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변화(3)
아이를 가졌을 때 내가 가장 보고 싶어했던 사람은 엄마였다. 코로나가 극성인 때여서 가족끼리 만나는 것도 조심하던 때였다. 나는 수시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시답지 않은 하루 일과를 보고했다. 아직 아이와 함께 있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 혼자인 것만 같을 때 전화기를 켜서 가장 먼저 전화를 하는 사람이 엄마였다. 여전히 난 놀라거나 무서울 때 ‘엄마!’하고 무의식적으로 엄마를 먼저 찾는다.
출산을 2주 남겨놓고 부모님이 나를 보러 지방에서 올라오셨다. 집에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도와주시고, 식사를 함께 하고 하룻밤을 잔 후에 두 분은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셨다. 그게 출산 전 마지막 만남이었다. 헤어질 때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가 두 분과 헤어진 후에 오래도록 엉엉 울었다. 남편이 당황해할 정도로. 출산을 앞두자 딱 30년 전 나를 낳았던 어린 엄마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설레고 두렵고 무겁고 커다란 어떤 마음이.
아이가 태어나자 더더욱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 작은 몸뚱아리에서 작고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었을 때. 말갛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웃어줄 때. 작고 말랑한 손으로 내 손가락을 꽉 쥐면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 엄마도 나를 보며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에게 내 목숨을 줄 수 있다고 느낄 정도로,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가졌을까? 지금도 나를 이만큼 사랑하는 것일까?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남편을 보면서 시부모님의 마음도 조금은 헤아리게 되었다. 특히나 내 아이는 남편을 닮은 아들이었기에, 때때로 감동스러우리만큼 마음이 아이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찰 때, 어머님이 남편을 기르면서 이런 마음을 가지셨겠구나. 시어머니에게 남편은 이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이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곤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쉽게 화를 내곤 했다. 애기 자는데 굳이 설거지를 해야 돼? 밥 먹기 전에는 우유 주지 말랬잖아. 구석에 먼지가 이렇게 많네. 애기 오기 전에는 이런 데도 먼지 닦아야 해요. 엄마의 마음을 짐작하면서도 나에게는 늘 아이가 우선이었다.
먹다 뱉은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응가가 손에 묻어도 대변을 잘 봤다는 사실이 기쁘고, 하루종일 쫓아다니며 이런저런 수발을 들고… 부모님도 내게 아무런 댓가없이 해주었을 그 돌봄을, 나는 노쇠한 부모님에게 돌려드릴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그러니 부모님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나를 이렇게나 사랑해주셨겠구나, 아니 지금도 이렇게 사랑하시겠구나. 그 큰 마음을 짐작하고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그 큰 사랑을 받은 대로 돌려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나 역시 내 아이에게 효도받을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아이를 키우며 했던 고민과 고생을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다. 내가 준 가없는 사랑을 돌려받길 바라지 않는다. 아이가 스스로 서서 자신의 길을 찾고 그 길을 소신있게 걸어간다면 나는 너무나 만족할 것이다. 내게 온 때로부터 독립하기까지 그 빛나는 순간들을 지켜본 기쁨으로 충분하니. 그건 아마 나의 부모님도, 남편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