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감정의 정의와 동작 그 원리에 대해
도덕 감정은 스스로를 감시하는 의식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선 슈퍼에고라는 말로 취급되는데. 접두사 super엔 '초월'의 의미가 붙어있다. Supervise에 '감독하다'의 의미가 있는 걸 생각해보면 도덕 감정은 인간 사고의 감독관 정도의 의미를 붙여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마음속의 감독관은 인간 사고를 관찰하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그런데 무엇이 옳고 그름인가? 복잡한 현실 속에서 그걸 단순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칸트 선생이 예전에 깔끔한 명제를 찾아냈다.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남에게 행하는 것' 쉽게 풀면 객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만약 행하는 대상이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
도덕 감정은 사건의 객관성의 확보를 체크하고 그에 따라 긍정적인 느낌과 부정적 느낌을 자아낸다. 부정적이라면 부정하거나 비난하고 싶어지고 긍정적이라면 통쾌하게 느끼거나 뿌듯함을 느낀다. 단순하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유전자는 이기적이라고 하지 않는가? 객관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유전자 레벨에선 각 개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원칙이 더 오래전부터 세겨져 있다.
따라서 도덕 감정을 가진 개체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도덕 감정적 사이에서 갈등을 가지게 된다. 배변의 이익을 스스로 거부하면서 변비에 걸린 개를 생각해보자. 야생의 개는 그렇지 않지만 가축으로서의 개는 비둘기처럼 똥을 하늘에서 갈겨버릴 수가 없다. 개는 학습을 할 수 있는 고등 포유류이며 주인이 원치 않는 곳에 똥을 싸면 기겁을 한다는 것도 처벌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배변훈련을 통해 학습한다. 이건 주변에서 찾기 쉽고 이야기하기 편한 사례라서 나는 좋아한다. 우리 인간도 이런 이유로 변비를 겪고 말이다. 개는 배변을 하고 싶다는 지극히 개체적 욕망의 해소를 도덕감정의 감독하에 진행하게 된다. 그러다 주인 되는 인간의 학습이 엄격했다면 개는 배변을 거부한다. 이렇게 도덕 감정이 동작한다. 가축이 되고자 했던 개는 도덕 감정을 학습할 수 있음을 증명할 때 인간의 비상식량이 아니라 동반자가 될 수 있었고 그렇게 우생학적 선택 끝에 현재의 도덕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인간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도덕 감정을 가지는 동물은 오직 포유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자연계를 지배하는 명제는 '동작하느냐 동작하지 않느냐' 더 거칠게 말하면 '이기느냐 지느냐가'같은 단순한 인식이지. 옳으냐 틀리냐 같은 고등적 판단이 아니다. 쳇바퀴 돌듯이 날고 손바닥을 비비다가 초파리 트랩에 갇히고 자기가 먹는 게 독인지 똥 인지도 모르는 파리랑은 비교할 수 없는 고등적 기능이다. 이런 최신의 기능들은 뇌 시스템에서 가장 최근에 진화된 대뇌를 요구한다. 대뇌는 뇌의 바깥쪽에 있는데 이는 스트레스나 피곤 등에 의해 쉽게 기능이 약화 수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원시 기능(인류가 파충류나 어류이던 시절에 발달된 기능)에 비하면 인간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구속력이 약하다는 뜻이다. 파리도 가지고 있는 자율신경계는 심장을 움직이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인간의 도덕 감정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다. 이것은 유연하게 학습되고 유연하게 적용되는 도덕감정의 속성을 가리킨다.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으니까 내로남불 또한 가능하다.
도덕 감정에서 말이 안 되는 부분을 생각해보자. 자연계에선 유전자 풀의 복제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조금씩 때론 극단적인 속도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그 역사의 단위는 유전자 풀이었고 진화의 역사의 대부분은 유전자 풀을 구성하는 각 개체들의 지질한 투쟁으로 점철되어있다.
도덕감정의 발견은 지질한 역사에 최초로 반기를 들고 다른 개체의 이익을 자신의 의사결정의 변수로 두게 만든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거대한 힘을 중화시키려면 그에 상응하는 힘이 작용을 해야 하지 않는가 그 정도의 힘이 도덕에 있었단 말인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도 못하는 도덕 감정에 말이다. 인간이 가축화시킨 동물들은 역사도 짧으며 비교적 낮은 도덕감정의 결합정도를 가진다. 걸핏하면 사람 물어뜯는 게 개니까. 좀 더 높은 수준의 도덕 감정을 찾으려면 역사가 훨씬 길고 구축 과정도 자연스러운 영장류에서 그 원리를 찾는 게 나을듯하다. 바로 영장류 사회다.
영장류 사회에선 힘을 가진 우두머리는 늘 모든 동물들이 다 그렇게 하듯 모든 자원을 독점하려고 든다. 그리고 나면 나머지 불만을 가진 몇 유력한 수컷들은 힘을 합쳐 이 우두머리를 끌어내린다. 그러면 암컷이나 음식에 접근할 권한은 비교적 동등하게 (도덕적으로) 배분된다. 그러다가 다시 새 우두머리는 자원을 독점하려고 들것이다. 자신의 지배가 강고해질수록 도덕적 행동의 이익보다 개체의 이익을 탐할 요인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시작과 이기적인 종말. 이것은 모든 정치든 기업활동이든 가정의 지배든 인간적 운동에서 보이는 공통의 패턴이다. 모든 운동의 주체들은 기존 질서(기득권)를 해체하는 도덕적 지향점을 가지고 시작해 종장엔 자신만의 독점적 권리를 성립하는데 에너지를 쓴다. 이 패턴은 자원을 배분하는 시스템을 가진 모든 사회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패턴이므로 자명한 진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뇌가 작은 원숭이 조차도 공평과 정의에 해한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도덕 감정은 궁극적으로 자원에 접근에 대한 수단이다. 자원에 접근하여 생존하는 것이 생물의 궁극적 이익이란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때문에 우리가 앞서 가졌던 의문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거대한 힘을 중화시키려면 그에 상응하는 힘이 작용을 해야 한다.'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 이것이다. 도덕적 행동이 우리에게 자원의 접근을 가능케했기 때문에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한다. 그러지 못할 때 우리는 도덕을 저버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덕적 리더를 추종한다. 최종장엔 배신당한다. 그럼에도 괜찮다. 그 리더가 없었다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니까. 더들리 스티븐슨 사건(난파한 배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합의하에 벌인 식인은 정당한 행위였다고 판결한 법원과 피소자들을 지지한 여론)의 사례는 우리의 도덕 감정은 결국 먹고살고자 존재하는 거지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지지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고 쓴다. 인간 역사 동안 가장 오랫동안 읽힌 것은 신화와 종교경전이었고 비교적 그리고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사용된 우화나 동화가 알 수 없는 중간에 있고, 그리고 개인을 다룬 소설은 돈키호테를 기준으로 400년쯤 될 것이다. 개인의 역사는 매우 짧으며 절대적으로 우리를 지배한 것은 신화, 종교적 설명, 동화란 건데, 어릴 때부터 그것으로부터 지겹게 읽는다. 옛날 사람들이라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다 읽다 보면 그 이야기는 모두 다 똑같은 이야기다. 이것은 현존하는 최고위의 도덕적 기준을 제공하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이야기고, 개체의 이익에만 탐하는 비도덕적인 개체를 징벌하는 이야기다. 도덕적인 인간이 승리하는 이야기다.
과학이 사회를 설명하는 주류 방법이 된 이후 이런 이야기는 정말로 이야기로서 껍데기만 남게 되어 보잘것없는 허구가 되어버렸지만. 인간 전체의 역사를 따지면 대부분의 인류는 그 설명을 허황된 꿈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에 대한 권위 있는 설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렇게 인간들은 옳은 것과 틀린 것의 기준을 학습했고 이는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선과 악이 명백하여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여 혐오할 것과 증오할 것 그리고 응원할 존재로 구조로 분류가 가능한 시나리오의 영화를 본다. 시온주의를 정당화하는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그걸 세계인이 보고 유대인들도 본다. 그렇게 학습이 이뤄진다. 뭐든 좋다 체제를 선전하기 위해 요란하게 깃발이 흔들렸던 소비에트 영화도 영혼 보내기의 대상이 되는 페미니즘 영화도 미국 백인이 세상을 구하는 영화도 마찬가지다. 만드는 사람의 도덕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 담겨있고 그걸 수용하는 사람이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문화 인류사 연구에서 언제나 단골로 등장하는 폴리네시아의 부족 경제에선 족장들은 부의 축적을 영속화하는 것을 노리는 대신 끝없이 재화를 배분하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 대신 족장들은 부족원들에 대한 심리적 채권을 기반으로 족장으로서의 사회적 신분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도덕 감정이 지배하는 질서가 언제나 집단에 의한 우두머리의 교체라는 한정된 패턴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노래임을 보여준다. 도덕 감정은 착함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뇌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선과 질서에 대한 광대한 이야기이다. 공동체의 재산에 대한 관점, 공동체가 인정하는 결혼의 형태, 모든 이슈에 대해 공동체의 감각(도덕률)이 이 보이지 않는 선을 그음으로서 공동체를 묶어놓는다. 그것이 가진 투명성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다.
누가 계약서에 쓴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깨어질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해외에 게이 퍼레이드가 끝나고 나면 성시화 대회라는 걸 한다고 하는데 corrupted 된 것을 정화한다는 그 감정은 기독교만이 독점하는 감정이 아니다. 그들이 거리로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로마노프 왕조를 총으로 죽게 만들었을까? 바로 도덕 감정이 빗어낸 분노고 분노는 집단적 압력으로 표현된다. (이때 집단적 압력이 선택되는 이유는 집단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독점하는 우리 머리의 교체, 교실에서 조직에서 혼자 잘난 척하는 인간에 대한 핀치, 미국의 참전에 의한 독일의 패망. 모두 집단 압력이 독단적 개체를 끊어내는 모습이다.
도덕 감정은 우리를 투명한 선으로 묶고 그 선의 범위에 따라 다양한 행동을 유발한다. 어떤 이는 우리보다 저열한 수준이지만 도덕 감정을 학습할 수 있는 코끼리나 개를 우리와 같은 공동체로 봄으로서 동물권 보장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어떤 이는 국가란 경계선을 넘어 전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고통을 기준으로 커뮤니티를 정의하려고 하기도 한다. 다르게 묶이는 범주마다 다양한 도덕적 행동 감정의 행동 양식이 산출되며 이것을 이행할지 안 할지는 각 개체에 달리게 된다.
물론 그렇게 확장적으로 묶이는 선에 반대해 더 가시적이고 좁게 엮으려는 시도도 있다. 생명에서 포유류로, 포유류에서 개로, 개에서 인간으로, 인간 세계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인종으로, 인종에서 동네로, 동네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자기 자신에게. 범위를 너무 좁게 잡으면 도덕 감각은 파충류 시절에 유효했던 생존전략을 변호하는 도구가 되고 (ex: "살기 위해 죽였다", "사회는 존재하지 않다"라고 말한 마거릿, 각자도생) 범위를 넓게 잡으면 개체의 주체적 권력의지와 욕구를 없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부정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ex: 남녀는 같다고 믿는 여성주의자, "암도 생명이다", 캣맘, 1인 독재를 낳은 소비에트)
도덕 감정이 다양하게 동작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카테고라이징(분류작업)이 매우 유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때그때마다 다른 것이 개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일반적으로 좋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표리 부동한 이유는 그게 이익의 최적해이기 때문이다. 일관성은 예측이 가능함을 뜻하고 예측되는 것은 곧 가치가 떨어진다. 먹이 도덕 감정에 충실한 채 무지한 채식을 하다 보면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규칙 없이 앞에 주어진 것을 먹는 사람은 그런 위험을 피할 수 있다. 한국은 전쟁 때 전 세계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렇게 베푸는 나라는 아니다. 이념이 도덕적인 경쟁을 할 때 미국은 자유무역의 전도사처럼 행동했지만 지금은 보호무역의 전도사다. 세계 민주주의 공동체의 이익이 아니라 개체로서의 미국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해야 할 시점에 왔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리가 바뀌면 그 사람의 지배자로서의 면이 드러나 낮은 자리에서 노출되던 특성을 발견할 수 없게 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섬겨지는 이유도 동일하다. 수컷 원숭이가 힘들게 반역을 해서 좋은 자리에 갔음에도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에 쫓겨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모든 도덕적 공세가 끝난 후 극단적인 개체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시점에 그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폴리네시아의 공동체처럼 지속 가능한 균형을 완성해낸 케이스는 소수다. 게임이 안정적일 땐 협력을 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아 시너지를 만드는 전략이 우세하지만 불안정할 땐 단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그때그때 다른 전략이 우세해진다.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이야기가 여기서 나온다.
앞서 로마노프 왕족이 어린아이까지 모두 총에 맞아 죽은 것을 언급했는데, 폴리네시아의 사례처럼 '좋은 시스템'은 개체의 이익 추구가 주변 구성원들을 황폐화시킬 때까지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폴리네시아의 부족들처럼 끝없이 잉여 이익을 분배하고 구성원들의 불만을 잠재워야 한다. 수컷에게 생식은 가장 중요한 이슈인데 역사적으로 볼 때 일부일처를 보장하고 지도층의 일부다처제를 제한할수록 사회는 안정화된다. 생식을 하지 못하는 수컷은 커뮤니티의 선을 좁히기 시작하고 이는 곧 범죄와 혁명으로 이어진다. 강간 같은 행동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강간은 하는 동물은 영장류를 넘어 자연에서 널리 볼 수 있다. 생식을 하고 책임의 도덕 감정에 짓눌린 수컷들은 상대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로마 사회나 로마노프 러시아나 오늘의 한국이나 다를까.
소외된 개체의 일탈적 선택을 왜 이야기했냐면, 도덕 감정을 포유류가 지배적으로 사용하게 된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덕 감정으로 통제되는 시스템이 도덕 감정이 배제된 시스템보다 유전자 풀의 생존에 큰 이익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동물별로 도덕감정의 양상은 여러 가지 예를 생각해보자. 영장류는 사회를 구성한다. 사회가 주는 이익이 워낙 크기 때문인데, 그 정도가 엄청나기 때문에 무리를 이룬다면 포식자를 이 길 정도다. 침팬지라면 퓨마에 물린 동료 침팬지를 손으로 때려 무력화하는 건 충분했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퓨마는 침팬지랑 싸우는 것보다 홀로 떨어진 침팬지를 찾는데 주력할 것이다. 집단생활을 통해 포식당할 확률을 떨어트리는 초식동물의 행태도 이렇게 설명된다. 예외적으로 인간의 포식자는 인간이었고 인간의 적은 커뮤니티 밖의 다른 커뮤니티였다. 이때 공동체 힘은 개체로서의 인간을 압도한다. 비교적 낮은 결합 강도를 가진 유목민족은 모두 농업 부족에게 멸망당했는데 이는 협력의 힘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꼭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인간은 도구를 활용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에 비해 너무 효과적인 살해 능력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내전만으로도 파멸적인 결과를 낳는다. (우두머리 영장류가 부족 하나하나를 죽이려면 지쳐서 자기가 먼저 죽겠지만 도구를 가진 인간은 급소를 찔러 5초에 한 명은 죽일 수 있다.) 간혹 뉴스에 나오는 인간의 흔적은 있으나 인간은 없는 유적지가 바로 그렇게 멸망한 케이스다. 폴리네시아 케이스처럼 지속 가능한 자원배분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도덕 감정을 가진 동물들에겐 필수였다.
공동체, 결합, 협력이 중요한 건 알겠다.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도덕 감정이 왜 중요한지 설명하려고 하는데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협력을 위해 영양가 있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게 필수적이고 공동체 유지에는 도덕 감정이 필수다.
우두머리 자리를 뺏고 빼앗기는 영장류 사회의 이야기를 했다. 영장류들도 같은 종끼리 전쟁을 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나 인간은 그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전쟁을 한다는 사실을 주지해주기 바란다. 전쟁은 각 개체의 이익과는 동떨어진 집단 단위의 생존을 위한 동원령이다. 도덕감정의 결합이 높을수록 더 강력한 동원이 이뤄진다. 도덕감정의 한 범주인 민족주의의 열정이 절정에 이른 1차 대전은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이었다. 운송기술의 발전이 그것의 한축을 담당하긴 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쟁에 참여하는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그들은 지배자의 이름만 바뀔 뿐인 중세의 전쟁에서 차출돼 살아서 돌아가기만을 빈 농노들이 아니었다. 근대국가의 시민들은 교회로부터 미디어로부터 철저히 적의를 효과적으로 학습했고 전쟁에서 이겨 악을 징벌하기를 희망했고 그들의 사유재산과 가족을 지킬 수 있기를 희망했다. 민족주의는 국가가 효과적으로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이었다.
반면 도덕감정의 연대가 느슨한 초식동물들은 포식자와의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회피를 선택하고 동료의 죽음을 슬퍼할 뿐이다. 인간은 도덕 감정을 활용하는 데 있어 첨단에 있는 종족이다. 전쟁을 회피하고 아군을 배신하는 수컷은 극형을 피할 수 없다. 전쟁에서 승리한 구성원들은 자원의 재분배를 적극적으로 주장할 권리를 얻게 되고 좋은 원시 사회는 그들에게 여성과 식량을 배급했다. 현대적 사회라면 돈이 될 것이다. (물론 그들도 돈으로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기 때문에 노동을 한다. 그런 기대를 저버린 인간은 힘들여 노동하지 않는다. Quite quitting, 사토리 세대 모두 이러한 감정적 구조에 기인한다.)
그럼 전쟁의 사례에서 도덕 감정이 한 역할은 무엇인가? 도덕 감정은 국가라는 커뮤니티를 상상하고 그에 대한 책임감을 만들어낸 뒤 이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개인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여기는 것뿐만 아니라 병역을 행하는 모든 이들이 탈영을 비도덕적 행위로써 감시하도록 만들었다. 나아가 도덕 감정으로 움직이는 군대는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 혹은 폭압으로 움직이는 노예 부대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시민 징병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는 도덕 감정을 잘 활용하고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도덕감 정도 결국은 자원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임을 잊으면 안 된다. 배급도 존중도 충분한 도덕적 동기부여를 받지 못한 군대는 징병제라 해도 모두 공동체에 충성하기를 포기했고 그런 군대를 가진 나라는 모두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런 사례를 보면 도덕 감정은 공동체를 구성할 때 서로의 행동을 적절한 수준에서 구속한다. 이 구속은 보이지 않을수록 더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CCTV 보다 자기 자신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이 더 강력하다. 공산주의 비밀경찰들은 파멸적인 힘을 발휘한 이유를 생각해보자) 이런 질서에선 서로가 개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객관적인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도덕감정의 기본적 양식이 우리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간식을 혼자 먹는 건 얌체가 되는 것이고 우연으로 얻은 부에 대한 세금은 정당하게 여겨지고, 자기 부서가 만들어낸 성과가 아니지만 자신들에게도 성과급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원시사회에 살았던 인간의 뼈를 분석해보면 의외로 머리의 골이 깨져서 죽는 경우가 많이 발견된다. 아무리 강한 개체라도 사회에 살아야 하고 그렇다면 적대적인 개체와 떨어질 수가 없다. 잠 중에 머리통이 깨지는 건 강한 개체나 약한 개체나 한순간. 이것은 인류가 역사의 대부분을 머리통이 깨질 수도 있다는 위험 속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초대한 도덕적으로 행동하면서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을 중요한 생존의 미션으로 삼게 된다. 타인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이익은 취해선 안되고 취했다면 그 영광만 누리고 잉여자원은 나눈다. 자신이 너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리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적절히 자신을 구속한다. 이것이 현생 인류 사피엔스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원시시대의 핵심적인 도덕적 압력이다. 농경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들이 한 번에 다 사라진 것도 아니며 도시에서도 여전히 그 흔적들은 발견할 수 있다. 방의 중앙보다 구석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과 문을 열 때 침대가 바로 보이는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그것이다.
도덕 감정은 소규모의 조직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동작한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는 것이 도덕적 압력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폴리네시아 같은 작은 섬에 사는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인구의 성장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오랫동안 현대의 학자들이 그들의 삶의 형태를 연구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사회생태계를 보전할 수 있었다. 반면에 서로를 기억할 수 없는 도시에선 도덕의 결합이 약해지기 시작하고 계약, 규칙과 법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그 흔적을 쉽게 찾을 수가 없게 되는데 그럼에도 이야기를 통해 배우고 가정에서의 따뜻한 환경에서 우리들의 몸에 밴 도덕 감정은 우리에게 어색한 부조화를 느끼게 한다. (만약 광화문 한복판에서 5천만 명의 손에 의해 길러진 아기가 있다면 그 아이는 도시의 환경을 전혀 어색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아이는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겠지만) 기억할 대상도 없고 상호 호혜적으로 동작하지 않는 도덕은 메아리가 될 뿐이다. 도덕 감정은 공허를 유발하고 동료에게 당연히 행해야 할 선행은 뉴스거리가 된다.
기억 말고도 조건들은 더 있다. 규칙이 있음을 스스로가 체감하는 것이다. 사회를 실감하는 것인데 보통 이런 것들은 집단 행사와 공통된 의복, 함께하는 식사가 동반된다. 만약 이런 규칙을 거부하고 다원화된 사회를 존중하는 것만을 유일한 교리로 삼는 사회에선 규칙이 동작하지 않게 된다. 이럴 땐 규칙이 없는 사회에 대한 반동으로 근본주의적 종교, 파시즘적인 정부의 정책을 통해 규칙이 없는 일관된 규칙이 없는 사회를 통제하고자 시도가 시작된다. 규칙과 혼돈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하고 여기서 중요한 건 규칙이 있는 곳에 도덕 감정이 있단 것이다. 규칙을 지킬 때 우리는 의무를 충족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규칙을 어길 때 처벌의 두려움을 느끼고 다른 사람이 규칙을 어기는 것을 볼 때 분노를 느낀다. 규칙이 없을 땐 해방감이 먼저 오고 잠시 뒤 공허가 온다.
도덕 감정은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일을 해왔다. 계약에도 없지만 먼저 행하는 베풂도 특정 민족에 대한 학살도 모두 도덕 감정에 기인하여 출발된 일이다. 도덕 감정 없이도 얼마든지 일은 시킬 수 있다. 명령체계에 의해 영혼 없이 일하는 공무원? 그것도 가능하다. 기부와 학살도 마찬가지다. 세액공제를 통해 기부를 유도하거나, 학살 명령을 거부하는 군인을 총살하는 것으로도 학살을 유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피동적인 수행보다 도덕 감정에 의한 수행이 특별한 이유는 더욱더 인간을 간절하고 효율적이고 진정성은 자발적인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부양의 도덕 감정 잡힌 사람은 오래 일한다. 도덕 감정을 일과 연관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든 떠난다. 그래서 신용을 평가하는 할 때 홀몸보단 부양할 사람이 있는 사람이 점수가 더 높다. 그의 어깨에 올라간 부양의 도덕 감정이 행동 예측 가능성을 보증해주기 때문이다.
개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개는 착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도 기본적으로 개처럼 착하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개보다 먼저 인간의 스스로에 대해 가축이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축의 첫 번째 조건이 있다면 주인 되는 사람에게 복종하고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을 것일 것이다. 강형욱도 무는 개는 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덕에 문명화된 사회에선 공격적인 말을 하는 것은 천박하게 여긴다. 따라서 문명화는 공격성을 세련되게 숨길 수 있는 사회를 뜻하기도 한다. 요즘 여기저기 사회를 흔들고 다니는 PC운동의 핵심은 말에서 도덕 감정적 수사를 배제하여 중립적인 말을 쓰게 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덕에 요즘은 공격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인간 스스로가 인간의 가축이 되었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이다. 뭐 어쨌든 인간은 착하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인간은 착한 일만 하진 않는다. 분명 헌법엔 좋은 말만 가득할 텐데. 머리통이 깨질 것을 두려워했던 고대의 인간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근대에 쓰인 헌법은 굉장히 도덕적이며 인간 생명에 대해 근엄한 존중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헌법에 의해 통제되는 군대도 그 평화롭고 치안이 좋다는 한국에서 시민을 학살하지 않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관련하여 다큐를 본 적 있는데 결론은 군인들을 잘 삶아 구웠다는 것이다. 광주에서 총을 쏜 군인 또한 도덕적인 인간이다. 판타지 속 광기에 휩싸인 버서커가 아니다. 따라서 통수권자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라는 명령이 도덕적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동기를 부여하는데 실패하면 인간은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대개 명령을 거부하고 하늘을 보고 총을 쏘거나 오히려 학살당하는 측에 돌아서는 방법으로 명령을 거부한다.
통수권자가 인간의 본성과 부딪치는 일에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상대가 먼저 도덕적이지 않은 행동을 했으므로 그것에 상응(어떤 사람이라도 돌을 맞으면 보답하고 싶어질 거다)하는 보복 해야 한다고 하거나, 상대를 체제를 전복하려는 자본주의자, 공산주의자라고 하거나 그들이 반역의 핏줄을 가지고 있다고 하거나 그들의 식민지배의 전력을 가진 조상의 후예라고 하거나. 그 민족이 저지른 테러로 인해 우리 민족이 피해를 보았다고 하거나. 아시아의 미개함을 우리가 가서 정화시켜야 한다느니. 역사를 보면 그런 편협한 사고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난 앞서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묶느냐에 따가 질서가 생겨나고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도덕 감정이라고 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질서를 선택하고 그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을 해야만 하는 요구를 받게 된다. 이 작업이 깔끔하게 이루어지면 기존에 비이성적인 질서도 이성적인 질서가 되고 불의가 정의가 되고 혼란이 질서가 된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유연한 사고 뒤에 벌어지는 프로세스다. "배신 분자를 처단하라" 같은 명분으로 벌어지는 군인의 민간인 학살, "가족끼리 왜 이래?" 계약을 결정하는 임금협상에서 등장하는 가족, 생명보다 국가의 명예를 선택한 1차 대전 민족주의자, "맞을 짓을 했으니 때렸다" 학교폭력범들의 마음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
질서의 전복적 해석은 나쁜 일에만 한정되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 커뮤니티는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은 자라고 했고 간디는 폭력을 비폭력으로 상대하라고 했다. 성공한 혁명은 사람이 굶어 죽는 위기에서 발생한다. 그들이 굶게 된 원인은 귀족들의 착취인 이유가 대부분인데 귀족들은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평민들은 이 질서를 어기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시스템을 구성한다. 그렇게 철저한 질서 속에서 혁명이 등장하는 건 마음속에 심어진 두려움보다 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하고 굶는 것이 더 두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우선순위를 가지는 도덕 감정이 생길 경우 아무리 강고한 질서라도 무너지게 된다.
여기까지는 도덕 감정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과 그 발현의 양상에 대한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을 했다. 다음엔 자본주의 시대, 더 나아가 도시에서 도덕 감정은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우리가 활용해야 할 도덕감정의 지향점은 무엇인지. 좀 더 현실적이고 사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