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ie Jun 06. 2022

하찮은 존재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어쩐지 요새 들어 <네버 렛 미고>를 그렇게 다시 보고, 읽고 싶더라니 이것은 필시 우리 가즈오 이시구로상께서 내게 보낸 신호렷다. 그냥 또 우연히 들어간 알라딘 첫 화면에서 (새빨간 거짓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두 글자를 보고 눈이 뒤집혀서 예산을 초과해서 당장에 사놓고는 막상 혹여나 실망할까 며칠을 펼쳐 보기를 망설였다. 나는 그의 몇몇의 작품들에서 -특히 초창기 단편 들에서- 딱히 특별함을 찾지 못했었다.


사람의 마음이 그러하듯이, 작가의 책이든 감독의 영화든 이야기꾼의 한 가지 이야기에 푹 빠져서 몇 년을 걸쳐 들여다보고 살다 보면은 처음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그 이야기꾼의 마음이 한순간 투명하게 이야기 바깥으로 비춰보일 때가 있다. 쓸쓸한 엔딩을 뒤로하고 다시 이어지는 새 이야기에서도 온통 아까의 그 마음만이 또렷하게 떠올라 버려서 청자로써는 제아무리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쫓아보려 해도 쉽지 않아 지는 그런 순간이 온다.


이 가엾은 이야기에서 (정말이다 가엾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마음이 읽혀버렸다고 하면 착각일까.


<네버 렛 미고>와 쌍둥이 자매 같은 이야기였다. 여전히 실체도 없는 위정자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커플이 있었고 (토미와 캐시-조시와 릭), 외로움을 견디고 견뎌내려는 가련한 영혼들 (루스-크리시) 이 있었다.


악에 찌든 사람도, 턱 밑에 들이닥치는 위기도, 어떤 그런 절정도 없이, 외로움은 가뜩이나 초라한 사람들이 서로를 몰아붙이고, 스스로를 벼랑 끝에 서게 만든다. 세상은 차가운 철로 감긴 더러운 기계라, 숨을 멎게 하고 눈앞을 가려버린다.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그저 곁을 맴도는 릭을 볼 때, 토미의 불안정한 걸음걸이와 폭발하던 분노를 떠올린다. 지독하게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도 내쳐질까 전전긍긍하며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소중한 이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와 행동을 하는 조시를 볼 때의 나의 쓸쓸함은 루스의 어리석음을 볼 때와 닮아 있다.  닮았든 닮지 않았든, 가즈오 이시구로는 정말 굉장하다. 지독하게 여전히 이 쌍둥이 자매도 단박에 사랑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거대한 축인 공감 내지는 동감이라는 기본 요소가 특히 이 두 작품을 볼 때 특히 의미심장해진다. 화자가 ‘인간 존재’ 로서 동등하게 존중받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로서는 부지불식간에 세계의 가장자리에 발 끝을 겨우 세우고 서서 중심부를 향한 창 쪽을 간신히 넘겨보는 하찮은 존재가 되는 경험을 꼼짝없이 하게 된다.


저기 괜찮아요.

이런 얘기라면 얼마든지 해주세요.

“특별한 순간에 느끼는 행복과 아픔” 이 느껴지는 이야기

계속, 또요.


*시간문제겠지. 영화가 꼭 나올 거다.


(2021년 4월 5일)

매거진의 이전글 끈적끈적한 나의 모국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