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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Dec 17. 2019

배수관에서 살아남은 아기 고양이



"그럼, 그냥 죽게 두라는 건가요?"


      

아무리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는 게 사람이라지만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그렇게 들린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이따금씩 말문이 막힌다.           



"아뇨 선생님, 길에서 멀쩡히 잘살고 있는 고양이가 갈 수 있는 곳이 없다니까요."

  


"길에서 어떻게 멀쩡히 살아요? 손바닥만한 애기가 어디서 뭘 먹고 살아요?"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의 고양이를

구조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정해진 원칙대로 답변은 했지만,

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나 역시 길에서 아기 고양이를 만나면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변에 어미는 있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다니는 건 아닌지


나의 관심이 고양이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히 살펴보다가

늘 애잔한 마음으로 돌아선다.  


물론, 어른 고양이를 볼 때도 같은 마음이다.      


여름에는 태양 아래 뜨거워진 아스팔트에 다치진 않을지

겨울에는 어디에서들 매서운 추위를 피하는지


부디,

그 계절을 무탈하게 지나가기를.

올해도 살아남기를.  

늘 마음속으로 바라 주곤 한다.     


.



길고양이를 구조해달라는 전화는 흔한 일이다.


나무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도

어느집 옥상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도

어느 아파트 야외 테라스에 터를 잡은 고양이도

누군가의 눈에는 구조해야 할 동물이었다.


동물보호단체와 지방자치단체는

조직의 성격이 서로 다르지만


동물 구조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

민원인들의 감정은

보통 이런 식으로 비슷하게 흘러간다.  




길을 걷다 우연히 불쌍한 고양이를 본다.

어떻게든 도와주고는 싶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모르겠다.

혹은

데려가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계속 키울 순 없다.      


검색을 한다.


114나 120으로 전화를 한다.      

동물보호단체.

아니면 지자체 담당자와 연결이 된다.


길에서 마주친 불쌍한 고양이를

조해 달라고 제보한다.     


그러나 어느 곳에 전화해도

길에서 자생하는 고양이는

‘구조’나 ‘포획’의 대상이 아니며

설사 구조를 한다 해도 갈 곳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다.


좋은 마음으로 애쓴 사람은 기분이 상한다.     


도대체 동물보호단체는

시민들의 후원금을 받아서 뭘 하는지 모르겠고


도대체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은

사무실에 앉아서 뭘 하는지 모르겠다.     


화가 난다.      

화를 낸다.



    

때로 길고양이를 포함한

동물보호업무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

    

얼마나 법과 규정을

정확하게 안내하고 조치했느냐가 아니라

민원인이 길고양이를 불쌍히 여기는 감정에

얼마나 성심성의껏 '공감' 해 주었느냐에 있다.


'아휴, 불쌍하죠.'

'저도 고양이 좋아해요.'

'저는 선생님이 무슨 마음이신지 알아요.'

'저도 동물보호법이 정말 엉망이라고 생각해요.'

적잖은 감정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실무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하고 나면

'동물'에 대한 나의 애정도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서

의도가 뻔한 질문을 받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래전, 고양이 한 마리를 구조하겠다고

고군분투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길고양이를 구조해달라는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아기고양이 주위에는 대부분 먹이활동을 위해 돌아다니는 어미고양이가 있다




2015년 여름.  

   

며칠 내내 이어진 비가

잠시 그친 어느 날이었다.     

 

어느 집의 배수관에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동료와 함께 현장을 확인하러 갔다.   

   

신고인이 가리키는 곳에는

기다란 배수관이 놓여있었다.     




아기고양이 구조 현장 1(2015.7.)




'고양이가 어떻게 배수관에 들어간 거지?'라는 생각이

'에이, 설마 여기에 고양이가 들어있다고?'라는

놀라움으로 바뀌던 순간.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먀아아아”           



분명히 고양이였다.

정말 그 길고 좁은 배수관에

고양이가 들어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신고인은

벌써 3일 정도 된 일이라고 설명했다.   

       

배수관 밑으로 기다란 무언가를 넣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땅을 파보았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이쪽저쪽으로 둘러보아도

나와 내 동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배수관을 자를 수 있고

허락을 받아 자른 후에도

비용을 단체에서 보상해 주어야 했으며

그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단체의 핵심 구조팀은 남양주에 있었고,

나는 서울 사무국에서 일하는

정책 담당  활동가였기에

'구조의 기술' 같은 게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리고 그건 내 옆의 동료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계속해서 울어대는

아기 고양이의 목소리를 달래며

사무실에 상황을 보고하고

119에 전화를 했다.

 

몇 분 후.


천만다행으로 현장에 도착한

소방대원들과 함께

손바닥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아기고양이 구조현장 2(2015.7.)




"이거 뭐, 배수관 자르는 건 문제가 아닌데

얘가 어느 위치에서 걸렸는지 모르니까.

자르다가 고양이 다치면 어떻게 해요?"


       

현장을 살펴보던 소방대원 한 분이 말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기 고양이는 더 힘차게 울어댔다.     


정말 그랬다.


고양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도 확인이 안 되는데

무턱대고 배수관을 자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더 지체하다가는

고양이의 생명이 위험할 것 같았다.   

  

현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낡은 배수관 하나를 둘러싸고 난감해하던 중

누군가가 배수관을 발로 세게 찼다.

 

그러자 갑자기 안쪽에 쌓여있던 흙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물기 가득 머금은 흙이

아래로 내려올 때마다

모두가 숨죽여 배수관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퍽.


끊임없이 울어대던 아기 고양이가

흙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3일간 배수관에서 살아있던 고양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구해 낸 고양이에게

나는 ‘꼬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꼬마 미묘’라는 뜻의  

아주 낯간지럽고

참신하지 못한 이름이었지만  

나에게만큼은 아주 특별한 고양이가 되었다.      

.



그 이후 오랜 시간

동물과 관련된 업무를 하다 보니

꼬미는 아주 '운이 좋은 고양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희미한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 준 시민이 있었고

현장에 나갈 수 있었던 활동가 두 명이 있었고

현장에 나와주신 구조대원분들이 있었고

최악의 순간 배수관을 잘라도 된다고 허락한

집주인이 있었고

무사히 입양을 보내는 순간까지

돌봄이 가능할 만큼

넉넉한 형편의 단체에서 보호를 했으니까.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함께 구해 낸 아기고양이



동물보호업무를 담당하는 어느 조직이든

예산과 인력 그리고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위치한 모두

각자 맡은 일을 충실히 하며

최선을 다해 일해도

모든 생명을 구하고 돌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고양이들과

손길이 닿지 않아야 살아갈 수 있고양이들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사람이 고양이에게 끼치는 해악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용을 지불하고 데려오는

반려동물도 쉽게 버리는 사회에서

아무런 부담 없이 집에 들일 수 있는 길고양이는

펫샵에서 데려오는 동물보다 더 쉽게 버려진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무작정 집에 데려왔는데

빠르게 성장하는 고양이 때문에 힘들다는 사람들      


아기 고양이 일 때만 돌보고

몸집이 크면 길에 돌려보내겠다는 사람들     


어린 자녀가 고양이 한 마리를 주워왔는데

원래 있던 자리에다가 가져다 놓겠다는 부모들      


나는 부디 길에 사는 고양이들이

그런 사람들의 무책임한 손길로부터

멀리 달아나 몸을 숨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꼬미는 입양을 가서 '바로'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도심 속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길고양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개입'을 해야 하는지의 문제에는

저마다 분명 다른 선을 그어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소한

길에서 만난 아기 고양이들을 귀엽고 불쌍하다며

무턱대고 집에 데려오거나

 

본인의 잣대로

고양이의 행복과 불행을 함부로 판단하여

또 다른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는 마음이 모아졌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말했듯

선한 의도는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낼 때에

비로소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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