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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Dec 13. 2019

동물인수제- 버려지기 전에 살아갈 기회를 주세요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재미있게 봤다.      


꾸준히 챙겨보지는 못했지만

가끔 TV를 틀었을 때 동백이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지 않고 시선을 고정했다.      


주인공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에

불필요한 흔적이나 억지스러움이 없어서 좋았다.     


장면마다 따뜻하고 유쾌했으며

틀림없이 마음을 쿵 하고 건드리며 지나갔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동백꽃 필 무렵’의 재방송을 보던 날이었다.


어린 동백이가 버려지는 장면이었다.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도망쳐

생활고에 시달린 엄마는


예쁘게 씻기고 입힌 동백이를 식당에 데려가

평소엔 먹지 못 하던 고기를 구워주었다.   

   

그녀는 연신 불안한 모습으로

동백이의 작은 손에 포크를 쥐어주고

사이다를 시켜주며

어서 많이 먹으라고 아이를 달랬다.



사진: KBS 동백꽃필무렵 28회 방송 장면



배불리 식사를 마친 뒤

엄마는 동백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동백아, 사람들이 엄마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야 돼. 엄마 부탁이야. 알았지?”          



그렇게 아이의 입에서

본인의 이름 석자만

겨우 내뱉을 수 있도록 당부한 엄마는

택시를 타고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동백이는 그렇게 버려졌고,


시간이 흘러도

그 시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어른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그 장면을 보며

마음 아팠던 이유는


동백이를 위해

자식을 버리는 고통을 감내하는

엄마 때문이 아니었다.     


어른이 된 동백이가

버려지던 날의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버려진 날의 풍경, 냄새, 소리,

엄마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고기의 맛까지.     


어른이 되는 동안

수도 없이 곱씹었다던

그 순간의 무게에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얼마나 많이 짓눌렸을까.     


그녀의 이야기가

오직 드라마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설정은 아니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돌봄의 책임과 의무가 있는

보호자가 없어야

겨우 ‘살아갈 기회라도 얻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함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분명히 존재한다.      



사진: KBS  동백꽃필무렵 28회 방송 장면


누군가의 힘이

한 생명을 충분히 보호하거나

돌볼 수 없는 순간


어렵고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 위해

다 같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게 왜 능력도 안 되면서 부모가 됐어?”라는 책망이


먼저 나오는 사회는

제대로 작동하는 건강한 사회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계속해서

다양한 제도적 안전망을 만들어야 하고

어떤 이들은 그를 위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부모가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돌볼 수 있도록.

부모의 소득과는 상관없이

아이가 최소한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적어도 교육 기관 안에서는

차별 없는 밥상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는 그렇게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삶이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순간

보호자라도 없어야 ‘살아갈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사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다.      


1차적인 보호와 책임의 의무가 있는 보호자가

본인의 반려동물을 돌볼 수 없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동물보호법'의 유명무실함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본다.

        


   

얼마 전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업무를 하다가

바닥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개를 마주쳤다.          



“어? 너 왜 여기에 있어?”          



시청에 개가 들어오는 일은 흔치 않은데

갈색 푸들이 무료한 얼굴로 졸고 있었다.


그 옆에는 개 목줄을 꽉 쥐고 있는 노인이 앉아있었다.           



“선생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나의 질문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이 개를 도저히 키울 수가 없어서 왔어요."



그녀의 배우자가 정성스레 키우던 개라고 했다.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는

개를 제대로 산책시킨 적이 없을 만큼

동물을 돌보는 일이 버거웠다고.



"나는 장애가 있어서 허리도 몸도 너무 아픈데 산책을 도저히 못 시키겠어. 근데 얘는 꼭 산책할 때만 똥을 누려고 해서 안 데리고 나갈 수도 없고, 힘이 어찌나 좋은지 내가 쫓아갈 수가 없어.”



그녀의 한숨 가득한 성토를 아는지 모르는지

개는 여유로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처음엔 주민센터에 가서 좀 데려가 달라고 했더니. 구청에 가보래. 그래서 구청에 가서 사정을 했는데 거기서도 방법이 없대. 시에서 하는 보호소는 길에 버려진 동물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거야.”          



네, 그렇죠.”          



“그래서 부탁을 하다가 하다가 그냥 집에 가려고 하는데 어떤 여자 직원이 엘리베이터까지 나오더니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내 개라고 말하면 아무도 안 데려가니까, 길에서 버려진 걸 ‘주웠다.’고 하라고.”               



할머니는 마치 자신의 어쩔 수 없었던 행동에 대해 변명을 하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아침에 보호소에 가 가지고 길에 돌아다니고 있는 개를 주웠다고 했지. 근데 집에 가서도 내가 꼭 죄지은 거처럼 너무 마음이 안 좋은 거야. 어쩔 수 없이 다시 가서 솔직하게 말하고 데리고 왔어. 그랬더니 거기선 또 시청에 가보라네.”      


     

동네 주민센터에서 시작한

그녀의 머나먼 여정이

결국 시청까지 이어졌지만     


남은 건


내 눈앞에서 졸고 있는

피곤한 개 한 마리와

끝내 거짓말을 하지 못 해

죄책감에 휩싸인 노인 한 명뿐이었다.      


비록


정해진 규정을 어기는 것이지만

구청의 이름 모를 직원은 아마

그녀에게 ‘선의’로 거짓말을 제안한 것이리라 짐작해 본다.      


노인의 사정이 하도 안타까우니까.

그런 노인과 살고 있는 동물의 모습 또한 안쓰러우니까.  


본인 ‘개’라 하지 말고

‘버려진 개’를 주웠다 하시라.     


원칙각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동물보호소에는

유기 또는 유실된 동물에 한해서만 입소가 가능하다.     


보호자에게 피치 못 할 사정이 생겨

본인 소유의 동물을 더 이상 돌보기 어려운 순간에도

지자체 보호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다.


동물에 대한 보호의무의 책임이

보호자에게  있을뿐더러


우리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동물인수제’가 시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을 포기하는 다양한 사람들



동물인수제란, 소유자가 소유권을 포기한 동물을

지자체에서 인수하여 보호,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2014년에 발표된 「동물복지 5개년 종합계획」에서는

이러한 ‘동물인수제’ 도입을 검토하기로 하였지만


일각에서는 이를 악용하여

의도적으로 동물을 유기하거나


동물에 대한 보호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양심적 면죄부를 받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또한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반려동물 생산과 판매구조가 불투명하며

‘개식용’ 문제 또한 해결되지 않았기에

제도의 도입이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동물을 포기하는 흔한 이유(단순한 변심, 이사, 환경의 변화 등)가 아닌


정말 ‘불가피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에도

지자체는 보호자에게 우선적으로

동물의 보호와 책임 의무를 각인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함께 살아가던 가족이 갑작스럽게 부재하는 상황에서  

혼자 짐을 떠안게 된 보호자가

자신의 몸 조차 돌보기 어려운 사람일 경우.


시청에 찾아온 할머니와 같이

어떠한 이유에서건 보호자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동물을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에게 무한 책임을 강요하는 것이다.      



독거노인이었던 보호자가 사망 후 며칠동안 함께 방치되다가 발견되는 동물들이 많다.




혼자 사는 노인이 사망한 후

오랜 시간 방치되다가 겨우 발견되었을 때


그 옆을 반려견 한 마리가

지키고 있었다는 일을 종종 마주한다.      


암에 걸린 보호자가

주위에 반려동물을 맡길 수 없을 때


개를 잘 부탁한다는 편지 한 장과 함께

공공장소에 묶어두었다는 기사는

더 이상 낯설지도 않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이 간절하다.


이제는 '동물 인수제'의 공식적인 도입을 위해

적극적인 시도를 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하는.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부정적 결과를 자아낸다 할지라도

그에서 비롯된 문제 또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동물보호법이 발전한 다른 국가에서는

보호자가 동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상담과


그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며

해결책을 제안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호자가 동물을 보호할 수 없을 때는,

지자체에서 해당 동물을 인수한.


핵심은


누군가가 한 생명을 포기하는 일 앞에서

죄책감을 덜어주고

보다 수월하게 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보호자가 스스로

'동물을 돌볼 수 없다고 판단하는 상황'

결하기 위해 함께 고민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족과 같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보호자에게

그에 따른 무거운 책임과 의무를 각인시키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차라리 길거리에 버려져야

‘입양의 기회’라도 얻을 수 있는 현실은


도대체 어떠한 원칙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고민해 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동물 인수제 도입 및 추진 방안 마련을 위한 정책 연구, 2017. 농림축산 식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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