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트로브잣나무 Jul 27. 2021

집_1

2018-08-02에 작성된 글.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사건과 시간들이 나를 만들었지만 그중 현재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건 중학생 시절의 경험이다. 삶이 완전히 뒤바뀔만한 일들이 생겼다. 나의 꿈과 개인적인 정체성을 찾아낸 동시에, 여태 몸 담아왔던 가정의 형태가 순식간에 바뀌는 경험을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유년시절의 나는 흔히 '평범한 가정’ 혹은 ‘정상적인 가정’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자랐다. 엄마와 아빠는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비장애인으로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었고 그 둘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부모님의 부모님들 또한 모두 살아계셨고 건강하신 편이었다. 오빠와 나도 건강했으며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소년소녀가장, 한부모가정, 다문화가정, 장애인 부모 혹은 자녀를 둔 가정들은 그저 대중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안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내가 걱정할 거라고는 그저 학교 성적 문제,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뿐이었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외모 콤플렉스도 많이 없는 편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 문제들이 세상에서 제일 커다란 문제로 다가오곤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가난, 결핍, 죽음, 폭력, 차별 등의 단어들은 피부에 와닿지 않은 표현들이었으며 늘 나의 삶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런 단어들은 밝은 에너지와 시끄러움으로 가득 차 있던 나의 삶에 침투할 수 없었고 나는 그것들에 신경 쓸 필요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삶은 항상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계기는 없었다.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부모님의 싸움은 언젠가부터 서서히 잦아지기 시작했고 그 싸움들은 언젠가부터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강도와 심각성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떠올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건들을 떠올려낸다. 엄마 또는 아빠와 과거 이야기를 하게 되는 상황이 찾아오게 되면 “전 기억하기 싫은 건 쉽게 잊어버리는 편이라서 생각이 안 나요.” 라며 회상을 회피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그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아마 지금의 회피성 애착 유형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부딪혀서 기억해내고 마주하려 하기에 이제부터 내 부모님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학교 혹은 학원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에 탄 15살의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11층을 꾸욱 누른다. 층수가 하나씩 올라갈수록 마음과 표정은 차갑게 굳어져간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열리고 나는 현관문 앞에 선다. 그리고 문 너머의 풍경을 상상한다. 집에 아무도 없길 바라지만 분명 아빠가 거실에 이불을 펴 놓고 노트북을 보며 떡하니 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방에는 문을 잠그고선 분노에 가득 차 티비를 그저 보는 엄마가 있겠지. 오빠는 아마 자기 방문을 잠그고 스트레스에 잠겨 공부를 하고 있을 거야.


현관 밖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습관적으로 신발을 미리 벗어 꾸겨신는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현관 비밀번호를 치고 문도 재빨리 연다. 문이 열리자마자 벗어둔 신발을 대충 놓고서 아무 말 없이 바로 직진한 뒤 왼쪽으로 꺾으면 있는  방으로 스르륵 들어간다. 버튼을 눌러 문을 잠근다. 2년 동안의 하교는 내내 이렇게 이루어졌다.


부모님은 늘 싸웠다.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돈을 거의 벌지 못했고 허리 디스크가 재발해 거실에만 누워있게 되었다. 엄마는 아빠가 넉넉한 생활비를 벌어오길 바랐다. 아빠는 엄마를 통제하려고 했고 엄마는 벗어나고 싶어 했다. 엄마는 신경질적이었으며 아빠는 엄마를 의심했다. 그들은 생각과 성향과 종교가 달랐고 입맛이 달랐으며 모든 것들이 달랐다. 그들은 서로에게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고 그 날선 소리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싸움은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끝이 보이는 듯했다.


모두가 집에 있던 어느 주말의 낮이었다. 햇빛이 따사롭게 거실을 비추던 날이었다. 그렇지만 집 안에는 흉흉한 먹구름이 잔뜩 끼어 햇빛을 거슬려 보이게 만들었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따라 화가 쌓이고 쌓여 싸움이 더 과격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또다시 들려오는 싸움 소리에 ‘또 시작이네.’ 하고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신경을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밖에서 아빠가 칼을 찾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내 방 나만 아는 위치에 가위 하나를 숨겨두곤 했는데 그 이유는 언제 사건이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모두가 미쳐 서로를 죽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죽음, 자살, 폭력 등의 단어들이 내 삶과 가까워졌다고 느낀 게.


나는 그 가위를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문 바로 앞에 쭈그려 앉았다. 다행히 아무도 내 방문에 집중하지 않았고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 틈 사이로 상황을 엿봤다. 선명해진 소리와 눈에 똑똑히 들어오는 풍경. 아빠의 뒷모습에선 불이 나는 듯했고 엄마는 소리를 계속 질렀다. 오빠는 옆에서 울며 아빠를 말렸다. 찔러라, 우리 모두 죽자, 죽이겠다, 죽여라.


바들바들 떨며 양손으로 꼭 잡은 가위를 더 세게 쥐었다. 세게 쥐면 쥘수록 눈물은 더 나왔고 손은 더 떨려왔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은 터졌다. 아빠가 완력으로 엄마를 밀어버렸고 순간 허공에 붕 뜬 엄마가 저 멀리 날아갔다. 가위를 쥔 손의 힘이 턱 풀렸고 나는 넋이 나간 채 서서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오빠는 아빠에게 욕을 퍼부었고 나는 엄마를 보며 엉엉 울었다. 아마 오빠가 112나 119에 신고를 했을 것이다. 


그 현장은 마치 아비규환과 같았다. 욕과 비명과 원망과 눈물로 가득 찬 집 속에서 이성을 되찾고 벌벌 떨고 있는 아빠, 눈이 벌게진 채 아빠에게 씨발 거리는 오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엄마, 엄마 옆에서 어쩔 줄도 모르고 울기만 하던 나.


그 이후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현관문을 두드렸고 어느 순간부터 아빠가 보이지 않았고 내가 아빠를 괴물 같이 여기게 되었다는  외에는.


다행히 엄마의 머리는 소파 쪽으로 떨어져서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장면이 충격적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덩치가 엄마보다 두 배 정도 크고 근육량도 남들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난 아빠가 무방비 상태의 엄마를 온 힘 다해 밀어버렸다는 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평소 도덕적인 모습을 추구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아빠가 그랬기에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었던 건 아니다. 아마 7, 8살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들리고 돌아왔던 날이었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돌아온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안방에서 찢어지는 듯한 엄마의 비명소리와 반쯤 이성을 잃은 듯한 아빠의 목소리를 들었다.


당시 오빠와 나는 같은 방을 쓰고 있었는데 그 소리들에 잠에서 깬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두려움에 휩싸였다. 나는 이 때도 그저 울기만 했고 안방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한 오빠는 절망스레 방으로 돌아와 내 손을 꼭 잡고서 함께 떨며 울었다. 아빠가 엄마를 때렸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모르지만 아무튼 위협 그 이상을 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했고 할머니가 집으로 찾아오면서 종결되었다.


아빠는 그 이후로 엄마, 오빠, 그리고 나에게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것이라고 사과를 했다. 그날 겪은 아빠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지만 그런 적은 정말 처음이었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이후로 잊고 있었던 아빠의 모습이 겹쳐졌고 나는 아빠가 얼마든지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거라는 두려움이 생겼다.


아빠는 집을 나가게 되었다. 아빠가 걱정되지 않았다. 언제 돌아올지 모를 아빠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집 현관 비밀번호를 바꿔버렸고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마다 근처를 살피며 다녔다.  하나 걱정되었던 것은 곧 다가오는 나의 고등학교 입학과 생활비, 그리고 교육비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빠가 집을 나가고 행방을 모르게 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것이다. 내가 다니는 중학교 건물 내에서 진행되는 수련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아빠를 초대하기 싫었지만 엄마는 초대하기 싫어도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그 이유는 아빠에 대한 도리를 지키라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합의가 아닌 소송 이혼 과정까지 생각 중에 계셨다. 나중에 아빠가 그런 을 말해주지 않았다며 법정에서 꼬투리를 잡을 거라고 해서 그런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빠에게 수련회 때 부모님과 함께하는 활동이 있다는 문자를 띡 남겼다. 아빠가 나간 후 처음 보내는 문자였다. 시간과 장소를 알린 후 참석하실 거냐 물었다. 참석하지 않을 거라는 대답을 간절히 기다렸다.


다행스럽게 아빠는 지 않을 것이라는 문자를 남겼고 나는 마음을 한결 놓은 채 수련회에 갔다. 아빠는 왜 오지 않았냐고 누군물어볼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아빠가 오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렇게 한 강당에 모여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시간이 다가왔다. 여자아이들은 그들의 아빠와 짝을 지어 춤을 추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흘깃 보며 아빠가 오지 않은 또 다른 친구와 짝을 지어 춤을 추었다. 한참 춤을 추던 중 강당 문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드는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더니 학교에 오지 않을 거라던 아빠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아빠를 마주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같이 춤을 추던 친구의 손을 떼어내고선 아무 생각 없이 강당 문쪽으로 냅다 달려갔다. 뒤에서는 아빠가 나를 부르며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에게 쫓기듯이 필사적으로 도망갔고 찾기 힘든 곳에 숨어 한참을 울었다.


핸드폰으로 전화가 나를 찾으러 선생님이 오랜만에 아빠의 얼굴을 보았다. 다른 학생들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서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훗날 아빠와 이야기를 하며 서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시 어떤 기분이었는지 털어놓았다. 이제야 아빠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 아빠가 느꼈을 아픔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모두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상처를 돌보기에 급급했기에 서로의 상처를 볼 여유가 없었다.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거의 두  만에 돌아왔을 것이다. 사건이 터진 이후의 집안은 다시 그 전의 분위기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의 집을 생각하면 흑백의 모습으로 떠올려진다. 그만큼 삭막하고 황량한 시간이었다. 더 이상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 엄마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고 생각한 아빠의 도청. 끊임없는 싸움과 동시에 재발된 아빠의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아 병실에 오랫동안 누워있었던 아빠의 병문안을 단 한 번, 그것도 억지로 가게 된 나와 오빠. 수술 뒤 아빠가 돌아오자마자 집을 나간 엄마.


사건들 속에서 게 신경 써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소 나의 학교 성적에 민감했던 엄마조차도 그녀에게 닥친 고통이 컸기에 그에 대한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뮤지컬과 노래가 없었다면 나는 높은 확률로 탈선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함께 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스스로 모든 것을 준비했다. 학교를 알아보고, 입학 전형과 등록금을 알아보았다. 그러던 와중, 부모님은 이혼 결정을 했다.


나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게 힘들었고 이렇게 계속 같이 살다가는 누군가 한 명이 죽거나, 혹은 모두가 죽을 것 같았다. 아빠와 엄마 중, 누구와 함께 살겠냐는 말에 망설임 없이 엄마와 살겠다고 선택했다. 엄마와 같은 성별인 이유도 있었지만 여전히 아빠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고민 끝에 아빠와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이사를 하며 살던 집 안의 짐이 반으로 나눠지는 신기한 모습을 보았다. 집안이 두 동강 나는 동시에 물건들도 두 등분으로 나눠졌다.


엄마와 나는 외할머니 댁으로 갔다. 세 달 정도 살았던 것 같다. 당연한 얘기지만 엄마와 외할머니가 함께 술을 마실 때면 늘 아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아빠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더욱 새로이 알 수 있었다. 취한 외할머니는 나에게 늘 “엄마를 불쌍히 여기라” 며 울었고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열심히 정보를 수집했다. 어디로 가야 내 꿈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입학 전형과 학교 교과 과정에 뮤지컬이 적혀 있는 곳으로 원서를 접수했고 그렇게 입시를 준비하게 된 곳이 두 군데였다. 한림예고와 서울방송고등학교. 그렇게 두 군데 모두 시험을 보러 갔고  결과는 모두 합격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학비가 인문계보다도 덜 나가는 방송고등학교에 가기를 원했고 나 또한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 학교에 가야만 최소한의 생활비로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을 보러 다닐 때만 해도 법적으로 이혼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엄마와 아빠는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양육비 문제로 매일 다퉜다. 소송 이야기도 늘 나왔지만 그들에겐 그만한 돈과 여력이 없었기에 합의 이혼의 방법을 택했고 엄마는 법적으로 이혼이 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갈 고등학교로부터 합격 문자가 날아온 날, 부모님의 법적 이혼이 인정되었다.


그 이후로 모든 사교육을 그만두고 엄마와 나는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할머니 집을 나와 입학할 고등학교와 비교적 가까운 곳을 찾아 나섰다. 여자 둘이 살아도 위험하지 않을 치안 좋은 곳을 구하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결국 방 한 칸짜리 원룸을 얻어 엄마와 살게 되었고 우리는 매일 한 매트에서 같이 자게 되었다. (2편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답장_OO님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