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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나무 Jan 30. 2024

해방 전후 명동 문학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문화전환기 명동 문화

문화가 피어나던 잊혀진 명동.


문학이란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학적 활동이 오늘날처럼 정보통신이 발전하지 않은 과거에는 장소적 상징성이 있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이들은 교류하고 활동하며 지역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언덕,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독일 하이델베르크 등 각 나라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살아온 흔적을 잘 보존하면서 그들의 삶의 흔적을 지켜오고 있다.

우리에게도 그런 문화가 있던 장소로 명동이 있었다. 비록 일제강점기이지만 명동에서 문학과 철학이 꽃피우고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러다 보면 해방 이전 명동과 해방 이후 전쟁을 겪고 난 후 명동 문학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 문화 흐름을 이해하기 쉬워진다. 언제나 시대별 대표문학을 보여주는 사회는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와 역사성을 확인시켜 준다. 예를 들면 박정희, 전두환 독재 시대 독재자를 칭송한 서정주와 같은 친일 문학인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는 김남주 시인과 같은 시대정신을 이야기하는 문인들을 대중들이 찾아가면서 알게 된다. 그럼에도 김남주와 같은 저항시인은 왠지 한국문학의 중심이 아닌 것처럼 대중들이 느끼거나 생소하게 느끼는 이유는 언론/미디어 및 교육시스템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과거문학을 통해 과거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이 살아간 시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시대를 온전하게 이해해야만 현재 우리들의 과제와 가야 할 길이 보인다.

또한, 어느 나라든 문학이 찾아내는 문제의식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과 철학이 만들어진다.

그런 철학과 시대정신의 바탕이 있어야만 사회변화가 이뤄진다.


사람들에게 철학적 사유가 없는 사회는 퇴보한다. 어쩌면 현재 우리의 모습  철학적 사유가 없는 오로지 돈만 쫗는 시대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런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이어가던 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의 아지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종로 명동문학


프랑스혁명에서 좌익은 급진 개혁파, 우익은 온건 개혁파였다. 모두 혁명세력으로 속도만 차이 있을 뿐 모두 세상 변화를 꿈꾸던 사람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비록 식민지이지만 급진적 사회변화로 독립을 꿈꾸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은 중도 좌파 여운형 선생은 남한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했기에 해방전후 시대 식민지 경험한 많은 이들의 경우 사회주의에 더욱 동경했다고 한다.

보신각 옆에 위치한 과거 사상계, 문학동맹 터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과거로 이동해 보고자 한다. 현재 서울 종로 2가 초입으로 현재 보신각 옆(종로 2가 102-3)이며,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 맞은편에 자리 잡은 6층 건물 한청빌딩에는 8ㆍ15 해방 직후 임화 등 좌익 문학인들의 본거지 ‘문학동맹’이 있었다.

이후 한청빌딩에는 1950년대 초 그 빌딩에 장준하 선생이 하던 ‘사상계’ 잡지사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렇게 한청빌딩은 파란만장한 해방전후 우리 문학과 시대정신의 중심이기도 했다.


종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명동은 1940년대 일제 강점기 명동은 혼마치라는 불리는 곳으로 많은 문예인들이 교류하는 장이었다. 명동은 미남평론가이며 사회주의자 임화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그는 마산 부잣집 딸 미녀 소설가인 지하련과의 연애는 화제 중심이었다.

1940년대 현재 한국은행이 있는 명동 거리


이후 6.25 전쟁을 겪으며 월북한 문인들을 뒤로하고 명동은 전쟁의 폐허 안에서도 꿈과 낭만을 잃지 않기 위해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동방살롱, 모나리자 다방, 문예 살롱, 갈채 다방, 은성, 유명옥 등에서 예술가들은 서로의 상처를 달래며 명동에 위치한 이곳에서 만남을 가졌다. 이곳에서 이봉구, 김광균, 김동리, 조연현, 천경자 씨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낯익은 얼굴들이 자주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명동은 한국 예술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다. 

동방살롱과 박인환

해방 이후 대표적 친일 작가인 모윤숙 대표에 김동리 주간, 조연현 편집장을 중심 ‘문예살롱’ 이 있었다면 전쟁으로 돈을 벌었던 김동근은 가난한 문학인을 위한 공간인 ‘동방살롱’을 문 열었고,  이해랑, 황정순 등 연극 영화인들을 비롯해 음악인, 화가들과 문학인으로는 이봉래, 양명문, 박인환, 백철, 조애실 등이 드나들었다. 그리고 근처에는 소설가 이봉구가 자주 다닌 ‘모나리자’ 다방과  가난한 문학인들에게 외상을 많이 주는 ‘은성’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또한, 은성주점 주인은 최불암 선생님의 모친으로 돈 없는 문인을 위한 김치와 같은 무료 안주가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현재 모든 식당에 기본으로 나오는 김치는 은성주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좋을것 이다.


이와 함께 공초 오상순 선생이 자주 다니던 청동다방 등 , 박경리 선생 등 이시절 많은 문학인들은 명동에서 활동했다.  이뿐만 아니라 명동은 황소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등 당대 수많은 예술인들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남쪽 명동파출소 뒤쪽 골목으로는 젊은이들이 많이 드나들던 음악다방 ‘돌체’가 성황을 이루며 해방 이후 명동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예술가들은 상업화로 변질된 명동을 떠나게 되었고, 그들은 서로의 소식을 나누는 장소도 잊어버렸습니다. 


명동에 위치한 명동백작 유명옥, 은성 등 과거 명동의 명소가 표시되어 있다. (역사 해설하시는 민토 지승룡 대표)



명동에서 삼양동으로


화려하면서도 굴곡 많던 명동을 떠나게 된 한국사회 문화인들은 이제는 명동거리를 다니는 대중들에게 잊힌 존재처럼 되어 버렸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사회는 인문학적 가치보다 부동산 등 돈의 가치에만 매몰되어서인지 모른다.


나는 명동 성모병원에서 태어나서 주로 삼양동에서 살아왔다. 삼양동이란 곳이 사실 빈민촌으로 생각하고 언제나 탈출하고 싶던 고향이었다. 그러나 소외되고 가난한 동네지만 무언가 사연이 있는 동네라는 생각은 어릴 적부터 느끼긴 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민들레 영토를 운영하시던 지승룡 대표를 통해 명동과 삼양동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문학인과 예술인들이 오랫동안 명동에서 활동하다가 상업화된 명동을 떠나서 산과 물이 좋은 정릉 삼양동, 우이동 등으로 이동했서 정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삼양동은 조선시대부터 궁중 빨래를 했던 빨래골이 있다. 빨래꼴에 오르는 길에는 공초오상순 선생의 묘소를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우리 동네를 넘어 쌍문동으로 가면 전태일 열사가 살던 곳이 있다.


대체로 서민들이 사는 동네인 강북구는 4.19 민주묘지, 민족문제연구소 근현대역사관, 문익환통일의 집, 한신대학교, 독립운동가 묘지 , 3.1 혁명이 기획되었던 봉황각 등 우리 역사 속 우리 민중들의 지켜온 시대정신의 큰 줄기를 불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인들이 명동에서 삼양동, 우이동으로 이동하게 된 이유는 70년대 이후 상업화된 명동은 더 이상 문학인들의 아지트 역할을 못하게 되었던 것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한다.


1970년대 삼양로 도로 개발 현장, 뒤로는 아폴로 극장 간판이 보인다.

https://blog.naver.com/ykhpd/222081239312


이후 명동에서 활동하던 김수영, 오상순 선생, 박경리 등이 강북구와 인연이 있다.

또한, 김수영은 도봉구 도봉동 107-2번지 일대에서 양계장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박경리 선생의 경우 정릉에서 살았고, 토지소설의 상당수도 정릉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문인들이 삼양동 우이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문학계의 어른인 오상순 선생 묘소가 삼양동 빨래꼴에 모셔져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공연 기획자 김민기는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강북구 수유리 미술작업을 하면서 아침이슬을 떠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명동은 문학뿐 아니라 대중음악문화의 상징성이 있던 곳인지 모른다.  그러나 명동 이후 강북구 도봉구로 많은 문인들이 이동한 시대를 거치면서 문학은 특정한 지역이 아닌 광주, 전남, 울산 등 시대적 아품이 함께하는 전국 모든곳이 문학 공간이 되었다.


문학은 대중 속에 스며들었고, 김남주 시인과 같은 사회운동가 이자 전사와 같은 시인이 나오기도 했고, 5.18의 참혹한 현실을 노래한 5월의 시인이고 생명의 시인인 김준태 시인이 시대정신을 이어오기도 했다.


최근에는 친일 문학인 미당 서정주 상을 거부하고 희망버스를 기획한 혐의로 구속된 적 있는 송경동 시인이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시인들은 풀뿌리처럼 자라나면서 우리 시대를 표현해 준다. 이들이 시를 통해 말하는 역사가 바로 우리 민중들이 그리는 현재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추모시를 쓰는 송경동 시인의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왕정시대를 넘어선 공화정 체제가 나오는 과정은 험난한 근대화 과정이었다.

그 시대에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국가로 탈바꿈한 나라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감대가 있었는지 모른다.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이 공화정으로 왕권이 없는 제도를 도입하게 되었고, 형식적 측면에서 자본주의 국가 및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변화했다.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라는 형식은 유럽사회에서도 제도 형태로 받아들여진 복지국가로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용어적으로는 사회주의라고 하는 북한과 중국의 경우 실제 사회주의가 맞는지도 의문이 생긴다.

다만, 우리 사회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의 정책에 의해 남과 북은 극단적 대립관계와 동족 간 전쟁을 통한 분단을 현재까지 이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본질을 이해한다면 자본주의는 선이고 사회주의라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매우 인문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관점이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독재와 보수적 정권으로 인해 역사 인문학이 발전될 토양을 만들지도 못했고 공론장을 경험하고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문학이 천시받는 오늘날 한국사회 대중들은 과거부터 이어왔던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단절이고, 의식의 단절이며, 경험의 단절인 것이다. 인문학이란 이러한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를 세대에 전달한다.


우리는 문학과 예술을 통해 근현대에 우리 지식인들은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고, 그들 삶을 이해하며 오늘날 우리는 어떤 현실에 놓여 있는지 알아가는 것은 우리 세대가 가져야 하는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본질적으로는 우리뿐 아닌 전 세계 국가별로 변화되어 온 근대화 과정에 대해 다시 되돌아보면서 역사에서 어떤 오류와 발전을 겪어왔는지 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류가 만들어낸 철학과 사회 변화에 대해 인문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전체를 바라보는 사회를 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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