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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로브잣나무 Jul 27. 2021

노래의 역사 Part.1

2018-03-13에 작성된 글.

유치원을 다닌 이들이라면 대부분 했을 학예회나 종합발표회. 나는 늘 그 중심에 있었다. 너무 어렸을 적이라 그때의 느낌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무대에서 곧장 잘 뛰놀았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혼자 노래를 부른 첫 무대는 7살 때 유치원 학예회에서였다. 아마 동요 ‘나비야’를 불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보러 왔던 많은 학부모들의 칭찬을 받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어릴 적부터 여기저기 노래 부를 일이 참 많았다. 친척집에 가거나 학교에서 장기자랑을 할 땐 늘 내 이름이 불렸고 나는 흔쾌히 노래를 부르곤 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늘 좋았다.


“우리 슬기 엄마 닮아서 노래 참 잘하네.”

“슬기야 너 노래 정말 잘한다.”


본능적으로 나는 내 목소리의 가치를 깨달았다.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단지 내가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장기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회 같은 게 있지 않는 이상 굳이 연습이라는 걸 하지도 않았다. 노래에 대해 별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고 또 별 생각이 없었다.


학년이 조금 올라가서는 계발활동 동아리를 합창부로 들었다. 당시에는 악보를 읽을 줄도 몰랐고 읽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해서 그저 선생님이 쳐주는 음을 외워서 부르곤 했다. 늘 노래와 가까이 있었지만 그것을 탐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관련된 꿈을 꾸지도 않았다. 심지어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꿈을 쓰라고 할 때 썼던 건 늘 마술사, 탤런트, 만화가, 화가, 태권도 선수, 패션 디자이너 등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각종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아직 진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시기였는지라 엄마는 나를 노래 대회의 장으로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참여하게 된 나의 첫 대회는 교회에서 주최하는 성가 대회였다.


다니던 교회에서 예선을 치른 후 1차 합격자들에 한해 결선을 치르는 방식이었는데 구 지역 단위로 치르는 대회라 꽤 치열했다. 교회 대표를 뽑는 1차에서 1등을 했고 대회는 대회였는지 나는 작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꽤 수월하게 1차에 합격했기에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렇게 엄마에게서 노래 코칭을 받으며 꽤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지역 대회에서 입상을 했고 그때부터 나의 장래희망에 노래가 스며들었던 것 같다.


그즈음, 살던 아파트에서 축제가 열렸다. 이름하야 매년 가을마다 열리던 ‘은행나무 축제’. 1800세대 정도 규모의 아파트 단지 내에서 열리는 축제였는지라 그 규모가 꽤 컸다. 각종 먹거리들을 팔고 각설이 아저씨가 와서 엿을 팔았으며 광장에 무대를 설치해 장기자랑 대회를 열곤 했다. 다니던 초등학교가 그 아파트 단지 내에 있었기에 학교에서도 은행나무 축제는 큰 이슈였고 반 친구들도 장기자랑에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팀을 지어 한참 핫하던 그룹 원더걸스의 노래 ‘So hot’에 맞춰 춤을 추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 나 스스로 춤에 전혀 소질이 없다고 느낀 나는 자신감도 없었고 그다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안무 첫 연습 날 골반을 자연스럽게 돌리는 안무가 있었는데 그 안무가 어색하게 느껴졌던 나는 뻣뻣하게 통째로 골반을 돌리고 말았고 그 모양새는 무척 우스웠다. 결국 나의 몸치력을 이유로 그 팀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전혀 뜻밖의 경사로 이어졌다. 당시 유행하던 노래 중 김혜연 씨의 ‘참아주세요’라는 트로트 곡이 있었는데 간드러진 멜로디와 재치 있는 가사가 핵심인 유쾌한 곡이었고 나는 재미 삼아 그 곡을 부르곤 했다. 엄마는 내가 그 곡으로 대회에 나가길 바랐고 나 또한 좋아하던 노래였기에 그 곡으로 대회에 지원했다.


그렇게 펼쳐진 대회의 장. 장르에 상관없이 여러 참가자들이 나왔다. 춤추는 사람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각종 개인기를 하는 사람들. 다른 참가자들을 보며 나의 차례를 기다렸다. 축제 속에서 진행되는 거였기에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재밌어하는 곡을 불러서인지 몰라도 다른 대회들과 다르게 그렇게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찾아온 나의 차례. 촌스러운 보라색 겉옷을 입고 뿔테 안경을 쓴 12살짜리 아이가 무대 위에 혼자 등장하는 순간 아파트 주민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심지어 그때는 키도 작아서 더욱 귀엽게 보였을 것이다. 하하. 간단한 소개 뒤 나오는 유명 트로트 반주에 사람들은 더욱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부모님 앞에서 부르던 것처럼 재미있게 부르기 시작했다.


“뱀이다~아! 뱀이다~아!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뱀이다~아! 요놈의 뱀을 사로잡아~ 우리 아빠 보약을 해드리면~!”


조그만 여자아이가 이런 가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얼마나 웃겼을까! 심지어 구경하던 관객 층은 주로 중장년층이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 이유를 눈치채고는 더욱 간드러지게 부르려 노력했다. 가사에 맞게 표정을 익살스럽게 짓기도 하며 끼를 발산했다. 탁월한 선곡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수많은 어르신들의 환호를 받으며 내려왔다. 처음 받아 본 뜨거운 환호에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마음속에선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부모님의 얼굴. 연습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지게 해낸 나에게 칭찬을 해 주셨고 우리는 편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노래를 잘 해낸 것 같았다.


결과는 예상대로 무척 좋았다. 무려 대상이었다! 상으로 MP3를 받았고 나는 그것을 선곡과 연습을 도와주었던 엄마에게 선물했다. 수상을 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즐김’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즐김’을 한동안 잊고 살고 말았다. 그것의 중요성을 알기에는 생각이 어렸을뿐더러 노래를 하는 것에 대한 열망도, 자극도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도 많은 대회에 나갔지만 그저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을’ 뿐이었다. 각종 교내 외 동요대회, 교회에 다닐 때 까지는 성가 대회. 입상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참 재미있었던 기억이다.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몰려와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도 정말 잘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많이 졸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굳이 나의 노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즐기는 것도 잊었다.


그렇게 중학교에 진학했고 나는 여전했다. 그저 학교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목소리가 예쁜 아이였다. 슬슬 진로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되었고 나는 부모님이 등록해 준 영어학원과 수학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외교관이 되길 바라셨다. 사실 지금도 나는 외교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저 엄마는 당시 나쁘지 않았던 나의 영어 실력과 활발한 성격을 핑계 삼아 ‘좋은 직업’을 갖길 바라셨던 것 같다.


공부를 열심히 했고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그건 중학교 1학년 때의 이야기였고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부모님의 불화, 그리고 점점 어려워지는 공부 내용으로 인해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슬슬 미래의 직업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그때의 내가 유일하게 희망을 가졌던 건 조금이나마 재능이 있었던 노래였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허영이었다.


한참 대한민국에서는 <K-pop 스타>나 <슈퍼스타 K>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열풍이 불던 중이었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유명해질 수 있었고 나는 그들을 보며 솔깃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저 사람들 만큼 부르는 것 같은데. 한 번 해 볼까?’


마침 오디션 접수 기간이었고 나는 <슈퍼스타 K>에 지원했다. 1차는 전화 오디션이었고 그 오디션에서는 누구나 합격시킨다는 말이 있었다. 그랬기에 아는 노래를 하나 불러 지원했고 합격을 해서 몇만 명이 모인 오디션 장에 홀로 찾아갔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겁을 살짝 먹었던 게 기억이 난다. TV에서만 보던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과 경쟁해야 한다니. 넓은 스타디움에 펼쳐진 몇십 개의 부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나의 차례. 긴 대기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나의 차례가 다가왔다. 가요를 불렀다.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로 연습한 횟수가 적었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오디션 첫 단계에서 탈락되고 말았고 내심 기대했던 나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딱 그 정도였다. 불합격했을 때 받는 실망의 크기와 노력의 정도는 비례했던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비슷한 오디션을 또 한 번 보게 되었다. 당시 다니던 영어학원에서 친해진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도 노래 부르는 것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다. 오디션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와 함께 <K-pop star>에 지원해 보기로 했다. 나는 괜한 자존심 때문에 그녀에게 이전에 어떤 오디션도 지원해보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


그렇게 보게 된 오디션의 결과도 다를 바 없었다. 아무런 대책도 노력도 없었다. 노래를 즐겨 불렀지만 부를 때 즐기지 못했고 스스로 잘 부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너는 슈퍼스타 K 같은 오디션 안 봐?”라고 종종 물었지만 이미 첫 단계에서 떨어진 나는 얼굴을 붉히며 거짓말을 하곤 했다. “응. 더 준비되었을 때 보려고.” 고작 반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수준에 머물러있던 나는 내 목소리를 부러워하는 아이들에게 불합격 소식을 알리기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나만 알고 싶은 사실이다. 당시의 나는 대중매체에서 보이는 화려한 모습들을 보며 꿈만 꾸었고 그런 나의 과거가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랬던 와중에도 기억나는 노래가 두 개 있다. 그 시절 진심으로 불렀던 ‘나의 노래’ 들이었다.


part.2에서... 투비 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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