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분장과 여자 배우들
2018-12-20에 작성된 글.
“선생님, 혹시 속눈썹을 꼭 붙여야 하나요?”
이 말을 내뱉은 뒤로 나는 일주일 간 사람들에게 불려 다니며 혼이 났고 온갖 소문에 시달렸다.
“쟤 조금 이상해. 눈 커 보이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몰라~ 그냥 혼자 못생겨지게 놔둬.
한참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공연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배우들의 분장을 해주는 분장팀이 따로 있었으며 우리는 정해진 콜 시간에 맞춰 늘 분장을 하곤 했다.
분장 과정은 특별한 캐릭터가 아닌 이상 베이스를 피부에 바른 후 턱과 코 쉐딩을 하고 눈썹과 눈 화장을 하는 것이 기본이다. 얼굴의 기본 윤곽을 잡아주고 대극장 특성상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일 수 있도록 말이다. 남자 배우들의 경우 이 과정만 거치면 분장이 완료된다. 하지만 여자 배우들에게는 추가되는 것이 몇 가지 더 있다. 화려하고 진한 눈 화장과 붉은 입술 색깔, 그리고 인조 속눈썹이다.
우리는 몇 주 동안 주어진 인조 속눈썹을 뗐다 붙였다를 반복하며 공연을 했다. 심지어 두 개의 속눈썹을 겹쳐서 붙였기에 눈을 가만히 뜨고 있는 것조차 무거웠다. 나의 진짜 속눈썹에 접착제 잔여물이 붙어 끈적거리기도 했고 얇은 눈두덩이 살이 일그러지며 원래 있던 쌍꺼풀 모양이 변해 눈 깜빡이는 게 어색해지기도 했다. 공연을 위한 렌즈 착용으로 생겨버린 안구건조증은 진한 분장과 속눈썹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매일 그렇게 분장을 받으며 공연을 하던 어느 날, 오른쪽 눈두덩이가 따끔거리며 빨갛게 부어버린 걸 볼 수 있었다.
이 참에 속눈썹을 꼭 붙여야 하는 건지 분장 선생님께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마음속의 불만을 해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왜 여자 배우들만 붙이는지, 그리고 대체 왜 한눈에 두 개나 되는 속눈썹을 겹쳐서 붙여야 하는지는 마음속으로 곱게 접어두기로 하고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혼나거나 꾸중을 듣는 뮤지컬 앙상블 막내는 최대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안 되었다. 하지만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분장 선생님께 다가가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물론 최대한 눈치를 보며 주위 사람들이 듣지 못할 최소의 목소리로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말이다.
“선생님.. 혹시 속눈썹을 꼭 붙여야 하나요?”
갑자기 굳어지는 분장 선생님의 얼굴.
“왜?”
눈치를 보는 나의 목소리와는 상관없이 분장 선생님의 목소리는 분장실 전체에 울려 퍼졌고 나는 주위에서 분장을 받고 있는 앙상블 선배들의 눈치를 살피며 숨죽인 채 다시 말했다.
“아 그게, 눈이 가렵고 빨갛게 부었더라고요..”
“그럼 풀을 다른 걸로 교체해 줄게.”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거기서 그냥 잠자코 수긍했어야 했지만 나는 기어코 사족을 붙였다.
“사실 속눈썹을 왜 붙이는 건지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사실 대극장에서 하는 시대극이라는 점이 이유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자 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의 여동생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당시 여성들은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과 가슴 쪽이 파진 드레스를 입었고 시대를 반영하기 위해 우리는 그와 흡사하게 맞춰 입었다. 분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1860년대 남북전쟁 전 미국 남부인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기 위해 당시 여성들의 모습을 반영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속눈썹을 붙이는 이유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오류가 존재했다. 인종 차별이 심하던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당시 흑인 노예들을 연기하는 여자 배우 또한 속눈썹이 기본적으로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색깔의 베이스를 얼굴 전체에 펴 바르긴 했지만 속눈썹은 빠지지 않고 지급되었다.
공연 중간에 흑인 역을 맡은 여자 배우들은 속눈썹을 떼라는 연출팀의 지시가 들어왔지만 배우의 지인이 오거나 생일이거나 하는 특별한(?) 날에는 분장팀에서 속눈썹을 붙여주곤 했고 점차 특별한 날의 횟수가 늘어나더니 다시 매일 붙이기 시작했다. 이 말인즉슨 그들이 속눈썹과 공연 내용의 관계를 별개로 보고 있다는 말 아닌가.
그밖에 생각했던 이유들 중 ‘큰 공연장에서 눈을 더 또렷하게 보여주기 위해’가 있었지만 남자 배우들은 속눈썹을 붙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이유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여성스러움을 부각하기 위해’라는 이유를 붙이기엔 실제 모든 여성들이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분명 혼날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나이도 제일 어린 막내 앙상블이 다른 언니들 다 붙이는 속눈썹을 붙이지 않아도 되냐 묻는 꼴이라니. 하지만 속눈썹을 붙이는 이유를 아무도 모르고 그저 주니까 혹은 여태껏 그래 왔으니까 붙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고 나는 본질을 캐내고 싶었다. 오기가 생긴 나는 이유를 꼭 물어보아야만 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고 예의를 갖춰 물었지만 이 질문 자체가 반항으로 느껴졌을 터이다. 분장 선생님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서 “이게 말이 돼? 처음이야 처음. 이런 거 물어보는 애는.”라는 말을 큰소리로.. 반복하셨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몰려드는 시선이 불편해지고 여기서 그냥 포기해야겠다 싶어진 나는 다급하게 소리를 죽여 말씀드렸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럼 풀만 교체하겠습니다. 속눈썹 붙일게요.”
사건이 일단락된 듯싶었지만 분장 선생님은 대화가 끝난 후에도 혼잣말을 하셨고 그렇게 주위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사건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불려 다니며 혼나야만 했다. 주로 이런 내용이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라’, ‘모르면 먼저 우리한테 물어봐야 한다’, ‘다 이유가 있으니까 붙이는 건데 혼자 토 달지 마라’ 등등. 그러면서 나를 혼내는 그들 또한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과 경력이 많고 나이가 많은 앙상블 언니 오빠들도 그 분장 팀장님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작 우리가 공연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아무도 답을 모르는 모순적인 일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비단 속눈썹뿐만이 아니다. 여자 배우들은 입술 색깔부터 시작해서 문신이나 가슴의 크기, 높은 하이힐까지 많은 부분에서 신체적인 제약을 받는다. 그게 자의적이던 타의적이든 간에 말이다.
어쩌다가 붉은색 계열의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더니 분장 선생님들은 기겁하며 아픈 사람 같으니 어서 바르라고 했다. 아무도 극의 내용과 관련해 립스틱을 발라야 하는 이유를 대지 않았으며 이것 또한 남자 배우들에게는 전혀 가해지지 않는 제약이었다. “여자가 입술 색이 있어야지” 가 유일한 이유였다.
문신이나 타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팀에 여자 배우 남자 배우 각각 한 명씩 몸에 문신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여자 배우만 그 부위에 살색 테이프를 붙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남자 배우의 문신이 여자배우의 문신보다 거의 5배는 더 컸는데도 말이다. 시대 상황과 그 배우들이 각각 맡은 역할을 고려해 보아도 맞지 않는 논리였다. 그리고 문신을 가리지 않았던 남자 배우는 관객들에게 ‘문신앙(문신을 한 앙상블)’이라는 별칭까지 획득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시대 극도 아니고 판타지 적인 요소가 잔뜩 들어간 공연 <광화문 연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팔 안쪽에 작은 타투가 있는 앙상블 언니가 한 명 있는데 괜히 눈치가 보여서 매일 살색 테이프로 가린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살점이 뜯겨 나가고 매일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일들이 생겼다. 나는 물었다.
“언니. 시대극도 아니고 정해진 역할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맨날 타투 가려요? 예쁜데.”
“괜히 욕먹기 싫어서 그냥 가리는 거지 뭐.”
문신 혹은 타투를 하는 여성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기성세대에서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신체에 그것도 여자가’ 라며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도 여전히 문신이나 타투에 은근한 거부감을 느끼곤 한다. 나 또한 그랬었다. 그런 시선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스스로를 검열하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먼저 타투를 가리게 된 것이다.
분장을 거부한다는 말이 아니다. 공연의 내용과 컨셉에 맞춰 분장을 진행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표현되는 방식의 이유를 모두가 알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런 명확한 것들의 제시가 없었다. 여자 배우들은 어떤 극, 어떤 인물이든 간에 일단 예뻐 보여야 하는 게 기본 목적이었고 배역에 따른 구체적인 분장은 뒷전이었다.
특히 공연의 큰 흐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앙상블 배우들은 더욱 그렇다. 공연 배경을 그려주고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그런 것 같다. 사람들은 공연 내용에 알맞은 개개인의 창조적인 캐릭터를 만드는데 집중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더 예뻐 보일지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예뻐 보여야 한다는 것을 욕하고 싶지 않다. 단지 누가 그들이 예뻐 보이고 싶도록 만들었는지 묻고 싶다. 어째서 공연보다 보이는 모습이 치중하게 되었는지, 과연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순수한 욕심이었는지,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들에 비해 뒤처지고 낙오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초에 여자들이 예뻐야 하는 극들이 넘쳐난다. 데뷔 뮤지컬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만 해도 그렇다. 거의 모든 여자 인물들은 어떻게 하면 남자들에게 잘 보일까 생각하며 코르셋을 차고 거울을 본다. 심지어 당시 주체적인 여성상으로 불리던 스칼렛 오하라 마저 레트 버틀러의 힘을 얻기 위해 상처 투성이 손을 숨기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돈을 빌리러 간다. 그저 순종적이고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여성과 주체적으로 남자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여성이 다를 게 뭐가 다른 것인가.
다행히 요새 들어 부쩍 젠더리스 배역, 능동적이고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나오고 있고 그에 무척 환영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 소수의 공연들 또한 여전히 사소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느낀다. 못생긴 역할이지만 정말 못생겨 보여서는 안 되며, 전혀 얼굴을 꾸미지 않는 인물이나 화장을 하지 않는 직업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조차도 입술과 볼에 빨갛게 물을 들인 채 공연을 한다.
원작에 충실하는가, 혹은 시대에 맞춰 각색을 하는가. 시대 고증을 하느냐, 혹은 변화한 시대에 맞춰 문제 될 만한 부분을 수정하느냐의 문제는 아직도 풀지 못한 열쇠이다. 아직까지는 사회의 보편성에 내가 맞춰야 하는 부분이지만 여기에 의문을 제시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인종, 소수자, 약자 문제를 이제야 예민하게 느끼기 시작한 이 사회에서도 차별적인 단어가 아직도 만연하게 쓰인다. 아직도 수많은 뮤지컬 작품에서는 창녀촌이나 몸과 술을 파는 여성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인물의 이름도 없이 그저 oo 모, 00처로 불리며 성녀와 악녀의 이분법으로 극명하게 나뉘는 여성들. 여전히 마초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성 캐릭터들. ‘여성 캐릭터는 이래야 한다, 남성 캐릭터는 이래야 한다’라는 틀 속에서 인물의 다양함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차별적이거나 혐오적인 단어들 또한 여럿 등장하곤 한다.
다양한 인물이 나오는 다양한 대본이 부족하지 않은 지원을 받으며 열린 생각을 가진 창작자들이 자유롭게 공연을 만들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생각보다 여러모로 한 발 늦다는 것을 체감한다. 음악도, 이야기도, 집단의 분위기도, 사회적 흐름을 따라가는 속도 또한 말이다. 공연 특성상 창작하고 준비하는 기간이 길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이를 줄여나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