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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Jun 06. 2022

너를 만났다

엄마를 다시 만난다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의 딸아이를 하늘나라로 보낸 어머니가,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미처 하지 못한 작별인사를 했던 첫 에피소드를 이전에 봤었다. 가상현실 속에서 만난 이가 예상대로 진짜 자신의 아이처럼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을 정리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를 덤덤하게 전하는 어머니에게는 죽은 아이 말고도 세명의 아이가 더 있었다. 둘러 쌓인 아이들로 빈자리를 그래도 조금은 덜 느끼시지 않을까. 꽉 찬 옆자리를 보며 내가 다 안심이 돼버렸다.


두 번째 이뤄진 이야기에서는 어찌 보면 상황이 역전됐다. 다섯 명의 채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을 두고 떠난 엄마는 몇 년에 걸쳐 생명이 소실되고 또 소실되다 천천히 떠났다. 죽음을 다 이해하기에는 생력의 기운이 강한 아이들이라, 아직도 지독한 농담을 멈추고 나타날 엄마를 기다리는 기분이라고 했다. 아이들의 아빠에게는 아이들을 길러내야 하는 피로와 금실이 유난히 좋았던 아내에 대한 고통스러운 그리움이 남았다.


둘러싸인 아이들 가운데 빈자리를 보는 일과 둘러싸인 아이들을 같이 봐주고 매일을 꼭 안고 잘 정도로 다정했던 사람의 빈 공간을 느끼는 일의 경중을 따질 필요는 없지만, 이번 이야기에서 어쩐지 내가 가진 상실을 더 진하게 느꼈다. 아마도 아직은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의 입장이 아직은 나와 더 가까워서인가보다. 남은 내 인생에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며 어느 정도의 빈틈을 메워주겠지만 유일무이한 존재가 내게 줬던 그 따뜻한 사랑을 아마 나는 다시 갖지 못할 것이다. 그 같은 사랑을 체험하려면 이번에는 나는, 이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돼야 한다. 내게 그 사랑을 줄 이는 더 이상 세상에 없다. 기일이 한 달 정도 남은 요즘, 절절히 그 사실을 깨달아 간다.


엄마에 대해, 그녀의 빈자리에 대해 떠올리는 일은 어떤 따스한 감정보다는 이제 물성으로 남았다. 아직도 다 먹지 못한 엄마가 보낸 미역줄기들을 일부 떼어낼 때, 일일이 손으로 깐 밤을 설탕에 담근 작은 병을 냉장고 구석에서 확인할 때 엄마를 떠올린다. 집에서 챙겨 와 입지 않고 매지 않은 옷과 가방을 들춰 코를 묻으면 희미한 엄마 냄새가 난다. 엄마가 더 이상 13시간 떨어진 한국에도 없고 이 세상에 아예 없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뜨겁게 달아오른 욕실에서 큰 수건을 몸에 감고 물을 털며 나오던 엄마의 맨살을 떠올린다. 빨갛게 달아오른 섬세한 흰 살갗에서 항상 맡았던 달콤한 꽃내음을 떠올린다.  불안한 나를 안심시키고 열렬히 응원했던 사람. 이제 그 한 사람이 차지했던 세상의 공간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린다. 상실을 되새김질하지 않으면 나는 어느새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엄마를 생각할 때, 그 과정을 어김없이 밟는다. 아. 엄마의 몸은, 엄마의 향기는 이제 세상에 없구나.라고 떠올린다. 사람들이 말하던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슬픔은 이런 것이구나 생각한다. 작아지긴 하겠지만 계속해서 내 주머니 속을 굴러다니는 슬픔의 조각들.


내게 이들처럼 혹시나 다시 엄마를 만날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다.  그리워하던 이를 만난이 들은 추억이 어린 가상의 공간을 꾸려서 그곳에서 재회하고 좋은 한때를 보낸다. 기술자들은 현대의 샤먼처럼 실체화된 존재를 세워 미처 꺼내지 못했던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남은 이들에게 준다. 내게 어떤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지를 누가 묻는다면 먼저는 아팠던 기억만 남은 엄마의 기억에서 되짚어가서 아프지 않았던 엄마를 떠올리고 싶다. 그런데 일단은 그게 좀처럼 쉽지 않다. 게다가 나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예민했다. 가능하다면 엄마가 힘들다는 것을 눈치채기 전에, 내 기억 속에서 엄마가 너무 많은 것들을 짊어졌다는 것을 알고 나까지 아파하기 전에 나와 엄마로 돌아가고 싶다.  그게 한 손에 잡힐 만큼 작은 내가 또 작은 엄마에게 안겨서 설악의 바다를 함께 보던 풍경이다.


내 기억 속에는 없는 그러나 한순간 존재했던 풍경. 사진 속에 나는 엄마가 속삭였던 어떤 아름다움을 자세히 보기 위해 바람이 흔드는 모자를 받쳐 들고 잔뜩 찌푸린 눈으로 열심이다.  어쩌다 사진으로는 남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완벽한 순간이다. 나 자신은 물론 실제의 엄마의 속마음은 모르지만, 어쨌든 사진 속의 엄마와 나는 행복해 보인다.  어쩌면 이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좋겠다. 엄마가 가리키던 아름다움을 확인하며, 생경한 바닷냄새가 가리지 못할 익숙한 체취의 품에 시름없이 안겨있고 싶다.


엄마의 목소리가 녹음된 파일을 여러 개 갖고 있지만 차마 듣지 못하고 일 년 여가 흘렀다. 기일에는 용기를 내볼 작정이지만 자신은 없다. 엄마가 보고 싶다.


(2021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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