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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Jun 09. 2022

나의 교통사고 일지 1

캐나다에서 인생 첫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엄마와 당시 엄마가 돌보던 아이와 함께 길을 걷다가 고등학생? 혹은 중학생쯤 되는 자전거 탄 학생에게 뒤에서 받힌 적이 있다. 어떻게 넘어진 건지 기절했다 깨어나니 그 집 대청마루였고, 부모님에게 언제부터인지 신나게 혼나고 있던 학생을 보며, 언뜻 미안한 감정마저 일었던 것이 기억난다.


2년 전에 산 차는 무려 2009년 식의 닛산 버사. 요새 나오지 않는 디자인에다가 창만 크게 뚫려있어서 첫인상은 무슨 장난감 같다는 생각이었다. 인생 첫차를 한국 돈으로 오백 오십만 원 정도 주고 샀을 때 같이 간 친구가 이름을 붙여줬다. 쏘카. (쏘피 +카), 그리고 내가 선사한 이름은 소달구지 (소피+달구지). 7월이면 차를 산지 딱 2년째 되는데 벌써부터 골골한 것이, 아무리 적은 km 수였지만 겨울을 몇 번지 나며 이미 여기저기 부식되고 요새 나오는 차들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어딘가 어설픈 차임에는 분명하다.


3 전, 쏘카와 내게 큰일이 있었다. 교통사고가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러 가던 , 초록불에서  출발하려고 속도를 올리던 참에 ! 하는 소리가 크게 나서 혼비백산했다. 내가 누군가를 박았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고 근데 앞에는 아무 차도 없이 내가 첫차라는 것을 다시 상기했다. 백미러로 누군가 차를 도로가에 붙이라는 손짓을  번이나 하는  보였지만 눈동자만 움직일  몸은 당최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이삼  여가 흘러서야 간신히 4차선에 2번째 차선에 있던 차를 빼내 도로 가에 세웠다. 뒤차 운전자도 나와 같은 동양계. 후에 확인하니 이제 스무 살의 앳된 친구였고, 차도 엄마  (재규어 트럭)이었다. 내리자마자 전방주시를 미처  하고 신호만 보고 달려왔다며 자기 잘못이라고 시인했고 사고 처리를 위해서 나는 보험사에  친구는 엄마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어진 통화는  시간 넘게 이어졌고, 경험이 없어 보이던 상담사와 통화하며 받은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머리가 깨질  같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려서 그날 수업 등을  취소하고 다음날도 반차를 써야 했다.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토론토는 교통사고율이 높은 도시 중에 하나로, 주변에도 왕왕 크고 작은 소식을 알려올 때가 종종 있었다. 그저 힛앤런 그러니까 뺑소니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고, 훔친 차가 아닌 것이 다행이었고,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고 무엇보다 내 과실이 일도 없는 것이 바로 인정돼서 다행이었다. 사고 치고는 괜찮은 사고였다고 치부할만했다. 당일 날 집에 와서 거울을 보고 경악했던 것은 눈에 크게 터진 실핏줄 때문이었는데, 전에는 한 번도 눈에 핏줄이 터져본 적이 없었다. 근데 한 번에 흰동자에 1/3을 차지하는 충혈을 보고 너무 놀랐다. 머리라도 다친 걸까 했는데, 급작스러운 스트레스로 한 번에 혈압이 오르면 생길 수 있는 일이라 간호사 친구가 말해줘서 안심했다. 이삼일 지나니 저절로 사라지더라.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놀란 게 컸어서, 며칠 사이에는 내 차가 오르막 길에서 느닷없이 뒤로 굴러서 뒤차를 박고, 꿈 속에서까지 감당하기 힘든 사건의 연속에 되려 기절한 척하며 현실을 외면하는 악몽을 꿨다.


내 경우 골절이 없는 심각하지 않은 부상 정도라, 삼 개월 동안 300만 원이 넘는 커버 금액 내에서 원하는 만큼 치료를 받을 수 있어서 내 부상에 느낌 상 효과적일 것 같은 침술원을 찾았다. 침술원이 독립적으로는 받을 수 없는 교통사고 관련 커버 비용을 라이선스가 있는 지압사 등이 온타리오 주법에 맞게 규정을 맞춰놓은 곳에서 환급받는 그런 구조라 어쨌든 소개해주는 데로, 그 라이선스가 있는 지압사에게 진단을 받으러 가기로 했다. 지압을 한 시간 정도 받고 물리치료도 받고. 치료가 시작된 주부터 일주일에 두번씩 약 5회의 치료를 받으러 다녔는데 일과 시간 중에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것도 너무 바쁘고 힘들다. 가고 오는 데 쏟는 시간이 한시간, 치료시간이 한시간에서 한시간 반 가량. 더 세심하게 살피고도 싶지만, 이제 이주에 한번 정도로, 나아진 컨디션에 맞춰 조절해서 다니기로 했다.


사고 후 일주일 동안은 차의 수리도 치료도 이뤄지지 못하고 전화 통화만 줄곳 해야 했다.  부상을 체크하고 치료과정을 살피는 보험사 직원과 차의 손상에 따른 보상을 다루는 직원이 달라서 배정받은 직원들과 같은 내용을 몇번이나 설명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영어가 서툴거나 부상이 심한 상태라면 대체 이 모든 일의 처리는 누가 해주는 걸까. 하고 생각하니 타지에 고양이만 데리고 나 홀로라는 처지가 아주 답답해 졌다.  차의 수리는, 물론 내 과실이 일도 없는 이상 상대방 측에서 커버해주기로 했는데, 수리 동안에 렌터카도 지원해준다고 해서 다행스러웠다. 매일 행선지가 기본 두 군데 이상이 되는 내게 차가 없는 하루하루는 이제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렌터카 때문에 또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보험사 산하의 수리센터에서 연락이 와서 차를 두고 가면 수리해주겠다고 당연히 렌터카도 준비됐다고 해서 찾아가니 뭔가 이상했다.  이게 보험사에서 계약한 엔터프라이즈라는 렌터카 회사가 보험 계약인에게 차를 대신 빌려주는 구조였고 중간에 아무 조율 없이 연락하는 바람에 차가 트럭 외에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침 이주 전 심하게 불어닥쳐서 10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던 번개를 동반한 심한 폭풍 탓에 렌트카 회사들이차량 부족에 시달리는 상태라고 했다. 아마 온타리안 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여름의 시작도 그렇고 마침내 완화되기 시작한 바이러스 관련 규정 들로 늘어난 여행객과 운전자들도 한 몫 했으리라 짐작된다.


후에 수업시간이 촉박한 상태여서 사전에 소모시간을 확실히 하고 갔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한 시간이 지난 상태서 그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입에서 논리정연한 영어가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와라락 화를 내고 돌아오며 트럭만 있을 거면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음날 연락한 수리직원은 여전히 확인을 안 하고 다시 고치러 오라고 (…). 아무튼 캐나다에서  이 사람들과 일을 하다보면 느끼는 게 익히 있었다. 내 일도 남의 일도 다 내 일인 한국 사회와 달리, 캐나다가 분업이 참 잘 된 사회고, 수평구조가 잘 이뤄진 사회이긴 하지만 이렇게 부서 간 커뮤니케이션이 안되고 자기 업무 외에는 아주 깜깜으로,  아는 것만 아는 직원들 때문에 의뢰를 해야 하는 입장만 난처해져서 그냥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자체를 곧잘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는 것이다. 이번 경우에도 일못하는 캐나다 인 (…)  혹은 시스템의 단점을 여실히 느꼈다. 오후가 되어 다시 연락이 와서 보자보자 하며 붕붕 달려갔더니, 이번에야 말로 차를 받게 됐고, 일처리가 그나마 빠릿빠릿한 엔터프라이즈 매니저가 내게 “블라블라 블라 근데 차저 괜찮아?” 라고 한다.  대관절 무슨 말인가 싶었다. 차저? 전기차인가? 그럴리가. 근데 그게 아니면 뭘 충전한다는 거야? 암튼 손가락질해서 언뜻 본 차가 그냥 평범한 세단처럼 보여서 상관없어. 하고 대답해버렸는데, 알고 보니 이 닷지사의 (이름이) 차저는 -여러 모델이 있지만 대강 비슷한 구성을 보니- 시가로 1억 원을 호가하더라. 6백만원도 안되는 십년 넘은 중고차를 몰던 나는 졸지에 졸부가 된 기분으로 뒤꿈치가 제대로 닿지도 않는 차를 덜덜 떨며 차고지에서 몰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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