를 단일 수종으로 심은 산업비림을 기르기도 한다. 특히 20세기 초반 일본에서는 일종의 노스탤지어 관광 상품으로 소농민 숲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이는 19세기 후반 무분별한 벌채 이후 송이버섯의 도움을 받아 ‘부활한’ 적송덕에 가능한 일이었다(328-329). 미국의 경우에 송이버섯이 갖는 위치는 더욱 흥미롭다. 그것은 2008년 딱 한번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산림관리의 목표물로 자리매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360). 이는 송이버섯이 자본의 의도 바깥에서 움텄지만, 이제는 관료주의와 자본주의의 눈에 든 ‘구제’ 대상임을 시사한다.
4. 나가며
칭의 발견은 세상이 얼마나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마주침 속에서 태어났으며, 그렇기에 불안정하고 취약한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의 무한한 확장성에 물음표를 띄울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송이버섯은 근대적 관료주의, 거대한 자본의 흐름과 나름의 삶을 유지해보고자 하는 (미등록) 이주민, 난민, 그리고 과거의 풍류를 그리워하는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다운율의 음악 속에서 굴러다니고 있다. 실로 칭의 말대로 자본주의가 거대하고 일관된 흐름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힘이 아니라, 이런 저런 배치들과 결합으로 덜컹거리고 삐걱거리면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같은 것이라면 배치의 구성을 이리저리 바꿔보는 창의성을 발휘해보는 것도 타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칭이 언제나 우리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을, 그러나 잠재적인 공유지를 발견해보라고 제안한 것은 바로 그 창의성을 발휘해보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옆을 보면서 내가 사는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존재들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며 또 어떤 효과를 불러올까?
진보와 앞서나감, 종적 차원의 생존을 생각하는 대신에 협력과 공생으로 지금 여기에 주어진 삶을 잘 살겠다는 다짐이 인식론적으로 전통적이고 고루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유성생식과 재생산에는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도 매우 궁금하다. 조소와 니힐리즘으로 가득찬 채 재생산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겠다는 선언은 무엇을 다르게 만들까?
더불어 애나 칭이 한국에 관해 서술했던 몇 대목들이 굉장히 흥미롭다. 기실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 뿐 아니라 아시아적 네트워크 위에서 훨씬 더 복잡한 식민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가. 반도체나 섬유산업 등 인간의 몸에 치명적이라고 알려진 산업과 설비들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와 그대로 동남아시아에 수출해버린 한국은 이 패치 위에서는 어떻게 연루되어 있고 어떤 책임성을 발휘해야 할까?
참고문헌
애나 로웬하웁트 칭(2023), 세계 끝의 버섯: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노고운 역), 현실문화: 서울.
두산백과(날짜미상), “신종합설”(검색어: 현대종합설), 2023.12.05 최종 접속, URL: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07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