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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나무 Dec 18. 2022

종묘사직과 3.1 혁명 역사길

과거 역사 속에서 오늘을 생각한다.

역사 속에 살아가는 우리


우리는 과거 역사 속 완성된 이념을 만들고 그 본질이 퇴색되고 몰락하고 이런 몰락에 대한 반성으로 새로운 움직임이 싹트고 기존 틀을 깨트리고 사회 진화를 이룬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 걸음씩 나아간 사회를 만든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우리는 과거보다 조금씩 발전된 세상을 만든다. 그러나, 한편 세상이 진보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 대중들은 각각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도 있고 미래를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과거 속에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살고 있지만 공통된 기억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함께 기억하며 기억공동체를 이루는 방법으로 길 위에 인문학을 시작하려고 한다.


종묘를 소개하는 도시문화연구소 지승룡 대표

도시문화연구소 지승룡 대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속 역사적 맥락을 알기 쉽게 잘 소개해주셨다.

지승룡 대표는 수년간 서울이라는 도시 속 길을 따라서 만나는 역사를 찾고 정리해 왔다.

지승룡 대표의 소개로 우리는 종묘에서 익선동, 인사동에 이르는 길에서 조선의 시작과 끝 그리고 무너진 왕정시대와 식민지를 겪은 민중들이 스스로 공화정을 시작하는 혁명 흔적들을 보게 된다.




조선 정신이 담긴 사당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왕가 사당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조선 정신을 상징한다. 우리가 흔희 사극에서 "종묘사직"이라는 표현을 많이 듣는데 종묘가 조선의 정신을 상징한다면, 사직당은 곡식을 말하고 경제를 상징한다.즉 조선이라는 국가 틀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둥은 정신과 경제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종묘에는 역사적으로 후대에 정해주는 종과, 조로 끝나는 왕만 모셔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업적을 남긴 광해군은 친명배금(명을 섬기고 떠오르는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앞세운 인조반정으로 폐위됨에 따라 종묘에도 모셔지지 못한 왕이었다. 그럼에도 광해군은 최근에서야 그가 해온 개혁과 주체성이 드러나고 있어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그를 폐위시킨 인조반정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우리가 역사 속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후대와 후손의 평가를 두려워해야 한다.

사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인조반정 공신이던 김자점의 직계 후손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명분이 없었다는 생각을 한다.


인조반정은 남인과 서인이 북인을 몰아내기 위한 성격이 강한 반정에서 일종의 역사적 반동을 보게 된다.

종묘는 조선의 정신이었지만 종묘 입구에는 고려에서 주체성을 지키려고 한 공민왕 신당을 모심으로 인해 주체성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런 반면 임진왜란 때만 해도 개혁 성향의 남인으로 서해 유성룡, 이순신 장군이 활약 했지만 임진왜란 이후 남인은 인조반정으로 개혁보다는 사대주의 조선 사회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파벌과 패거리 문화가 커질 때 본질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을비 오는 종묘를 답사하는 회원분들  


종묘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가을비가 내린다. 가을비 내리는 종묘를 걸으면서 여러 가지 상념이 머리를 스쳐간다. 본질을 지켜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엄숙한 종묘를 거닐면서 생각하게 되면서 조선초 종묘를 만든 정도전과 같은 혁명가들의 초심을 생각하게 된다.


혁명이란 마치 누에고치 속 애벌레가 성충이 되어가며 변화의 껍질을 깨고 나온 것과 같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키워온 기존 틀을 깨는 것이 혁명이라고 할 수 있듯 분명 조선 왕조의 시작은 고려라는 틀을 깨고 나왔다. 그래서인지 조선 건국의 정신이라고 할수 있는 종묘에는 그들이 깨고 나온 껍질이라 할수 있는 공민왕 신당이 모셔져 있다. 우리는 종묘를 둘러보면서 고려왕조라는 껍질을 깨고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의 사상을 느낄수 있다.



서순라길 대각사와 독립운동


종묘를 나오면서 종료를 둘러쌓은 순라길을 만난다. 순라길은 순찰을 다니는 길이다. 동쪽을 동선라길, 서쪽을 서순라길이라고 한다. 우리는 서순라길을 지나면 1911년 만들어진 대각사라는 작은 절을 만날 수 있다.


대각사는 우리가 잘 아는 만해 한용운 선생, 김구 선생이 관련이 있는 절이다. 그분들은 본질적으로 이곳 주지스님이신 용성스님의 제자이며 정신을 이어간 승계자로서 모두 독립운동에 삶을 바쳤다.


이러한 역사와 달리 그 당시 많은 종교가 친일이었던 반면 용성스님은 달랐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불교사찰이 4대문 안에 들어올 수 있게 하고 결혼이 가능한 대처승 제도로 불교계 환심을 샀다. 그렇기에 일제강점기 대부분 종교가 친일이었으나, 대각사의 용성스님은 만해 한용운과 함께 3.1 운동을 주도했다.

용성스님과 대각사

이시절 독립에 힘을 모은 대각사, 그리고 천도교주 , 승동교회는 종교가 다르지만 서로 한마음으로 서로 도움을 주면서 3.1 운동을 준비하였다. 이중 동학을 주도했던 천도교가 가장 재정과 인력면에서 규모가 컸고 교세가 가장 컸다고 한다. 천도교는 조선사회 근대화를 위한 첫길을 스스로 열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어린이라는 용어가 나온 배경은 하늘이 곧 사람이라는 평등정신에서 시작되었다.

천도교당을 소개하는 지승룡 대표

3.1 운동 또는 3.1 혁명이라는 이름 정의에 대해 뒤늦은 논란이 있다.

운동은 움직임이고 혁명은 전환이다. 어떤 면에서 움직임을 통해 전환으로 이뤄졌기에 어떤 관점으로 이야기하는가에 따라 용어가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조선왕조와 일제 강점기를 겪는 민중들이 임시정부라는 근대식 정부를 만들었던 역사를 3.1 혁명이라고 해석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저항의 상징이던 정세권 한옥


국가든 조직이던 어느 순간 초심이 낡고 본질을 잃고 나면 힘을 잃어버린다.  조선은 그렇게 기득권 중심의 국가가 되었고 그 기득권은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외세에 의존하면서 나라 팔아먹으려던 기득권 중에 이완용 같은 인물이 나왔다. 아무리 높은 권세를 누렸던 이완용도 후대에는 무덤조차 남지 못하였다. 그러면 이완용은 일제강점기 무엇을 했을까?  이완용은 일본 근대식 주택을 짓는 건축 업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완용 문화주택에 대항한 민족기업인 정세권 선생을 이야기하려 한다. 서순라길을 지나면 멋스러운 한옥 카페들을 만나게 된다. 몇 년 전부터 익선동 한옥들은 카페로 바뀌면서 젊은이들에게 인기 높은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울에 있는 작은 규모 한옥들의 유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대부분 서울시민들은 익선동 한옥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매우 적을 것이다.


익선동 한옥들은 일제 강점기 3.1 운동에 공감했던 기업인 정세권 선생이 기획한 저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문화주택으로 돈을 버는 부동산 업자가 된 이완용은 문화주택을 만들어 사람들의 탐욕을 부추기며 돈을 모았고, 우리의 전통은 모두 사라질 상황이 되었다. 어쩌면 그 시절 문화주택사업은 우리가 오늘날 뉴타운처럼 전통과 우리 문화에 대한 기억을 삭제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던 것 같다. 민족반역자 이완용의 문화주택이 늘어나면서 사업가 정세권은 다른 생각을 했다. 문화주택에 대응하는 한옥을 지어 보급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성공을 거두어 익선동 일대 100여 채의 한옥이 만들어지고 오늘날 우리가 한옥을 기억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업가 정세권의 한옥 분양사업은 친일 권력에 대한 항거이자 저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인사동의 유래


인사동은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 집안 골동품에 대하여 밖으로 내다 팔던 개울가의 장터였다.

그런 장터에서 파는 물건이 대부분 족자 혹은 고가구다 보니 현재도 그런 전통적 골동품 파는 곳으로 인사동이라는 지역은 상징성을 가지게 되었다.


인사동에는 당대 <심청전> 감독으로 데뷔한 이경손 감독이 1928년 9월에 만든 카페가 있었다. 영화 밀정에도 나온 카페로 카카듀라는 카페인데 프랑스혁명을 시절 혁명가들이 이용하던 카페에서 따온 명칭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나라 잃은 지식인들, 독립운동가들이 비밀리 만나는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현재는 그 흔적도 찾기 어렵게 되었지만 인사동은 조선 망국과 고뇌하던 지식인들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


영화 밀정의 한 장면

인사동에는 유명한 관훈갤러리가 있다. 관훈 갤러리 건물은 100년 된 건물로 독일 산부인과 병원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관훈갤러리는 매주 수요일 작품 전시와 경매를 하였고 오늘날 인사동 화랑시장은 매주 수요일가장 활발하게 미술작품을 거래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반면 화요일이 가장 사람이 적은 날이라고 한다. 


인사동은 역사를 알고 걸어본다면 골동품 만큼이나 오랜 시간의 가치를 느낄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운형 선생과 승동교회

 

우리 일행은 승동교회를 향했다. 승동교회는 인사동길에서 서울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근처에 있다. 탑골공원에는 원각사지 9층 석탑이 있는 곳으로 과거 스님들이 많이 살고 있어 승동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런 스님들 동네에 들어선 교회가 승동교회인 것이다. 승동교회는 조선에서 두 번 째 개신교 조직교회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전도사로 있던 교회다. 여운형 선생은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을 세운 언더우드 박사의 제자이기도 하고 승동교회의 전도사였다. 언더우드 박사는 헐버트 박사 등과 함께 한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헐버트 박사는 한글에 깊은 애정을 가졌듯 언더우드 박사는 조선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본국에서는 언더우드 박사를 못마땅해 했고 일본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스트레스로 암에 걸려 사망했고, 이에 대해 분노한 여운형 선생은 독립운동의 불씨를 키우게 되었고 숭동교회는 3.1 혁명의 불을 지핀 곳이 되었다. 3.1 혁명은 천도교와 불교뿐 아니라 여운형 선생이 전도사로 있던 승동교회까지 함께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3.1 혁명은 여러 곳의 임시정부를 만들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


우리는 마지막 여정으로  태화관과 함께 조선중앙일보 건물(현재 농협건물)을 지나 자유당 시절 정치강패였던 김두환이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문 설렁탕에 들렸다. 이문설렁탕집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현재농협 건물로서 과거 조선중앙일보 건물 모퉁이를 돌아가야 한다. 조선중앙일보는 여운형 선생이 운영하던 언론사로서 일장기 훼손 사건의 원조로서 신문사가 폐간되었다. 


여운형 선생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


이처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여운형 선생은 중도에 속했고 당시 민중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지만 이승만 정권 이후 군부 극우정권을 오래 지속하면서 오히려 좌익처럼 여겨지면서 언급조차 하기 힘든 시대를 보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그의 업적에 대한 균형 있게 평가 할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2022년 11월 방문한 종묘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성혁명을 하고 새로운 나라의 정신을 담았다면 서순라길을 통해 인사동으로 가는 길은 조선이 망하고 나서 조선 백성이 일제 식민에서 독립된 공화국 시민이 되는 과정과 정신의 여정이 담겨 있는 길이다. 그날 지승룡 대표와 함께 길 위에서 찾은 인문학을 다음 영상에 기록했다.  


https://youtu.be/qee5Q9icIT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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