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차크라바르티(2014).유럽을 지방화하기. 그린비 1부 요약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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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페시 차크라바르티(2014). 유럽을 지방화하기(김택현& 안준범 역). 그린비 1부 요약 발제 @젠더와문화연구입문 2022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인도는 명시적인 식민국가의 역사를 끝낸 바 있다. 그러나 유럽이 이식한 ‘정치적 근대성’은 인도의 현재적 조건으로 작동하며 유럽이 자신에 비해 여전히 ‘준비가 덜 된’ 존재로서 인도를 상상하게 만든다. 제국주의적 모순의 세례와 저주를 동시에 받으며 서구의 언어와 인식론을 습득한 인도의 지식인들은 이에 따라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질문으로 지속적으로 회귀하는데 그들이 생산해내는 지식은 주로 탈식민(decolonization) 계보에 위치한다.
서발턴 연구 모임의 회원이기도 한 차크라 바르티 또한 탈식민주의에 입각한 인도 출신 연구자로, 인도의 벵골 노동계급을 재사유해내는 맑시스트 역사학자(501)로 알려진 바 있다. 이 책에서 특히 자본주의와 맑시즘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은 이러한 맥락 위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아우르는 가장 주된 목적은 탈식민 시대에 여전히 유럽의 근대적 정치기획이 보편적 이상으로 설정되어 그 기획의 전제들에 어긋나는 존재 양태와 실천들은 ‘아직’ ‘결여된 것’으로 위치가 떨어지는 현상에 학문적인 개입의 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때 중요하게 제시되는 개념은 역사주의, 동시성coevalness의 거부, 전정치성, 이행 등이 있다. 시간을 선형적인 것으로 구획하는 동시에 유럽의 근대 자유주의를 가장 발달된 것이자 이상향인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인도인들을 유럽의 ‘과거’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통해 인도로 하여금 유럽에 더욱 가깝게 나아갈 것(이행)을 강요하는 것이 유럽의 가장 대표적인 기획이었다. 이 이행의 정치 안에서 유럽에 비견되어 등장하는 인도의 개별성과 복잡성을 결여, 미달 등으로 구성되고 유럽의 역사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줄 척도로 자리매김한다(역사주의, 역사화). 서발터니스트 연구는 이렇게 구성된 ‘실패’에 달라붙어 유럽을 해체하고, 그럼으로써 인도 또한 질문의 대상으로 올려놓는 연구 조류라고 할 수 있다(86). 식민역사에 의해 이식된 자유주의적 헌법이 브루주아에 의한 운영이라는 유럽적 기획에 꼭 들어맞지는 않더라도 농민 정치 주체에 의해 어떻게든 작동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왜 각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다른 형태의 정치가 아니라, 더 배워서 탈피해야하는 역량 부족의 상태로 이해(동시성의 거부)하는가? 저자에 따르면,
‘인도인민’은 항상 둘로-근대화 엘리트와 아직 근대화되지 못한 농민으로-분열된다. 그렇지만 분열적 주체로서 그것은 민족국가를 찬양하는 메타서사 안에서 말한다. 그리고 이 메타 서사의 이론적 주체는 오직 가상 현실적인 ‘유럽’, 즉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피식민자에게 들려줬던 이야기들로 구성된 유럽뿐이다. 여기서 인도인이 채택할 수 있는 자기 재현 양식은 호미 K. 바바가 정확하게 ‘모방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럽의 규범과 권력이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과 억압 외에도 추종해야하는 상징으로 작동하고 그것에 대한 추종이 하나의 대항으로 작동한 바 있을 때, 유럽의 근대성을 탈구축하는 작업은 단순히 유럽의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그것을 버리겠다는 선언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기만적이면서도 역사적 토대들에 의해 너무나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보편, 추상으로서의 유럽으로부터 권력을 탈각시키는 것은 그렇게 손쉽지 않다. 오히려 그 보편 언어의 장 안으로 진입해 그 안에서 경합해야 한다는 것이 많은 탈식민주의 연구자들이 공유하는 난점이자 자의식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역사를 다시 붙잡음으로써 책을 연다. 이것은 다름아닌 “역사의 서사 형식들을 바로 그 구조 안에서, 역사 자체의 억압적인 전략들과 실천들을 가시화하는 것이며, 역사가 인간 연대의 모든 다른 가능성을 근대 국가 프로젝트들에 동화시키는 가운데 시민권의 서사들과 공모할 때의 그 역할을 가시화”(119)하기 위함이다.
앞서 설명한 문제의식과 접근론을 바탕으로 차크라바르티는 제국식민주의와 유리될 수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으로 곧장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전의 사례에는 모두 나름의 독자적인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자본주의는 어떤 공통의 특성들을 드러낸다.”(122) 글로벌 자본주의의 패턴을 차이의 억압과 지양으로 보든 차이의 증식으로 보든 “이것들은 모두 자본을 특수한 어느 시기에 세계의 어느 곳에서 발흥하여 역사적 시간을 거치면서 글로벌하게 발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역사적인 차이들과 조우하고 협상하는 하나의 통일체라는 이미지에 따라 사유하려는 경향을 공유”(122)한다는 점에서 모두 역사주의적이다. 맑스주의 또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차크라바르티의 주장이지만, 동시에 저자는 맑시즘은 “‘자본’에 대한 여전히 가장 유효한 세속적 비판[이자], […]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사회 정의의 문제를 풀어갈 때 우리에게 필요 불가결(194)”하다고 인정한다. 그는 이에 따라 맑시즘을 손쉽게 버리는 대신 맑시즘과 역사와의 관계를 ‘추상노동’이라는 매개 (혹은 관념)을 중심으로 집요하게 살피고 추상노동을 초과하는 ‘현실노동’을 이른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탄생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지로 채택한다.
자본주의적 거래 양식에 있어서 맑스가 주되게 초점을 맞춘 것은 ‘상품 거래의 성립’이다. 즉, “역사와 물질적 속성과 사용가치가 다른”(128), 그래서 전혀 통약 불가능해 보이는 사물들을 사람들은 어떻게 교환하는가? 맑스는 공통적 속성이 부재한다고 믿어지는 사물들 사이에는 사실 아주 공통적인 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사물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투여된 인간의 노동이다. 이렇게 각각의 사물들이 교환가치를 갖는 상품이 될 수 있도록 차이를 매개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 인간 노동이라고 할 때, 이 인간 노동은 차이를 비교할 수 있는 척도로 기능해야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균질적인 것으로 깎일 필요가 있다. 즉, 여기에서 언급되는 ‘노동’은 인간이 일상에서 실행하는 구체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라 일종의 단위로 기능하는 추상적인 것이다.
상품거래의 성립이라는 귀납적인 사례로부터 (차크라바르티 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회고적으로 도출된 이 추상노동은, 한편으로 그 노동을 투여하는 인간 또한 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평등주의가 전제되었을 때만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노예제 사회에서의 ‘노동’은 그 자체로 신분과 결부되어 차등적이기 때문에 상품 사이를 매개하는 교환의 척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추상노동의 기획 안에서 노동자로서의 개개인은 서로가 서로에게 평등하지만 동시에 아무런 개별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그 “구성상 추상적이고 집단적인 주체”(139)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 차크라바르티의 설명이다. 이러한 노동자의 추상화는 곧, 사람들의 질적 차이와 개별성을 생략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균등한 원자로 그려냈던 근대적 민주주의의 정치 기획 아래에서 가능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역사주의와 근대는 맑스의 자본주의 해석과 비판의 중요한 인식론적 근간이 된다.
실제 실천과 일상에서 각각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노동 양태는 당연히 (미세하더라도)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차이는 어떻게 삭제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기계를 활용한 생산양식이 중요하게 자리매김한다. 노동자의 몸이 공장식 기계와 기계식 공장의 생산방식에 맞추어 움직이도록 조정될 때, “생산의 추동력[은] 인간이나 동물에게서 기계로, 산 노동에서 죽은 노동(140)”, 즉 추상화된 노동으로 옮겨간다. 노동자의 동선, 출퇴근 시간, 노동방식, 복장을 규율하는 공장의 규칙과 자신의 반복적인 움직임에 맞출 것을 노동자에게 요구하는 기계와 조우하며 노동자가 독창성originality를 발휘할 틈은 점차 좁아지고 만다.
기계화를 넘어 전산화, 디지털화가 점차 고도화되어가고 있는 저간의 상황에서 이러한 맑스의 진단은 암울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노동이 앞서 언급한 각고의 노력 끝에서야 비로소 추상화될 수 있다면, 이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노동이 너무나도 ‘삶’과 밀착되어 있고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닌 산 노동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생명력은 “자본의 모순적인 출발점”이 되어 저항의 단초를 마련한다(146).
차크라바르티는 이를 역사와 결부시켜 매우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관점으로 정리한다. 그는 자본주의적 재생산에 기여하기 위해 정립되고 추상화된 과거들 (가령 추상노동과 같은 구성적 과거)을 역사 1로 명명하는 한편,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 선행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간적 흐름에서의 ‘선후’관계이지 그 자체로는 자본주의를 위한 전제가 아닌 것들을* 역사 2로 구별해낸다. 그리고 이 역사 2는 역사 1과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밀하게 접속해 “자본 안에 내재하면서 자본 자체의 논리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이 진행에 구두점을 찍는다.”(153) 자본주의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정복해야하지만 ‘아직’ 정복되지 않은 형태로 남은 역사 2의 ‘불확정성’은 역사 1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자본 형태는 어떤 것이든 누군가의 역사 2들에 의해 변경된 역사 1로 이루어진 일시적 타협이기 때문”(163)에 자본주의는 글로벌할지언정 보편적이지는 못하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재생산에 핵심 중추가 되는 ‘노동’을 역사 2의 관념에서 재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번역을 위한 매개로서 ‘추상노동’이 갖는 부적합성을 폐기하고 차라리 물물교환의 형태에 가까운 번역을 시도하는 것, 혹은 그 물물교환에 가까운 번역이 불가능하고 ‘추상노동’으로의 번역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경로를 밝히는 일이다(165). 다음 절에서는 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핀다.
차크라바르티는 엄밀히 말해 맑시즘에서 전제하는 노동은 인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완전히 세속적인 상품으로서 존재하는 차원 이상으로 인도인들에게 노동은 신성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도의 노동과 경제를 유럽식의 인식론적 토대를 기반으로 ‘역사화’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불가능한 것이 될 터다. 그러므로 제도가 승인하는 역사적 서술을 위해서는 세속적인 체계가 인도의 신성-노동을 자신이 이해 가능한 범주로 번역하고 흡수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번역 작업은 사실 타협하기 어려운 차이와 마찰지점들을 상당히 손쉽게 삭제하며 그 삭제 작업은 주로 ‘유럽적’ 역사의 관점에 거슬리지 않도록 이루어진다. 저자는 이렇듯 무엇이든 자신의 체계 안으로 집어넣을 수 있다고 믿는 역사학계/학자들의 시간성을 발터벤야민의 시간개념을 빌려와 ‘텅빈 동질적 시간’이라고 비판한다. 이 역사적 시간은 “어느 만큼의 사건이든 다 넣을 수 있으며”, “그 어떤 특수한 사건들에도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167)
이른바 역사학자들이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노동’이라고 번역하고 싶어하는 열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도의 농민 및 노동자들의 노동과 저항에서 종교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역사학자들은 이 종교의 개입을 기존의 노동관념에 대해 질문하는 중대한 문제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지역적이고 협소한 문제, 혹은 부가적인 해석이 필요한 문제로 넘겨 짚음으로써 서구적 ‘노동기획’에 들어맞는 인도의 노동경험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관심을 두는 것은 개별 사건”이지만, 역사의 관심사는 그 사건들의 개별성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 사건을 이해함으로써 도출할 수 있는 추상성과 제한적 일반성, 즉 종별성을 좇는다는 폴 벤느의 설명을 인용하는 저자의 선택(183)이 가장 적절해지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층 더 ‘고등언어’라고 불리고 실제로는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것의 매개 없이 두 세계를 마주치게 하는 ‘번역’을 성취할 수 있을까? 차크라바르티는 인도의 다종교, 다신적 맥락에서 아랍어와 산스크리트어의 상호번역에서 힌트를 얻는다. 이들은 서로의 신을 번역하는 데 있어 중간항으로서의 신God을 거치지 않고 곧장 양자간의 유비로 나아간다. 즉 서로가 완전히 합일 되는 것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적당히 소통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오묘한 긴장을 숨기지 않는 것이 저자가 요청하는 번역이다. 이러한 관점의 번역을 ‘전자본주의’에 적용한다면, ‘전자본주의’와 전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채택하는 이들의 삶은 발전단계에서 자본주의에 선행하는 것이자 미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다른 논리로 자본주의에 경합하는 것으로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차크라바르티의 논의가 두각을 드러내는 지점은 이와 같은 전개로 상대주의 쉽게 거머쥘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주인의 코드가 유용하고 또 강력함을 인정한다는 데서 온다. 식민주의가 주조해낸 시간적 환상과 왜곡을 지적하기 위해서는“번역되는 존재의 지위와 의미작용이 결과적으로 상실되는 번역 과정을 통과”(206)할 필요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때 그가 요구하는 태도는 그 좌절을 다시 생성의 장으로 만들어내는 꿋꿋함 내지는 치열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한쪽의 언어가 아니라 양쪽의 언어를 모두 ‘나의 것’으로 만들어 문화적 복수성을 경합할 수 있는 장으로 꾸려내는 것, 그럼으로써 “모두에게 항상 자명한 것은 아니었던 저 합리주의의 ‘이성’이 어떻게-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애초에 출현했던 지반을 훨씬 넘어선 곳에서 자명해 보이게 되었는지 검토”(115)해냄으로써 그 자명함self-evidence에 다른 증거들을 덧붙여서 더 이상 유럽이 그 존재만으로도 스스로를 설명해낼 수 있는 증거로 작동하지 못하게 시도하는 것이 ‘유럽을 지방화’하는 기획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탈식민적 기획에서 ‘번역되지 못하는 것’들을 ‘보편’과 경합시킬 필요성을 주장할 때 이와 같은 접근을 인류학적인 것과 거리두기 하는 저자의 서술은 ‘인류학적 쓰기’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남긴다. 신이 자신들의 반란을 선동했다는 산탈의 설명이 그럴듯한 ‘내적 체계’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으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을 바꾸지 않는 연구자 구하의 모습을 ‘인류학적 태도’라고 말하는 차크라바르티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인류학은 수많은 지역성과 개별성들에 말하면서도 그것을 ‘강단’인류학이 승인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해낸다. 또한 이 개별성들을 서구(차크라바르티에 의하면 유럽)와 경합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가치의 급진적 평등성을 실천함으로써 오히려 유럽의 위상, 사유를 뒤바꾸는 작업에는 소극적이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때 떠오르는 인류학(자)의 해석적, 재현적, 혹은 마주침의 윤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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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그 예로 상품이나 화폐를 들고 있으나, 차크라바르티는 여기에서 개별 노동자 내지는 인간의 행위자성을 복원시키고 싶어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