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와 오상순의 흔적을 만나다.
성북구, 강북구등에는 문화적 유산이 많은 지역이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서울 내 자치구 중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역들이다. 그럼에도 강북지역에는 무언가 차별화된 역사성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일제강점기부터 근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의 역사성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성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강북 문학인들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문화기행을 하기로 했다,
주로 모이는 대상은 기술 연구회 모임분들이지만 문화적 관심이 큰 분들로서 함께 강북문화기행을 했다.
주요 프로그램은 박경리 가옥과 공초오상순 묘를 다녀오는 프로그램으로 우리 일행은 먼저 오후 3시부터 우이신설역 북한산보국문역에 모여서 시작했다. 이중 첫 번째 방문지인 박경리 가옥을 보고, 삼양역으로 이동해서 공초오상순 선생묘를 들릴 예정이다.
박경리 가옥 : 서울 성북구 보국문로 29가길 11 (우이신설 북한산보국문역에서 출발)
공초 오상순 선생묘 : 서울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우이신설 삼양역에서 출발)
우리는 북한산보국문역 아래의 정릉천번풍경에 내려가서 보니 통기타 가수가 부르는 포크송이 매우 정겹다.
우리가 모인 정릉천번풍경이라는 카페 사장님은 인문학자이자 저자이신 김란기 선생님이셨다. 우리는 박경리선생과 공초 오상순 선생이야기를 찾는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하니, 선생님은 우리 일행을 무척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러면서 함께 명동 문학시절부터 활동하던 문학인들의 이야기와 박경리 선생가옥이 안타깝게도 개발지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카페 내에는 이쾌대 화가의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 우리는 이쾌대 선생과 그 형인 이여성 선생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지식인으로 모두 화가 이면서, 그 형인 이여성 선생은 통계 학자, 복식학자 이기도 했다. 또한, 여운형선생의 참모이기도 했다. 이들은 서촌에 집이 있었고, 종로, 명동에서 활동하던 당대 사회주의 지식인이었다.
사실 서울이 본격적으로 오늘날과 같이 개발되기 전 일제강점기 혹은 해방시기 중심가는 명동이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중심가에는 많은 지식인과 문학인들이 모이고 사교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독 명동은 문인들의 아지트로도 유명했는데, 이상, 박인환, 공초 오상순, 그리고 김관식과 신경림과 같은 시인들이 활동했습니다. 또한, 명동은 청년 문화와 음악의 중심지로도 떠올랐는데, 포크송 모임과 대학생 싱어송라이터들이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문학인들이 있을 수 있던 것은 명동은 가장 카페문화 및 살롱문화가 발달되었던 곳이었다. 특히, 청동다방, 동방살롱, 문예살롱이 유명하다. 그리고, 은성과 같은 곳에서는 가난한 문인들에게 외상을 많이 해줄 정도로 인심 좋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활동한 많은 인물 중에는 박경리와 공초 오상순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명동의 역사성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명동이 상업화가 되면서 가난한 문학인들이 과거처럼 문학을 논하기 어려운 공간이 되면서 이들은 물이 좋은 강북으로 이전했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천변풍경에서의 명동이야기를 마치고 정릉천을 따라서 박경리 가옥으로 향했다.
정릉천 주변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많은 주민들의 걷기 운동하는 모습이 활기찼다, 그리고 막상 도달하게 되는 박경리선생 가옥 주변에는 부동산 재개발 홍보물로 덮인 담벼락을 보면서 이곳이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경리 선생이 머물던 주택에 다다르자 우리 일행은 너무나 관리 안된 모습에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박경리 선생께서 그래도 토지를 썼던 곳인데 이렇게 관리되는 것이 맞을지? 그리고, 주변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향후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 외에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관할 성북구청은 개발과 관련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마 문화에 좀 더 관심이 있는 지자체였다면 향후 어떤 방향으로 개발되고 보존될지 계획이 그 자리에 붙어있었어야 할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우리는 박경리 선생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문학계의 거장 박경리의 삶과 업적은 한국 사회에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겼습니다. 박경리는 1926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 가족 문제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독서를 통해 희망을 찾았고, 김동리의 권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불신시대'와 '김약국의 딸들' 등으로 인정받았으며, 특히 '토지'는 한국문학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이 소설은 1969년부터 2004년까지 25년 동안 써내려 진 대하 장편 소설로, 표현하여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광복까지의 파란 많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민족의 방대한 역사 기록으로 남는다.
박경리는 1965년부터 정릉동 골짜기 집에 머물렀다. 이곳은 박경리 토지 총 5부 중 1~3 부를 집필 후 탈고 했던 곳이다. 딸인 김영주가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했는데, 이후 1980년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을 떠나 원주시 단구동에 정착해서 토지 4, 5부를 집필하고 탈고했다. 그 후 박경리가 살던 원주 집은 박경리문학공원이 되었으며, 그 집이 택지 개발지에 들어가게 되자 1998년 흥업면 매지리의 회촌마을로 이사하였다.
이 자리에서 해설을 맡아주신 김들풀 문학뉴스 주필은 박경리 선생의 사위 김지하의 삶에 대해 첨언을 했다. 김지하의 삶은 한때 저항시인이었지만 80년대 이후, 생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쓴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글로 그들의 죽음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그는 생명에 대한 그의 존중심에서 나온 비판이었다고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5.18 군사 쿠테타 세력인 노태우 정권을 돕게 되는 결과가 되면서 원성을 샀다.
박경리 선생은 2008년에 서울에서 별세했고, 우리 일행은 토지 1~3부를 탈고한 정릉집을 방문해 봤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런 표지도 없이 방치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우리가 발견한 것은 우리 시대 서울에 사는 대부분 사람들은 박경리의 문학과 삶보다는 아파트 재개발에 대부분 관심이 있었고, 향후 재개발 이후 박경리 선생의 흔적은 모두 사라질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우리는 자본 중심 시대 명동에서 쫓겨나고 개발에 쫓겨 문화가 사라지는 시대의 자화상을 눈앞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걸어 다니면서 문화의 길을 복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 일행은 우이신설 경전철을 타고 삼양역에 내렸다.
삼양역에서 곧바로 오르막을 오르면서 주변을 보면 놀라운 관경이 펼쳐진다. 산동네와 저 너머에 인수봉이 보인다. 우리가 대표적 서민의 동네라고 하는 강북구는 유난히도 언덕과 산이 많다.
사실 이러한 경치는 내가 어릴 적에는 가난의 상징처럼 느끼던 모습이었지만, 한국사회가 부동산 탐욕에 휩싸일 때 서민들을 위한 지역으로 함께 살아가는 강북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비록 가난하지만 높은 의식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강북구 우이동에는 4.19 민주묘지 및 독립군묘지 등이 있어서인 것 같다. 또한, 통일운동을 하시던 문익환통일의 집이 있고, 김수영 문학관과 같은 곳이 있다.
우리가 방문할 공초선생묘소로 가는 길은 산길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길에는 조선시대 궁녀들의 빨래터가 있다. 이곳은 빨래골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나 역시 어릴 적 물이 풍부했던 빨래골에서 수영을 하면서 놀던 기억이 있다.
사실 어릴 적에도 많이 다니던 곳이었지만 공초 선생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그분의 묘가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공초선생의 묘소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담배 한 개비를 태워서 묘소 앞의 재떨이에 놓고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공초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상순 선생은 한국의 시인이자 수필가로, 1894년에 태어났고 1963년에 별세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도시샤(同志社) 대에서 공부하였으며, 문학 동인 '폐허'에 참여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으며, 명동의 청동다방에서 많은 문인들과 만나 작품을 썼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청동다방 시대'로, 그 시기의 문화와 예술을 담아냈습니다. 공초는 다방을 찾는 사람들에게 종이를 내밀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게 하여 '청동산맥'을 완성했습니다. 1963년 고혈압으로 별세한 그의 향년은 70세였으며,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문학기행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산길을 내려오면서 삼양리빙랩으로 향했다.
삼양동은 과거 가내수공업단지로서 작은 공장이 많던 곳이었다. 물론 우리 집도 그런 작은 수공업을 했다.
우리가 문학인들이 명동이 상업화되면서 강북에 왔듯 청계천 개발등으로 충정로에 있던 사람들을 강북과 성남대단지로 보냈다.
그렇게 도시화로 밀려난 사람들이 자리 잡은 곳이라는 점에서 문학인들과 서민들의 삶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삼양리빙랩은 강북 지역의 역사성을 되살리는 측면에서 작은 옥상 세미나를 진행했다.
삼양리빙랩에서는 저녁 세미나와 함께 김들풀 교수님의 주역강좌를 했다. 그리고 오늘 강북구 삼양동 일대의 문화적 유산을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지역 공동체를 복원하는 의미도 있다. 또한, 문화적 유대감을 통해 복원된 공동체는 새로운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특히, 해외의 첨단산업 창업 관련 진행은 대개 오래된 도시에서 싹이 트는데, 한국사회는 창업하는 사람들이 임대료 높은 강남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면에서 본질 보다 껍데기를 통해 과시하는 세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공지능과 같은 스타트업을 위한 환경은 창의성이 필요하기에 높은 건물지대보다는 낮은 건물과 함께 문화가 어우러진 강북이 오히려 좋고 의미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자본 중심 시대 명동에서 쫓겨나고 개발에 쫓겨 문화가 사라지는 시대의 자화상을 눈앞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걸어 다니면서 문화의 길을 복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