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디 Mar 21. 2023

신자유주의의 계보와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2022). 새로운 세계 합리성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7154521


서문, 1장, 5장, 8장 in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2022). 새로운 세계 합리성(오트르망, 심세광, 전혜리 역). 그린비 요약 발제 @2023 봄학기 자본주의 인류학




신자유주의의 계보와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



1.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질문하고 규정할 것인가

        
피억압자의 조건이나 정치경제학을 직간접적으로 다루는 학문을 공부한다면 구태여 애를 쓰지 않아도 익숙해지는 개념들이 있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면에서 그 어떤 것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대처리즘, 레이거노믹스, IMF 외환위기 이후의 노동시장 유연화 내지는 ‘합리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의 금융침체, 불안정성 등으로 다양한 사례와 하위 개념을 포섭하는 거의 유일한 체계로서의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분석대상이 된지도 수 십년이 지났다. 그러나 이처럼 산재한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 모순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앞세운지 오랜시간이 지났음에도 구체적인 파훼책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피에르 다르도와 크리스티앙 라발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질문이나 전제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전제에 따라 신자유주의에 대한 통념적 이해를 다시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좌파 진영에서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경제정책이자 특정 집단의 견해를 반영한 이념적 형식이자 현실의 왜곡, 즉 이데올로기로 그려진다. 그러나 두 저자는 신자유주의는 독립적인 경제체제나 허위의식 등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강조하며,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합리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신자유주의는 세계를 관장하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합리성’이라는 것이다. 신-(neo-)와 자유(liberal)이라는 비교적 자명해 보이는 두 사이의 결합은 자유주의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문법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책에서는 이 두 사이의 결합을 엄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전까지 신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가해지던 ‘상식적 전제’들을 되물을 필요를 대두시킨다. 그 전제들은 아래와 같이 대별해볼 수 있다.



          1)  시장은 역사적 발전(evolution)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2)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와 다르지 않다.        


          3)  자유주의는 하나의 통일성을 가진 경제모델이다. 


        4)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가 심화된 것으로, 자유주의와의 연속선에서 자유주의적 전제와 이론을 계승하고 있다.


요컨대 하나의 경제체계를 가리키는 시장은 자연적/물리적 실재로서의 시장이 확장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산물이며, 신/자유주의는 이 시장이 역사적 우연성을 딛고 구성되는 과정에 대한 대응으로 인간이 발휘한 특정한 정치적 기획과 정치적 기획과 통치성(gouvernementalité)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안은 국가의 크기, 더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폐를 두고 경합하는 좌파와 우파가 사실은 자유시장에 대한 전제를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것을 디스토피아로 바라보든 유토피아로 그리든 상관 없이 “시장이 정부의 간섭 없이도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실재로 간주되고, 따라서 시장체계와 공적 개입이 상호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39)고 생각하는 것은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두 저자는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 아래에서 국가가 사라진 적이 있는지 되묻는다. 지금과 같은 자본의 흐름과 축적은 오히려 국가의 긴밀한 협조와 조정 없이는 불가능한 현상이며, “무대에서 ‘국가를 사라지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마술”(30)이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작동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책의 주된 요지다. 고전주의-신고전주의(수정자본주의)-신자유주의 등으로 이어지는 경제체계는 국가의 크기나 존폐에 따른 역사적 흐름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추동 시키기 위해 국가 권력이 끊임없이 재배치되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는 것이다.


책의 문제제기에서 이미 예상할 수 있듯이 두 저자는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푸코의 통치성 개념과 계보학적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여기에서 푸코의 통치는 헐겁고 높은 차원의 권력, 즉 지배권력을 초월하는 효과를 갖는다는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통치성은] 어떤 정부에 속할 수도 있고 속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인간들이 사람들의 품행을 인도하고자 하는, 즉 그들을 통치하고자 하는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지시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 통치가 개인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도달하기 위해규율에만의존하지않고최종적으로개인스스로의자기통치를얻어내려한다는것,즉일정유형의자기와의관계를 생산해내려 한다는 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34-35)


‘통치성’은 타자의 행위를 완전히 예속하는 지배권력보다는 훨씬 유연하지만 동시에 주체성 그 자체에 기입되어 주체가 타자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규율하게 만드는 촘촘한 힘이며 따라서 “자유 아니면 지배”, “동의 아니면 강제”(35)라는 흑백의 논리를 벗어나서 작동한다*. 이러한 접근에 의거하였을 때,


통치는 그 가능 조건으로서 자유를 필요로 한다. 요컨대 통치한다는 것은 자유에 대항해 통치하거나 자유를 무릅쓰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통해 통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공간 위에서 능동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개인들 스스로가 특정 규범들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35)


신/자유주의 체제를 ‘신/자유주의 통치 합리성’으로 규정하고 이것의 계보를 추적하는 것은 따라서 특정한 경제정책이나 조세정책만을 뜯어본다고 성취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 및 시장형태의 변화와 더불어 당대의 도덕과 상식, 자아(self)/주체(subject)의 형성과 변모 등과 경제가 상호간에 맺는 착종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뜯어보는 복잡한 작업이 된다. 이 책이 1장, 5장, 8장에 걸쳐 하는 작업이 광범하고 철학적인 담론분석에 가깝게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을 틀짓는 방식이 어떤 형태의 시장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때 상상되었던 바람직한 국가권력은 무엇이었는지, 또 이 세 요소가 어떻게 서로를 되먹이는지를 규명한다는 점에서 1장, 5장, 8장의 중추적 구조는 대동소이하다. 먼저 1장은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가 성립하는 토대를 만들었던 인간관의 연원을 계몽주의에서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뒤따르는 작업으로 두 저자는 이것이 어떻게 비교우위와 상호유용성을 기반으로 한 교환경제와 경쟁체제라는 것을 성립 가능하게 했는지 살핀다. 5장에서는 ‘자유’에 기입된 상상들이 배태하는 충돌과 긴장이 자유주의적 통치성에 위기를 불러온 과정을 짚으며, 이 위기에 대응하였던 자유주의자들의 상이한 이론을 소개한다. 마지막 8장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의 일부를 이어 받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시장형태와 인간상을 그려내고 있음을 밝히며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일견 단절적인 사건으로 구성해낸다.



2. 자유주의와 이기적 개인


서유럽(특히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를 기반으로 하여 저술된 이 책은, 자유시장을 논하기 위해 18세기 이전과 이후를 하나의 단절점으로 삼는다. 유럽에서 18세기는 계몽주의 사상이 만연해지던 때로,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해 나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인간 누구나 ‘깨우칠’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자연상태의 만민은 모두가 질적인 측면에서 평등하다는 것이 계몽주의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균질한 인간들 사이에서 누구나 부여 받는 것으로서의 ‘자연권’ 또한 당대에 탄생한 기획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상기한 바와 같은 계몽주의적 인간관은 무엇을 개인을 정의하는 중심에 둘 것이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자유를 규정하는 효과를 낳는다. 자연권을 가진 주체로 개인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자유는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침범되거나 양도될 수 없는 권리의 경계를 가리키며 이때 법적 규제, 즉 국가적 개입은 각 권리주체들의 공동의지나 공동선의 표현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개인을 이기심(intérêt)에 따라 움직이는 합리적 주체로 보는 -푸코식 정의에 따르면- ‘영국식 공리주의자들’에게 있어 자유란 통치자의 예속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에게 있어 법은 공권력과 개인의 자유 사이의 타협점을 찾은 결과로 이해된다. 『새로운 세계합리성』에서는 두 갈래의 사상 중 영국식 급진주의가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확립하는 데에 있어 주효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본다. 토마스 홉스와 애덤 스미스, 애덤 퍼거슨 등이 고전적 자유주의를 가능케했던 인식론을 설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인용된다.


세 학자는 인간의 도덕감정을 얼마나 심도 있게 이해하고 인정하고자 했느냐를 두고 보았을 때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핵심적인 동인을 ‘욕망’ 내지는 ‘결여’로 포착해내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한다. 그 욕망이나 궁극적인 결여가 무엇이 될지는 합의되지 않을지라도, 인간에게는 욕망과 결여가 있다는 것이 이 셋이 모이는 지점이다. 이는 매우 큰 전환이라고 볼 수 있는데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 통제대상이었던 ‘정념’이 마땅히 충족되고 해소되어야 할 인간의 자연스러운 조건으로 변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해 평등하면서도 (일부 제약을 제외한다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시에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의 탄생은, 가격을 매개로 하여 각자가 가장 만족할만한 방식으로 서로의 잉여를 교환하는 시장을 가능케 한다. 이것이 바로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부른 것으로 거래의 성립은 상호유용성의 충족이라는 원리가 낳은 결과로 해석된다. 이러한 상상은 개인간의 미시적 거래 차원을 넘어서서 비교우위에 기반한 분업체계와 무역체계를 정당화하는 논리(대표적으로 리카도)로도 확장성을 획득하며 당대의 세계를 설명하는 체계가 된다.


이는 일견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자유주의적 세계 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기통치는 행위의 결과들을 정확히 계산함으로써 고통을 감소시키고 쾌락을 증진시키는 데”(64) 있으며, 인간이 각자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모두가 만족할 만한 교환게임을 중개해주는 장이 바로 시장이기 때문이다. 즉 자유주의적 모델에서 거래는 계산의 영역이 되며, 셈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모두가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유주의가 그리는 시장경제는 일차함수와 다름 아니다. 건전한 결과가 늘 예측 가능하게 도출된다면, 국가는 그 결과를 도출하는 시장이 튼튼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관리만 도맡으면 된다. 국가는 “이를테면 개인과 재산의 보호, 노골적인 폭력의 금지”(69)등에 자신의 권력을 한정하는 것이다.


3. 자유주의 통치성의 위기와 대응들


2에서 살폈듯이 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공리주의적 급진주의는 혁명의 공리(axiome, 자연권에 
기반한 사법적 자유)에 대하여 승기를 잡고 지배담론으로 자리매김한 바 있다. 그러나 공권력 행사에 제한을 가하고자 한다는 공통분모로 봉합되어 있던 ‘자유’에 대한 두 가지 관념은 19세기를 맞이하며 분열을 겪기 시작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주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사건들이 자리한다.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자원을 가진 상대방을 찾아 거래하고, 상호 유용성의 원리에 따라 모두가 만족할 것이라는 아름다운 가정은 이미 산업자본주의조차도 배반했다. 일례로, “철도, 석유, 은행, 철강, 화학 등의 분야를 장악한 대기업의 수뇌”(198)와 그들에게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의 열악한 생활환경 사이의 격차는 이미 ‘정당한 거래’가 실천적 차원에서 전혀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앞과 같은 현실 인식 위에서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데, 이는 단순히 사회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공정하고 건전한 거래의 장이 존속시키기 위하여 국가의 개입을 불러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공감과 연대의 본능을 고도화된 문명의 표현으로 여기는”(223) 몇 학자들의 움직임은 영국식 공리주의보다는 양도 불가능한 개인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태도에 더욱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는 자유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 자유주의를 유지시키기 위한 보정작업에 가깝다. 요컨대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최강자에 대항하여 최약자의 ‘사회적 자유’(229)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자유주의’ 진영의 논리다.


케인스를 필두로 한 ‘새로운 자유주의자’들의 접근은 교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이득을 볼 수 있다는 win-win 구조의 전통적인 시장 모델을 뒤집지 않고, 오히려 시장이 그러한 존재론에 부합하여 작동할 수 있도록 개개인의 조건을 조정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스펜서는 오히려 자유경제의 기틀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자유시장의 모순으로 지적된 것들을 시장의 내적인 원리로 흡수시켜버린다. 그는 자연과학적 진화의 ‘법칙’을 그대로 사회에도 유비시키며 진화론과 생물학에 입각한 공리주의자로 스스로를 명명한다. 스펜서는 스스로가 다윈주의와 완전히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적자생존’의 원리를 창안한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가장 알맞게 적응한 존재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뜻하는 이 말은 사회, 경제적 관계의 원리를 상호유용성 내지는 호혜성에서 생존투쟁으로 이동시킨다. 스펜서 식의 기획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다른 이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협력적이고 호혜적인 경쟁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델은 이제 더 이상 교역을 상호강화와 상호향상의 수단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결과 생존의 항구적 시험으로 만든다.”(218) 이러한 조건 위에서 패배하거나 몰락한 개인은 구제하거나 동정할 대상이 아니다. 그의 패배는 처절한 생존투쟁의 결과이며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 더욱 적합하고 우월한 누군가가 더 잘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자체로 아주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4. 신자유주의: 학습하는 개인과 역동하는 시장


사후적으로 자유주의적 사상들을 비교해보았을 때, 자유주의는 단일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인지하고 인정하였을 때,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의 심화반복이라는 분석은 공허하다. 자유주의가 하나가 아니라면, 신자유주의는 어떤 자유주의에 대응하여 새로운 것이며 또 어떤 자유주의를 계승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다르도와 라발은 8장에서 기업가적 개인주체와 경쟁적 시장체계를 이전의 사조와 구분되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으로 삼는다. 이 설명을 따른다면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많은 조류 중에서도 스펜서 식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받아 생겨난 통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두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시장에 대한 새로운 틀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전의 자유주의와 역사적 단절성을 갖는다고 여기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적 시장은 더 이상 고정된 채 개개인을 매개해주는 ‘자연적 환경’(343)이 아니다. 완벽한 균형 상태는 이제 더 이상 시장의 (자동적인) 지향도, 시장의 건전성을 규정하는 척도도 되지 못한다. 그보다 시장은 하나의 절차로서 늘 변화무쌍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운동성을 지닌다. 이러한 시장 구조에서 개인의 주체성은 기업가의 그것으로 거듭난다. 모든 것이 시시각각 바뀌는 임시변통의 세상 속에서 어떤 것이 자신에게 이익일지 ‘계산’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되지 못한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자 중 하나인 폰 미제스는 인간을 ‘호모 아겐스’로 재정의한다. 미제스의 호모 아겐스는 애덤스미스가 보여주었던 보이지 않는 손 아래 있는 개인과 달리 자신의 삶의 처지를 개선하겠다는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주체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잉여를 팔고 교환하는 것을 넘어서서 변화무쌍한 시장을 기획하고 끊임없이 시장의 룰과 룰을 변형시키는 법 등을 학습하는 자다. 신자유주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가적 개인이 습득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처세술은 위기와 기회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이해를 명확하게 계산할 수 있었던 과거와의 분명한 결별이며, 이제는 합리적인 추론에 기반한 계산 대신 (근)미래에 운명을 거는 투기적 선택이 시장을 작동시키게 된 것이다.






*주체라고 번역되는 sujet은 ‘신민’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는 더욱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다윈의『종의기원』과 더불어 생물학적 진화론에서 드러나는 진화는 각 생명체가 합목적성에 의해 ‘발전’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화의 과정은 선형적이지 않으며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이 다윈의 발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스펜서가 말하는 ‘다윈주의’는 저자들도 지적하듯 다윈에 대한 오독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