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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나무 Feb 18. 2023

서울. 기억이 사라진 도시

기억이 연결되어야 공동체다.

기억상실의 도시 서울


우리는 도시를 걸어가며 어릴 적 기억이 모두 사라진 서울이란 거리를 매일 생소하게 생각한다.

생소함으로 다가오는 서울이라는 도시는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이고 활기찬 도시라고 생각해 왔지만 나를 비롯하여 서울에 태어난 사람들은 서울을 고향처럼 생각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왜일까?


난 서울을 떠나서 유럽 등 해외 도시를 다녀보면서 그들이 우리에 비해 공동체가 잘 이뤄진 이유의 핵심은 남아있는 기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유럽 종교 공동체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처럼 대형교회가 많은 도시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울이란 도시 속에 남아있는 기억이 매일 같이 포클레인과 철근 콘크리트로 뒤바뀌는 빌딩 속에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함께 했던 공간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은 매번 재개발을 하면서 힘없는 주민들은 모두 어딘가를 떠돌며 살아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서울이 매일 낯설다.



고향이 서울이라는 사람들


누구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따뜻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서울을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고향이라면 자신이 태어난 곳과 자신이 살던 집에 대한 기억이 있지만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자신의 동네가 모두 아파트로 뒤덮이면서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서울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집이나 병원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명동 성모병원에서 태어났지만 그 위치가 어디인지 잘 몰랐었다.

내가 태어난 1970년, 전태일 열사는 노동법 법전을 그의 육신과 함께 불태웠고 그의 죽음의 마지막을 명동 성모병원에서 보냈다. 명동성모병원은 생명탄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최근에야 명동성당 근처에 있던 명동성모병원은 1968년 여의도로 이전했고 현재는 가톨릭 회관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 같은 서울사람은 그런 태어난 곳에 대한 추억이나 기억이 없다.  전해 들었던 기억이 있다고 해도 그 공간과 거리는 대부분 바뀌어져 현실감이 나지 않아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를 비롯하여 서울이란 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지승룡 대표를 만나서 명동을 걸어보면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명동을 통해 서울이란 공간 속 역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명동 주변 일제의 흔적


명동주변 지명으로 남창동과 북창동이 있다. 이러한 지명은 일제강점기 남쪽창고, 남창동, 북쪽창고, 북창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중심거리 혼마치(일본어 표현 : 本町)로 으뜸 거주지라는 의미로서 현재는 충무로 안길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곳은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현재도 조선총독부 명의 건물이 있다고 한다.

즉 제대로 친일 청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기사에서 보면 일본인 재산관리인 또는 친일파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가서 그들은 현재 평당 1억 넘는 땅가진 집주인이 되었다.

이로서 명동은 미국돈을 통한 사채시장 형성이 되었고, 오늘날 저축은행의 원조가 되었으며 땅가진 사람들은 미리 개발소식을 알고 투기하게 됨에 따라 점점 더 부를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오늘날 한국사회 금융과 부동산 산업이 이들 그룹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조선총독부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264382




명동성당


명동성당은 한국통신 시절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노동조합 선배들과 같이 연좌 농성을 하던 기억이 난다.

한국통신 노조는 이후 MB정권 국정원까지 투입되어 미주노조 탈퇴등 해체 수순을 밟고 현재는 유명무실해졌다. 그리고 명동성당은 수많은 민주화 운동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영화 1987에서도 민주화 시위를 하는 마지막장면에서 명동거리가 나온다.


명동성당은 원래. 조선시대 말 종현성당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역은 조선시대 개혁성향 남인들이 살던 지역이다. 남인들 중 정약용과 같은 분들이 있었고 그 시대에 중국등 조선밖의 세상에 밝은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박해를 받았던 곳이고 현재 이 지역은 명동성당이 자리 잡게 되었다.


또 그 앞에는 이재명 열사가 이완용을 죽이려던 곳이 있다. 이재명 열사는 안타깝게 매국노 이완용을 죽이지 못했지만  선생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최후 진술을 통해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한다 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하리라”라고 말하면서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과거의 명동성당

 


서울에는 서울 토박이가 없다.


서울이란 곳은 6.25 전쟁과 폭격에 의해 많은 죽음으로 사라진 도시이다. 우리가 서울에 서울사람을 찾기 어려운 이유도 그런 죽음과 파괴로 모든 것이 사라진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6061.html

수많은 생명이 폭격으로 사라진 주인 잃은 땅이 서울이었다.

그러던 서울에서 가장 우선권을 가지는 사람들,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결국 1950년대 매카시 광풍이었던 미국입장을 충실히 따르던 영락교회 함경직 목사와 청년들은 서북청년단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만들었다. 그리고, 현재도 이러한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보수 기독교 단체의 정치집회와 이들의 폭력성을 볼 때도 많이 있다.



영락교회와 낙랑클럽


영락교회는 서북청년단과 관련이 많다. 상당수 영락교회 청년 교인으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은 제주 4.3에서 잔혹한 살육 행위를 했다. 전 4.3 유족회장이 서청에 대해 악마화하지 말고 화해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사실 용서와 화해라는 것은 가해자가 해온 잔혹한 행위에 대한 심판을 하고 죄에 대해 인정하고 이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서북청년단의 행위에 대해서는 누구도 심판하지 않았고, 심지어 대중들은 알지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다음은 오마이뉴스의 기사에서 목회자가 진술한 내용에 핵심이 있다. 가해자가 개신교 주류를 차지하고 있기에 반성이 없는 것이다.


"일찍부터 4.3에 관심이 많았다. 서청이 잔혹행위를 저지른 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가 속한 예장통합이나 한국교회 전체가 서청의 잔혹행위에 사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해자들이 개신교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이게 교회의 현실이다." - 목회자 B 씨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15105


영락교회는 해방 후 미군정으로 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 영락교회의 위치가 과거 천리교 위치를 사용하게 했고 그 주변 적산을 가질 수 있는 혜택을 독점하게 되었다.


1945년 : 공산주의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성도들이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창립예배 거행 (교회 이름 : 베다니 전도교회, 교회당 : 일본 천리교 경성분소 개조)

1946년 : 교회 이름을 <영락교회>로 개명, 경기노회 가입

1949년 : 석조건물 교회당 기공, 한경직 담임목사와 강신명 동사목사의 위임식 진행  

  - 위키백과 자료 발췌 -


미군정을 상대로 또 다른 혜택을 받은 이들이 있다. 이들은 미군상대 고급사교 모임인 낙랑클럽 사람들로서 이화여대 영문과출신의 부녀자들로서 미군들 대상 고급호스티스 또는 접대부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어떤 면에서 그 대가로 가장 노른자위인 일본인들이 가고 난 후 무주공산이 된 명동땅을 혜택으로 받았고 그들은 유명한 명동 사채시장의 큰손이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친일 친미 자산가로 성장하여 오늘날 한국사회 부동산 투기와 저축은행과 같은 대부업 업계의 큰손들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들 서북청년단과 낙랑클럽 사람들의 배경을 보면 어쩌면 일제강점기부터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들로서 일본인들이 떠난 후 노른자위땅을 지키는 임시관리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친일 이후 친미로 넘어가면서 기득권을 유지한 것이다.




밀려나는 사람들과 모여드는 사람들.



밀려나는 사람들


서울이라는 도시 형성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를 이룬 곳이 경공업분야라고 할 수 있다.

즉 봉제공장과 같은 경공업이 가장 먼저 산업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곳이 바로 평화시장이다.

경공업은 개발독재시절 중요한 산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태일이 분신한 평화시장은 그런 개발독재 과정에서 열악했던 노동환경을 보여준다. 또한, 세운상가 등 다양한 아파트형 공장과 상업시설이 만들어지면서 주변 청계천 판자촌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삼양동 및 성남으로 밀려났다.


어떻게 보면 주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경우 정비한다는 이유로 밀려나갔다. 그리고 특히, 광주대단지 사건은 개발독재시절 가난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준다.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998805.html


모여드는 사람들


우리는 왜 신문기사에 부동산광고가 많고 왜 법조타운 주변이 부촌이 되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전문직의 집단 거주지를 형성되는 과정 속에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은 어떤 생활권을 형성하면서 만들어지는지 볼 수 있게 된다.


기자촌이라는 곳이 있다. 은평구 진관외동 175번지 일대에 있던 마을로, 당시 박정희 정권이 1969년 기자들의 집단 거주마을을 조성한 곳이다. 명목상으로는 기자들의 월급으로는 최저 생계도 유지하기 어려워 정부에서 마련한 것이라고 하지만 언론을 길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서울에 법조타운을 예를 들어보면 강남에 중앙지방법원 등 주요 법원이 있고, 목동에 남부지방법원, 마포에 서부지방법원이 있다. 이처럼 강남과 목동과 같은 곳에 위치한 법조타운 주변에는 어김없이 고가 주택이 즐비하다. 신기한 것은 일반 공무원들과 달리 사법 공무원들은 그들 공무원 월급으로 살 수 없을 만큼 고가 주택에서 산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역시 엘리트 계급으로 키워지기 위한 고가의 쪽집계 학원가로 보내며 관리되고 있다.


왜 우연처럼 부동산 가격이 높은 곳에 유독 전통 있는 중고등학교와 학원들이 몰려 있을까? 그리고 학교 주변에 몰리는 부동산 수요와 함께 형성되는 부의 흐름. 여기서 공통점은 모두 친일 자본과 연관이 많다. 사실 강남개발을 하면서 대부분 오래된 중고등학교들이 따라 이전했다. 사실 내가 다니던 대일고등학교는 성북구에 있었지만 양천구로 이전하게 되었다. 상식적으로 새로운 학교가 들어서면 될 텐데 왜 옮겨 갔을까?


결국 오랜 학교 이전을 통해 신도시의 수요도 높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의 교육 카르텔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들 지역의 높은 집값과 학원들은 자신과 자식들을 위한 장벽을 세워 놓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기득권을 만들었고 그들만의 성을 쌓고 있는 것이다.





명동에서 시작하는 문화의 싹


코로나 기간 동안 명동의 많은 상가들이 문 닫았으나 최근 코로나를 벗어나면서 조금씩 활기를 찾고 있다.

그러나 과거 한국사회에서 명동은 유행이 시작되고 돈이 모이는 곳이었다.  

명동에는 낙랑 클럽과 영락교회 서북청년단의 역사만 있는 곳이 아니다. 이곳에서 어떤 이는 우리 문화를 위한

시작을 했고 어쩌면 한국이 문화강국이 되는 기반이 되었다.


예술인들의 아지트 동방싸롱

동방싸롱  당시 1955년 35살의 청년 실업가 김동근은 6.25 전쟁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민족의 피를 팔아 벌었기에 돈을 가치 있게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이해랑 선생의 조언으로 가난한 문인을 위한 공간 조성을 하게 되었는데 동방문화회관이란 이름으로 만들었다. 그는 1층에는 카페 , 2층 작업공간 , 3층 모임공간으로 구성했고 그 당시 명동에서 문예싸롱과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그 시절 문예싸롱은 시인 모윤숙 서정주, 소설가 김동리 황순원, 평론가 조연현 등 문단 실세들이 모인 곳이었던 반면 동방싸롱은 자유분방한 예술인들이 모였다.


https://www.ehistory.go.kr/page/view/movie.jsp?srcgbn=KV&mediaid=52&mediadtl=321&gbn=DH&quality=W&page=1


가난한 문인들의 안식처 은성주점

또한, 명동에서는 가난한 문인들의 벗이 되어준 은성 주점이 있다.

은성주점은 최불암 선생님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1986년 작고)께서 운영하던 곳으로 돌아가신 후 외상장부에 암호로 되어 있어 돈을 받을 수 없게 관리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은성주점은 세월이 가면이라는 박인환 시로 만든 박인희 노래로 유명하다. 술값을 갚지 못한 박인환은 노래가사를 쓰고 가까운 곳에 술을 마시는 가수 현인을 불러 노래를 불렀고 은성주점을 운영하던 이명숙 여사는 눈물을 흘리며 돈을 갚지 않아도 좋으니 그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OKEkkDCJ70



문화를 키워온 오비스케빈 등.


오비스 캐빈은 1970년대 생맥주집으로 유명한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던 곳이다.

당시 오비스  캐빈에는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서유석 등  인기가수가 공연을 하기도 했다.

오비스 캐빈은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생맥주, 통기타, 청바지가 모두 있는 곳으로 당시 대학생들에게  오비스캐빈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s5we&logNo=220819985097

과거 청년문화를 키워온 오비스캐빈이 있었고 1990년대 청년문화를 키워온 주역은 민들레영토가 있었다.

청년들이 주로 다니면서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가던 시대가 이후 2000년 이후 급속히 대기업 위주 프랜차이즈가 자리 잡으면서 청년문화가 사라졌다.

대부분 청년들은 그들의 길을 스스로 도전하지 못하고, 안정적 직업에 매달리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그런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세대 기본적 삶을 유지하기 어렵고,  인문학적인 가치를 가질 여유가 없었기에 노예적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우리 시대 어른은 과거의 청년문화를 다시 현재 청년들에게 알려주고 그들의 소통 문화를 다시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역할일 수 있다.







우리는 기억이 사라진 서울사람들에게 기억을 다시 남기는 길위의 인문학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민들레영토 지승룡 대표와 함께 하는 길위의 인문학은 작년 충무로, 종로, 명동일대를 다니며 그 장소에 얽힌 이야기들을 정리했고, 이번에 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기억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때 비로소 공동체가 시작된다는 평범한 개념을 실천해보고자 합니다.

다음은 길위의 인문학 진행했던 메타버스로 접속해 들어가면 그동안 다녔던 과정 동영상과 책과 관련 정보가 있습니다.


https://app.gather.town/app/AxdN0IRRtCWcMpO8/Human_on_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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