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연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박사과정
중노년층을 타깃으로 한 게임을 만들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을 담은 "제론토루딕 매니페스토(Gerontoludic Manifesto)”를 소개한다. 게임 디자인과 관련한 이야기지만, 중노년층과 관련된 영화, 드라마, 광고 등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한 번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한 이야기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행복한 노년의 삶에 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놀이'는 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지지만, 놀이를 추구하는 '유희성'은 나이와 상관없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 분야를 중심으로 중노년층 게이머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밥 드 셔터(Bob de Shutter)와 공동 연구자 베로 반덴 아비엘(Vero Vanden Abeele)은 2015년 인류학 & 노화(Anthropology & Aging) 저널에서 "제론토루딕 매네페스토"(Gerontoludic Manifesto)를 발표했다. 뜻을 그대로 풀어서 해석하자면, "중노년층의 유희적 삶을 위한 위한 성명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명서는 중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게임을 만들 때 고려해야 할 사항 세 가지를 담고 있는데, 발표한 지 5년이 지났지만 현재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 유용성보다 재미
이 성명서는 중노년층과 게임, 그리고 게임 연구가 그동안 유용성(usefulness)과 접근성(accessibility)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으로 시작한다. 연구자들과 게임 디자이너들이 이 두 가지 요인에만 집중했던 것의 이면에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인지능력, 체력 등의 감퇴로만 여기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이렇게 노년의 시간을 '감퇴하는' 시기로 보는 시각 때문에, 게임 플레이를 통해 인지능력, 체력을 향상해 치매 등의 질환을 예방한다거나, 노인들의 감퇴한 인지능력을 보조할 수 있도록 게임에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거나 하는 주제가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다.
어린 시절의 '놀이'는 발달 과정에 필수적인 활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중노년층과 '놀이'를 연결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많은 게임 디자이너와 연구자들은 "게임이 중노년층에게 주는 혜택이 무엇이 있을까?"와 같은 외적 동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놀이의 본질은 내적 동기인 '재미'(playfulness)에 있고, 이는 중노년층에게도 다르지 않다. 인간의 삶의 모든 단계에서 놀이는 중요한 활동이며, 놀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우는 국제적인 협회, "빨간모자협회"는 50세 이상 여성들이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놀이를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단순한 오락 이외의 목적을 가진 기능성 게임(serious game)은 특정 기능을 향상하는데 유용할 수 있지만, 노년층을 위한 게임을 기능성 게임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놀이의 본질을 해칠 수 있다.
2. 쇠퇴보다 성장
게임과 나이 듦(aging)을 연결할 때는 쇠퇴보다는 성장과 성숙(growth over decline)을 강조해야 한다. 생애 주기적 관점에서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성장과 쇠퇴, 두 가지의 과정으로 본다. 생의 초반에는 얻는 것이, 생의 후반에는 잃는 것이 더 두드러지게 느껴지지만, 사실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은 인지 기능과 기량을 증가할 수 있다. SOC모델(model of selective optimization with compensation)에 따르면, 사람들은 한 영역에서의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다른 영역에서의 여러 전략을 통해 효율적으로 기능을 유지한다. 중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게임을 만들 때에도 지적인 도전을 키운다는 게임의 본질을 고려해야 하며, 접근성 향상에 대한 명목이나 인지능력 감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나치게 게임을 단순화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면 나이로 비롯한 변화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세울 기회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쇠퇴나 감소보다는 '성장'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도전하기를 원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며 연습하고 본인들의 능력을 보존할 수 있다. 노인들은 살면서 축적해온 경험에 의지할 수 있다. 이들에게도 '도전'은 가장 중요한 플레이의 동기이다. 게임을 만들 때, 노화에 따른 감퇴를 반영해 불편함이 없도록 인터페이스를 설계해야 하지만, '도전' 자체는 인위적으로 줄여서는 안 된다.
3. 고정관념보다 다양성
위의 두 가지 주장을 접한다면, 이 성명서는 중노년 게이머 중에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성명서가 노화로 인한 인지, 신체 능력의 감퇴를 부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이와 관련한 여러 문제는 물론 젊은 세대보다 나이 든 세대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어떤 연령이 되면 자동으로 감퇴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80세가 60세보다 더 신체적으로 건강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생의 하반기는 모두 쇠퇴하는 시기를 겪고 있다고 공통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개인 간 차이를 강조해야 한다. 버틀러는 노인에 대한 차별과 고정관념을 '연령 차별주의'(ageism)라고 정의했다. 중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게임은 이러한 연령 차별주의의 덫에 걸리기 쉽다. 노년을 감퇴의 시기라고 단순히 일반화시키게 되면, 노년의 삶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갖게 된다.
우리가 흔하게 범하는 잘못된 가정 중의 하나는 나이가 비슷하면 게임 플레이어들이 비슷한 능력을 가질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연령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중노년층도 신체적, 지적인 능력이 다양하며, 속한 문화에 따라 선호도도 다양하다. 또한, 살면서 축적한 다양한 경험은 해가 갈수록 더 큰 차이를 만든다. 삶의 시간 동안 사람들은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것들을 배우며, 다른 도전을 하게 되고,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다르게 반응하게 된다.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다른 가중치의 비율로 나이를 먹는다. 그래서 오래 산 사람들일수록, 그들은 더 많이 다르다.
게임이 일반적으로 인종과 성별에 대한 포용력을 갖추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다양한 유형의 중노년층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게임은 중노년층에 대해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캐릭터들을 다루지 못하고 있으며, 중노년층 플레이어들에게 직접적으로 마케팅을 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중노년층 플레이어가 전적으로 게임의 인지적, 신체적 혜택 때문에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참가자들이 어떤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지 조사했을 때 거의 존재하는 모든 게임 장르들이 나왔다.
앞으로 이들을 위한 게임은 더 다양한 주제를 포괄해야 하고, 이들의 필요를 민감하게 반영해야 한다. 고정관념보다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얘기다(heterogeneity over stereotyping). 학계와 업계에서는 게임의 접근성 향상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명서의 두 번째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접근성 조정은 결코 실제 게임 플레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게임은 단지 나이와 관련된 감퇴를 예방하거나 완화하려는 목적으로만 마케팅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게임 연구자들과 게임 산업은 다양한 중노년층 플레이어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며, 노화에 따른 감퇴라는 주제 하나만을 강조해서는 안된다.
이 성명서는 더 넓은 공동체에 의해 더 많은 교류가 필요한 첫 단계이다. 저자들은 게임 디자이너, 연구자들이 토론하고, 더 많은 내용을 추가하는 것을 환영한다며, 이 선언문을 더 발전시켜 게임에서의 연령차별을 넘어서고자 한다고 밝혔다. mind
<참고 문헌>
De Schutter, B., & Abeele, V. V. (2015). Towards a gerontoludic manifesto. Anthropology & Aging, 36(2), 112-120.
이세연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박사과정 | 중노년 웰빙 및 게임 연구
어떻게 하면 IT기술이 시니어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지, 어떻게 서로 다른 세대를 연결시켜 줄 수 있을지 관심이 많다.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Games and Life Lab에서 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을 기반으로 노년층과 게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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