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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Jun 05. 2022

함께 산다는 것

당신은 좋은 룸메이트인가요

평균의 한국인들보다 룸메이트/하우스메이트 경험이 많은 것 같다. 호주의 호스트 패밀리 집에서 6개월, 각기 다른 국가에서 온 친구들과 한 집에서 2개월, 태국 친구와 인도 학교 기숙사에서 9개월 (태국의 그 친구 본가에서 1개월), 미국 출신의 방콕 친구 집에서 4개월, 경기도의 회사 기숙사에서 절친이 된 친구와 2년 조금 넘게, 그리고 캐나다의 렌트하우스에서 3년 가까이 이런저런 친구들(혹은 원수들) 약 10명이 넘는 다양한 사람들과 한 집에서 살아왔다. 이런 경험을 통해 유연해졌냐 하면, 사실 굉장히 어려운 사람이 돼버린 것 같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근데 느낌으로 사람을 고르는 촉으로 말한다면, 최근에 이 촉이 엄청 똥촉이 된 경험을 몇 번 해버려서 촉에 대한 자신감이 폭락장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다양한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사는 경험은 나에 대한 많은 공부가 됐다. 호주에서 생활하면서는 내가 어느 정도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얼마나 안정적일 수 있는지를 배웠다. 한평생 불안감을 안고 살았던 집을 벗어났을 때, 오히려 낯선 환경 속에 편안함을 느껴버려서, 그 뒤로도 겁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계획하고, 정성을 들여서 음식을 만드는 경험이 주는 따뜻함을 배운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호주의 서쪽, 사막의 광산 타운에서는 서브웨이 말고는 광부들이 점심을 먹을 곳이 없었다. 그곳에서 나를 포함해 각국에서 온 6명의 친구들은 같은 직장의 다른 쉬프트에서 일하며 한 집에 살았다. 내가 일이 생겼어서 생각보다 짧게 있었지만,  또 내가 있던 그 짧은 이 개월이 인터넷이 없던 때였다. 간신히 핸드폰 데이터로 짧은 인터넷 서핑밖에 못하던 우리는 누군가의 컴퓨터에 깔려있는 영화를 노트북 화면으로 옹기종기 앉아 볼만큼 가까웠고, 매일 밤 모두의 쉬프트가 끝난 어느 언저리의 저녁 무렵이 되면  마당에 놓인 소파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미니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인 맥주를 마셨다. 이런저런 대화가 아니면 할 게 없는 밤 들이었다.



특히 마당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캐러반에서 살던 나는 조용한 나만의 공간이 충분히 확보됐었고, 혼자서 심심할 때면 캐러반 문만 열면 맥주와 친구들, 즐거운 대화가 언제나 대기 중이었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가 그때였던 것 같다고 종종 생각하곤 한다.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찬 밤의 달빛 아래서 감은 머리를 뒤집어 한 열 번 빗질 하다 보면 저절로 마르곤 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쉬는 날에 온 집안을 뒤집어 청소하던 나를 보면 다른 친구들은 혀를 끌끌 찼지만, 사실이, 힘든 게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이 온기로 가득했었다.



태국 친구와는 참 쉽지 않았다. 이때 우리 방은 접어놓은 듯 대칭을 이루는 구조였고 큰 공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공간의 활용 자체로 다투는 일을 없었다. 모든 것이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둘로 나뉘었고 음식은 학교에서 제공되는 음식이었어서 해먹을 필요가 없었고 청소는 정기적으로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차이는 성격이었는데, 이 친구는 말하자면 오만군데 참견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고 가십과 소문에 민감한 사람이었어서 개인 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는 인도친 구들을 피해 방에 칩거하다시피 하던 나는 가만히 방구석에 앉아서도 온 동네의 소식을 시시각각으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정보력 중에는 귀가 솔깃해지는 것들도 있었어서 선생님들과의 독대나, 인도 가정집의 방문 등 개인적으로 좀 더 깊이 그들을 알게 될 수 있었던 계기는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우리 사이에는 이간질하던 다른 외국인 친구가 끼어있었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사실 이미 둘 사이가 애증의 관계로 굳게 형성되어있었어서 그리 쉽게 미워하고 좋아할 수 있는 것만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근본적으로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또 그렇게 달랐어서 음과 양처럼 서로가 득이 되는 면도 많았다. 오래 붙어있으면 피곤해지는 친구. 그래도 아직도 그 친구와 “잘 자”라고 서로 태국어와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하곤 한다.


비슷한 사례 하지만 다른 사례로는 한국의 친구가 있다. 이 친구와 나는 겉으로는 다를지라도 근본적으로 같은 성향의 사람이어서 차이를 찾기 힘들었다. 위와 같이 자로 나눈 듯이 갈라진 회사 기숙사에서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잘 어울렸다. 어둠과 빛,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느끼고 싶어 하는 친구에게서 나는 밤에 보는 별의 즐거움을 배웠고 간헐적 흡연자라는 것까지 닮은 우리는 그 무렵 고된 하루를 몰래 같이 쪼그려 피는 담배로 날려 보내고는 했다. 친구는 내가 냄새에 예민하다는 것을 안다. 오랫동안 요가원에서 일한 나는 부엌 외에 생활공간에 음식 냄새가 침범(!) 하는 것을 엄청 경계하는 편이다. 어느 날 친구가 굽는 생선 냄새에 쉬는 날 늦잠을 깬 나는 무섭게 짜증을 냈고 그다음부터는 엄청 조심해주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주로 짜증을 많이 냈고 무던한 친구가 잘 참아줬다. (나의 좋은 친구들은 다 내 지랄을 잘 참아내는 착한 사람들이다) 인도 여행에서 기어코 울린 것은 두고두고 미안할 거다. 같이 같은 책을 보고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각각이 다른 일을 하며 종종 서로의 취향을 품평하고 훔쳐내는 일도 즐거웠고 내가 마시는 술을 딱 한 모금만 마셔도 알딸딸해지는 친구의 주량까지 안성맞춤이었다. 처음 한 번지점프도 패러글라이딩도 다 이 친구와 함께였다. (친구 쪽이) 스카이다이빙이나 (내가) PCC 도 같이 하자 하지만 이건 기약이 없다. 같이 오른 산에서 조난을 당하는 바람에 119를 불러 구조를 받은 것도 이 친구와 처음, 항상 혼자만 다니다가 처음으로 누군가와 해외여행을 같이 간 것도(그것도 인도를!) 이 친구와 함께였다. 이런 완벽한 짝꿍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아직도 종종 다시 만나 같이 사는 꿈을 꾼다. 하루하루 특별하지 않아도 즐거운 일상을 살 수 있게 서로를 보듬어 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 친구에게 배웠다. 내게 이 친구는 가족 밖의 가족이다.



냄새에 대한 것 말고 특별히 내가 예민한 부분이 있다면 대화를 보는 관점(?)인 것 같다. (따지자면 항목 10개는 나올 것 같아서 두 개 정도로 정리하기로 하자) 아무래도 집안에 아직 내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대등하게 한 집에서 사는 입장이라면 사실 나는 대화에서 많은 힘을, 최대한 빼고 싶다. 밖은 전쟁터요 집은 포근해야 하는 환경인데 사실 나는 포근함을 꾸리는 데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다. 주로 밖에서 소통에 요구되는 온갖 있는 에너지 없는 에너지를 다 쏟은 나는 안으로 들어왔을 때 조용해진다. 아니 차가워진다고 표현해도 되겠다. 기쁘고 재밌는 이야기를 할게 아니라면 잉여의 시간을 최대한 휴식으로 보내고 싶은데 날 선 대화를 해야 하거나 중요한 말을 신경 써서 해야 하는 건 피하고 싶다. 그런 얘기는 같이 사는 사람이어도 날을 잡아서 이 시간은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시간.이라고 준비를 시키고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서 주로 조용해진다.


이게 좀 차이가 있는 게, 태국 친구와 한국 친구의 경우 우리가 나눌 수 있는 환경이 비슷했다. 하는 일이 같았고 나눌 정보가 같았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며 생각하는 것들이 닮았어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다 자는 것도 이상할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냥 머리 붙이고 하는 대화도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이서 자니, 혼자만의 상념도 공통의 상념으로 남아 꿈속까지 비슷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캐나다에서 만난 하우스메이트들과는 그런 가까운 대화를 나누기가 아무래도 힘들었다. 하는 고민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세대도 달라서 공통의 대화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게 없었다. 빠듯하게 바쁜 일상이 굴러가다 보니 서로 가까워서 같이 살게 된 친구라도 서로 같이 만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날은 따로 잡았고 대부분 각자가 보내는 시간은 쉬는 시간으로 존중해 주는 게 자연스럽다. 사실 이 존중이 어느 정도 밑바탕에 깔린 사람은 내가 아무리 냉각돼도 그게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불편해하거나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런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것이 오해로 남아 불편해지는 상황이 돼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이게 또 애매한 게 아무래도 최소한의 대화만 선택하게 되면 싫은 얘기만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씻지 않은 그릇이 꽉 찬 싱크대라든지, 젖은 고무장갑이라든지, 밤 11시에 굽는 삼겹살이라든지....


물론 나는 고작해야 이것뿐인 불완전한 사람이다. 아직 혼자서 살아갈 능력이 갖춰지지 않아 여전히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해야 할 사람이다. 이 공간을 지혜롭게 부딪히지 않고 잘 사용해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생각하면 그냥 조금의 불편함이 답이다. 차피 내 집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고 나는 그저 나만 쓰는 공간을 잘 꾸리고 지켜나가면 된다. 나머지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는 서로가 조금 어렵게 생각해야 유지되고 가꿔진다고 믿는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가족이 아닌 타인과 같은 집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는 듯한 어린 친구가 갑자기 들어와서 (얼마나 같이 살아야 할지, 아주 짧을지 길지 모른다) 선 없이 들이대고 재잘거리다가 차가운 내게 나가떨어진 게 보여서다. 한 예로, 같이 살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안된 날, 자기가 먹고 싶어 사온 케이크를 한 조각 굳이 먹으라고 들이 되더라. 고맙지만 됐어를 한 다섯 번 했는데 너 내가 주는 이거 꼭 먹어야 한다고 접시에 담고 있더라. 단호하게 한마디 해줬다.


“난 분명히 싫다고 말했어. 너 알아둬, 나한테 뭘 먹으라고 강요할 수 있는 건 우리 엄마랑 할머니 밖에 없어!”


고로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걸 너는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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