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본 우리 시대 인문학 야학의 필요성
올해는 5월 18일 44주년입니다. 다음은 5월 18일 대중집회에서 길 위의 인문학 측면으로 발언해 본 내용입니다. 길 위의 인문학을 통해 서울에 숨겨진 근 현대 역사를 찾아 길거리를 걸어 다니다 보면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2022년부터 지금까지 걸어 다닌 서울의 골목길은 인문학 강의실이자 일종의 야학입니다.
제가 이렇게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미래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작가 조지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과거를 제대로 통찰하고 반성해야 하고 그런 바탕에서 미래가 바뀐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로부터 44년 전 1980년 5월 18일 대한민국 광주에서 신군부에 맞선 민중항쟁을 기억하려 합니다. 그중에서 피로 물든 광주에서의 시민군으로 활동한 두 분의 야학 선생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바로전날인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국무회의 비상계엄전국확대가 8분 내 의결되며 새벽 1시 계엄포고령 제10호가 발령되었습니다.
신군부는 정권 보위 목적 충정계획으로 광주를 목표로 7 공수부대를 비밀리에 전남대와 조선대에 천막을 미리 설치했고 5월 17일부터 공수부대는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을 연행하고 폭행했습니다.
5월 18일 아침 10시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든 200여 명 학생들이 학교에 진을 친 공수부대를 향해 항의를 하자 공수부대는 진압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렀습니다. 오후 4시 7 공수 22대대는 강제진압으로 스물네 살 청년 청각장애인 김경철을 구타해서 살해했습니다.
5월 19일 오후 4시 50분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계엄군이 최초로 발포에 고등학생 한 명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5월 20일 광주는 분노의 도가니였습니다. 이날 혜성처럼 나타난 전옥주, 차명숙 두 여성이 방송차량으로 마이크를 잡고 수천 명의 시위대를 새벽까지 이끌었습니다. 그날 저녁 10시 반 광주역에서 3 공수부대로부터 시민을 향햔 발포로 다섯 명 이상 시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스피커로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끝나는 순간 공수부대는 집단발포로 이어졌습니다. 시위대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해 시민군이 되었고, 항쟁의 불씨는 화순, 나주, 함평,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등에 확산되었으며 자발적 시민군들은 늘어났습니다.
이때 노동자 야학을 표방한 백제야학 손남승 선생님도 자발적으로 시민군 본부였던 도청으로 가서 시민군이 되었습니다. 들불야학의 윤상원 선생님도 시민군으로 참여했습니다. 두 분 모두 젊디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손남승 선생님은 함께 미래를 약속할 여인이 있었고, 윤상원 선생님은 먼저 불의의 사고로 죽은 여동지의 들불야학을 이어가는 중이었습니다.
윤상원 선생님은 시민군대변인으로 매우 논리적이고 차분한 대응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각지에서 도청으로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은 스스로 질서를 지켜내며 해방구를 열었습니다.
도청에도 최후의 날인 5월 27일이 왔습니다.
탱크와 헬기로 무장한 계엄군의 화력은 압도적이었고 계엄군의 공격으로 시민군대변인이었던 들불야학 윤상원 선생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손남승 선생은 그곳을 피해서 도망처 나왔습니다. 생사가 갈린 길에서 살아남은 손남승 선생은 백제야학으로 돌아와서 1980년 12월 학생들과 함께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을 무대에 올렸지만 살아남았다는 자괴감에 518 유공자도 신청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을 지키다 죽음을 맞이한 윤상원 선생님에 대해 일 년 반이 지난 1982년 2월에 들불야학을 창시하고 안타까운 사고로 먼저 죽은 박기순 선생님과의 영혼결혼식을 맺어졌습니다. 그때 나온 영혼결혼식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칼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라고 했는데 잘못된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통해 깨우치고 본질적 변화를 하지 못할 경우 또다시 같은 비극은 반복하게 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계엄군의 총이 아닌 검찰의 수사왜곡과 공정하지 않는 법치를 통해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생각하고 말할 자유를 겁박당하고 대중들에게는 언론의 왜곡된 기사로 비판을 못하게 하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경쟁교육을 통해 계급화된 구조속 노예로 길들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비극인 이태원참사, 최해병 사건등 이채양명주로 나타나는 수많은 비극적 사건의 본질은 수직적 권력구조 문제에서도 비롯됩니다.
저는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윤석렬 정권만 퇴진되고 나머지 구조가 변하지 않는 채 새로운 엘리트 기득권이 가면을 쓰고 또다시 대중을 속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저는 광주 5.18 민중항쟁 이후 87년 체제 이후에도 변하지 못한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자 합니다.
도청을 지켜온 두 분 야학선생님이 민중들에게 주려고 한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린 배움과 공정한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한 수평적 권력구조사회였을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서는 사회구조 전환이 필요합니다.
본질적 사회구조 전환의 시작은 유럽사회에서 1968년 시작된 68 혁명입니다. 우리도 유럽이 변한 것처럼 대학서열도 사라지고 일정 학습능력만 인정된 누구에게나 모든 대학에 입학이 가능한 구조적 차별이 사라진 교육전환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우리 사회 차별은 아이들의 교육부터 시작해서 특정대학과 특정 직종만 혜택 받는 카르텔사회를 만들고 나머지 대다수 민중들은 생존경쟁이 일상화된 노예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서울대출신 엘리트 검사가 대통령이 되고 정부 주요한 요직 70프로를 특정한 대학에서 모두 싹쓸이한 한국사회를 맞이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의 탐욕과 무능을 봤고 엉망진창 후퇴하는 사회를 보고 있습니다.
혁명이란 구조를 바꾸고 계급을 무너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사회가 동력을 얻어 발전하고 진화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속에서 과연 그런 사회가 가능한 거야?라고 스스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유럽사회는 50년 전 일인데도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 우리를 멈추게 하는 사슬을 스스로 끊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광주의 시민군들처럼 누군가에 의해 명령받고 손발이 되는 것이 아닌 각자가 주체가 되는 사회전환의 불씨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시대 시민들의 과제이자 소명입니다.
오늘 우리는 5.18 광주 시민군으로 처절하게 싸운 야학선생님이 추구하던 배움의 가치를 이어가려 합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 계신 모두는 1980년 5월 광주 도청을 지키는 시민군이고 야학선생님인지 모릅니다.
저는 비록 기술노동자로서 삶을 살고 있지만 인문학이 사라진 한국사회에 탐욕이 자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시대 야학이라면 인문학을 되살려서 젊은 세대와 시민모두에게 시대를 보는 눈을 뜨게 하고 역사를 살아가는 개인으로 본질적 변화를 위해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제 살아있는 여러분이 야학선생님이고 주변을 깨우치도록 함께 행동하도록 했으면 합니다.
광주 망월동이 묻힌 5.18 영령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그 시대를 겪고 두려움과 트라우마로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께 위로를 드리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