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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에녹 Jul 22. 2024

흠뻑 젖은 책도 책이다



서울, 수도권 '물 폭탄' 계속되는 장마


요즘 하루걸러 비가 계속 내리는 듯하다. 하늘이 맑아졌다 금세 구름 끼기를 반복. 비가 온다는 말에 우산을 챙겼다 허탕 친 날이 생기기도 한다. 오락가락 급변하는 날씨에 기상청 사람들도 속수무책. 장마철만 되면 낮과 밤도 없이 기상 계기판만 쳐다보신다는데 예측을 벗어나는 건 사람 마음이나 날씨나 쉽지 않나 보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를 즐겨 듣는다. 잘 시간도 아닌데 일찍 잠자리에 누워 창문을 열어놓고 잠에 들기도 한다. 인터넷상에서도 얼마든 빗소리를 찾아 들을 수 있지만 실제 듣는 빗소리를 스피커가 이겨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장마 시즌만 되면 내 방 창문은 검지 손가락 길이만큼 늘 열려있다. 그 틈으로 들어오는 반가운 소리 손님을 맞이한다.


비에 대한 애정을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빗소리를 즐기는 사람은 많아도 비 맞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더라. 나는 그 드문 사람 중 한 명이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부리나케 우비를 챙겨입고 밖을 나선다. 후두두둑. 우비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촉감이 피부에 닿을 때면 간질거리는데 그 촉감을 좋아한다. 왜 샤워할 때 샤워기에 쏟아지는 물을 가만히 맞고 서 있을 때 있지 않나. 그와 비슷하다.


그런데 한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새벽 배송으로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수도권에 물 폭탄이 떨어졌던 날. 언제 도착했는지도 모른 책들이 새벽 내내 우리 집 앞을 지켰겠다. 복도식 아파트에 살고있는 나는 집 문과 하늘이 이어져 있어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복도가 다 젖고 만다. 책을 감싸고 있던 포장 재료는 비닐이 아닌 종이박스. 아뿔싸 내 책!


가위를 꺼낼 새도 없이 박스를 찢는다. 촤르륵. 난도질당하고 있는 박스 위로 아침부터 두려움 가득 찬 눈빛으로 쏘아대는 한 남성. 손에 힘줄이 올라오는 걸 볼 새도 없이 책의 안전 여부를 확인한다. 다행히 시집 한 권은 비닐에 쌓여있어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중. 그러나 그 책 아래로 구명조끼 하나 없는 책 한 권이 숨을 헐떡거리며 익사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꽤나 두꺼운 책이라 책의 모든 부분이 손상되지는 않았다. 모서리 부분들이 물에 상하긴 했지만 반품을 할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열심히 말려서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어 드라이로 말려본다. 종이가 물에 닿았다 바람을 만나니 쭈글쭈글해지더라. 뜨거운 바람으로 말려서 그런가 색도 좀 그을린 거 같기도 하고. 그 와중에 책 제목이 인상 깊다.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그래, 구겨지더라도 너는 책이다.


그을리고 구겨진 책을 한동안 계속 읽었다. 어렵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는데 마음에 남는 글들이 많았달까. 좋은 문장에는 밑줄을 긁고 다시 읽고 싶은 글은 접어두고 생각이 다른 부분은 내 생각을 기록하고. 책을 깨끗하게 읽는 편은 아니어서 이곳저곳 내 흔적들을 남겨둔다. 다 읽어갈 때쯤 이 책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책이 돼버린다.


거기에 장맛비에 흠뻑 젖고, 말랐다가, 구겨진 안쓰러운 종이들마저 이 책을 더욱 남다르게 만들어준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젖은 채로 받게 된 책. 열심히 말려 물기는 없앴지만 물의 잔상은 남게 된 책. 나의 의도로 책이 상한 건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특별하게 보이는 건 왜일까.


내 탓이 아닌 장맛비에 책이 흠뻑 젖어 구겨진다해도 시간이 흐르면 아름다워 보일 수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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