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대의 경험을 이어갈 수 있나?
우리는 촛불혁명과 빛의 혁명과 같은 시대의 경험을 이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전체주의 교육을 받았지만, 삶 속에서 민주주의를 경험으로 받아들인 세대의 생각이 교육 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과거 이명박 정권시절을 거치면서 교육과 언론이 서열화 구조를 갖추면서 젊은 세대의 극우화가 이뤄졌다. 우리는 서구사회 68 혁명의 사회 흐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는 빛의 혁명에서 서구 사회 68 혁명 이상의 본질적 철학적 통찰을 통해 교육 개혁, 사회개혁이 모두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광장에서 만들어낸 가치와 경험을 교육 속에 담아내어야 한다.
그동안 언론이 마사지한 이미지만 보다가 생방송 토론에서 본 젊은 정치인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우리 사회 언론은 이준석이라는 젊은 정치인을 마치 청년리더인 것처럼 만들어낸 이유는 언론을 움직이는 권력이 이준석이라는 젊은이를 내세워서 갈라 치기를 하고자 했다고 의심이 든다.
즉 이준석이라는 젊은 정치인의 의지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언론과 검찰을 움직이는 세력의 얼굴마담으로 젊은 정치인이 필요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에 언론은 박근혜 정권부터 젊은 정치인 이준석을 띄워준다.
사람들은 그가 하버드 대학교를 나왔다는 이력 때문, 그가 거침없이 말한다는 것으로 환호하기도 했었다.
젊은 20대 남으로 대표되는 청년들은 사회에서 역차별당하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이준석을 따르기도 했다. 그런 언론플레이와 펨코라는 커뮤니티의 지지는 사실 대다수 청년을 대표하지 않는데도 그를 청년을 대표하는 정치인 이미지로 만들어냈고, 실제로 많은 20~30대 남성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이준석 같은 젊은 정치인에게 기대를 했던 유권자가 이번 대선토론에서 이야기 한 혐오발언은 토론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고 놀라움과 경악을 하게 되었다. 관련 내용은 글로 쓰기도 힘들어서 생략하고자 한다.
문제는 이런 현상을 만들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우리는 본질적 고민이 필요하다.
이준석으로 대표되는 젊은이들의 경쟁의식을 만든 것은 언론 탓만 할 수 없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한국사회 서열화 된 교육제도 문제이고, 경쟁교육 속 자라난 그들의 부모 세대의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은 식당에서 중년 부부들이 이준석이 하버드 출신이라는 것과 똑똑하다는 것을 소재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던 적 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의 판단기준이 본질과 가치추구가 아닌 학교 서열에 의해 그 사람의 말의 비중이 달라진다. 이처럼 한국인들의 관념에는 그가 나온 대학의 서열에 따라 사람의 능력을 판단한다.
그런데 그것이 맞는 기준일까? 에 대한 질문은 고사하고 서열구조를 만들어 내는 구조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비판의식도 못하고 있고 서열에서 밀린 사람들 조차 서열구조를 인정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서열구조에서 낮은 대학을 나오면 주눅 들게 된다. 사실 우리의 평가기준으로는 인간이 가진 지극히 일부 능력만 평가한다. 그리고 심지어 기술발전에 따라 과거 평가기준에 의한 능력평가가 맞는지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문제는 사람들의 다양한 능력을 평가할 수 없는데도 획일적 산업시대 평가 기준으로 만든 서열구조는 창의성 등 다양한 능력을 키우지 못하고 사회적 발전을 가로막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서열구조는 이명박 정부시절 강화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일제고사로 전국석차를 만들고 오늘날에 이르렸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부터 아이들은 소고기 등급처럼 1등급, 2등급, 3등급 등으로 나눠진다.
그리고 낮은 등급 아이들은 그 등급을 인정하는 습관을 익히다 보면 사회에 나와서도 그 서열에 따라 살아가면서도 불만을 갖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의 등급으로 만들어진 서열과 게임에서의 아이템과 점수로 서열이 만들어지고 그런 서열을 인정받도록 배운다. 그러니 그런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일베와 펨코와 같은 커뮤니티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열구조에 적응된 젊은이들은 전체주의를 추종하게 된다. 결국 극우논리를 따라가게 되고 이러한 아이들이 추종하는 대상이 이준석이었고 의식은 과거에 머물게 해서 일종의 파시즘 전체주의 사고관을 가진 아이들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과거 전체주의 사고관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만들어갈 미래는 사실 두렵다.
한국사회 젊은이들에게 불행은 과거의 사고관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결국 높은 서열 대학 나오고 신체 나이는 젊지만 그들은 일류가 경험했던 끔찍한 과거 전체주의 시대의 사고관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젊은이들이 문명발전의 역사를 알고 그 역사의 흐름에서 발전을 이어가야 하지만, 기득권으로 오랫동안 재력과 권력을 가진 지금은 80세 넘은 사람들이 과거의 사고관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교육제도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과거의 생각으로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젊은 세대가 진심 걱정이 된다.
얼마 전 뉴스타파 보도에서 확인된 리박스쿨을 통한 초등학교 돌봄선생들이 아이들에게 극우의식을 교육시키는 경우도 이러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이들은 댓글 공작도 했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는 어릴 적부터 아이들의 생각에 이승만 박정희라는 파시스트와 같은 정치인을 추종하게 만들며, 파시즘 국가로 회기 하기를 조장 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40대, 50대의 중장년층 역시 전체주의 교육을 받았지만, 독학으로 삶 속에서 근현대의 가치를 배웠고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학교교육 밖에는 경험할 수 없고 특히, 기득권 언론과 미디어, 커뮤니티의 조작 속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중장년 층은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몸으로 체득한 경험으로 축적된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무형의 경험들은 우리의 공동체에서 정규교육과정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젊은이들에게 이어지지 못했다. 즉 경제성장, 민주화와 문화를 성장시켜 온 40~50 대는 삶의 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느라 그들의 자식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오히려 보수적인 교육현장에서는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남아서 아이들의 생각을 가르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준석 같은 정치인에 대해 주류언론은 젊고 합리적이라고 포장했지만 사실은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탐사보도에서 나온 기사를 통해 확인한 명태균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칠불사에서 새벽 4시 매화를 심는 등 일본주술 행위라고 밖에 해석할 수밖에 없는 행위를 보면서 한국사회 보수 정치인들의 키워드인 친일과 과거 전근대의 주술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의 대선 TV 토론에서 전 국민이 함께 분노하기도 했지만, 일부는 환호했다고 생각한다.
이준석 씨의 토론 방식에서 젊은 강남부모들이 아이들을 유학 보내기 전에 특별 과외공부로 가르치는 디베이트(debate) 토론이 생각났다. 말하자면 토론기술을 가르치는 것인데, 워낙 오랫동안 주입식 교육만 받은 한국아이들이 유학을 가면 말벙어리가 되어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속성 토론 과정을 배운다고 한다.
그런데, 그 토론 방식에서 본질을 놓친 채 잘못 배우면 토론할 때 상대를 특정하게 프레임을 좁혀서 공격을 하는 말싸움 방식이 될 수 있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 전체를 보지 않고 특정 부분으로 프레임을 좁히면 상대를 몰아붙이기 용이해진다. 문제는 이런 방식을 매번 되풀이하면 어느 순간 과거의 발언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즉 큰 숲을 보지 않고 나무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사실 언론 보도방식도 매우 유사하다. 특정 프레임을 짜고 그 안에서 상대를 공격한다.
실제로 어떤 커뮤니티에는 준적준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준석의 적은 이준석이라는 이야기로 그의 과거 발언이 어떤때는 자신의 발언을 공격하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도 겪을 수 있는 일이다. 특히, 한국사회처럼 토론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하면 상대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답하는 것이 아닌 서로 자기주장만 하다가 말싸움으로 끝나기 쉽다. 가치 추구와 같은 목적의식 없이 상대를 말싸움으로 이긴다는 목적만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이준석이라는 한 명의 정치인만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많은 젊은이부터 중장년층까지 한 번도 학교현장에서 토론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본질적 토론을 하는 방식에는 더하는 토론이 필요하다. 상대의 말을 듣고 비판적으로 수용하지만, 상대의 옳은 주장은 수용하고 나의 주장을 더하면서 큰 숲을 완성해 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런 경우 우리는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 어떤 이는 헌법재판소 합의를 공산당이라고 비판하는데, 합의에 대한 의미를 이해 못 하는 것이다.
합의의 원리는 비판적 수용을 통해 코끼리 다리를 만지면서 서로의 의견을 종합해서 코끼리를 완성해 가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토론이라는 개념은 여러 관점을 통합하여 본질을 찾아가는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건전한 토론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나는 내란 이후 집회에서 발언하는 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광장 속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위안을 받았다. 어떤 젊은이는 스스로 만든 유튜브 영상으로 자기의 삶을 공개한다. 택배노동을 하면서 광화문과 여의도 집회 왔다가 집에서 고양이 돌보는 일상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을 그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과거 서구 68 혁명세대 젊은이처럼 디양성을 존중하고 함께를 강조하면서도 매우 창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젊은이들이었다. 우리는 어쩌면 제도권 밖 청소년들로부터 미래 희망을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오히려 서열화 교육에 물들지 않은 다양성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정부가 해야 할 어려운 과업 중 하나는 서열구조에 대한 파괴라고 생각한다. 모든 공무원 조직과 사회, 무엇보다 교육현장과 교육제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미 유럽사회는 1968년부터 바뀌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시민 대중들의 외침도 필요하다. 우리 세대부터 이 왜곡된 서열과 차별 이데올로기의 고리부터 바꿔내야 한다.
우리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재가 중요하다. 인재는 결국 시대정신을 알고 다양성을 발현해 내는 협력할 줄 아는 사람이다. 지금의 위기는 우리 교육의 처참한 현실 때문이라는 것을 새로운 이재명 정부는 알아주고 교육개혁을 실천해주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