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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Dec 31. 2019

밖에서 키우는 개는 '개'가 아닌가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개'라는 동물과 친숙했다.


시골에서 농장을 하셨던 외삼촌 댁에는

언제나 열몇 마리의 대형견이 있었는데


작은 몸집의 어린아이가 다가가도

누구 하나 사납게 달려들거나

해코지하는 일 없이

사람을 좋아했다.


그땐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도

생소했던 시절이었다.


가족들이 먹다 남긴

밥과 국을 주는 게 보통의 일이었고


목줄에 묶인 채로

사람들이 오고 갈 때마다

꼬리를 흔들었던 개들에게는

'누렁이, 백구, 흑구' 따위의 이름을

돌려가며 사용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외삼촌 댁에 내려가는 일은

나의 방학을 한층 더 즐겁게 했다.


그곳에 가면 아침저녁으로

원도 한도 없이

동물들과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한테 받은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으로

동네슈퍼에서 제일 맛있는 과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를 사서는 

을 잘 듣는 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쉿!"

"안돼, 얌전히 있으면 줄 거야!"

"앉아."

"기다려."




나의 어린시절



어린아이의 몸집만큼 커다란 대형견들이

내 손에 들려 있는 과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연신 꼬리를 흔들었다.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았던 시절엔

'반려견용 간식'이랄것도 별다른 게 없었다.


요즘에는

반려동물에게 잔반이나

사람이 먹는 과자를 주면

'동물학대'라고 비난을 받거나

최소한 '개를 키울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겠지만 그때는 우리 모두가 잘 몰랐으니까.


개들이 평소에 먹지 못 하는

별미를 챙겨주는 일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애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집만한 동물들과

함께 놀았던 경험 때문인지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그 생각은

동물보호단체에서 일을 하면서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날, 

커다란 개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바람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는 내용의

민원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 동물의 정체가

'아기 래브라도 트리버'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래브라도 리트리버는 천사 중에 천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제는 개의 크기나 종에 상관없이

불편함이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

내게도 자연스러운 상식이 되었으니

군가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동물에 대한 호감을

강요하거나 부추기지 않는다.



동물에 대한 감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생각도 있다.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 

'개'라는 동물은 모두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덩치가 크든

생김새가 어떻든

품종이 어떻든  

길에서 살든

따뜻한 집안에서 살든

'개'는 '개'다.

 

다른 동물들보다

사람을 유난히 좋아하고

사람 곁에 있고 싶어하고

사람을 따르는 동물.


자신을 때리고 학대한 보호자에게도

꼬리를 흔들어주고 반가워하는

바보 같은 동물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마당개'와 관련한 민원이 들어오면

현장에 나가는 발걸음이 가장 무거워진다.


'마당개'는 말 그대로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집 안이 아닌

바깥(마당)에서 키우는 개를 말한다.


대부분의 마당개들은

1m도 되지 않는 팽팽한 목줄을 하고 

정돈되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동물의 주위에는 치우지 않은 배설물들이 있고

가장 기본적인 물그릇과 밥그릇도 청결하지 않다.


물론 밖에서 키우며

안에서 생활하는 반려동물 못지않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견주들도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여태껏 나가 본 현장에서는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들이

'있다고 들었으나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존재' 아니기만을 바라고 있다.




마당개들이 살아가는 보통의 모습


 

'마당개'와 관련한 민원은 주로 이런 내용이다.



"지나가다가 학대당하는 동물을 봤어요!"



민원인들 외부에서 생활하는 개가

'동물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말하며

주변 환경을 증거로 제출한다.  

 

지저분한 개집에 방치되어 있고

깨끗한 물과 밥을 먹지 못 하는 것 같고

목줄에 너무 세게 묶여있어 불편한 것 같고

더운(혹은 추운) 곳에서

제대로 된 보호와 관리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

동물학대가 틀림없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주장에 큰 이견이 없지만

마당개와 관련한 민원을 받는 순간부터

현장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순간까지

나는 언제나 극도의 무력감을 느낀다.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방문한 곳은 24시간 운영하는 음식점이었다.

백구 한 마리를 '방범용'으로 키우고 있다던 견주는

나와 동료들에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 별일을 다 봐. 아니, 내 개를 저기서 키우는데 왜 다른 사람들이 난리들이야? 추우니까 이불을 깔아줘? 집을 치워줘? 밖에서 키우는 개한테 뭘 해주라는 거야?"



당자가 마음만 굳게 먹고 열심히 일을 하면

세상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민원인들이


사실 공무원은 법적 근거와 지침없이

자의적 해석에 따라 일을 할 수 없다.


현장에 나갔을 때 동물보호법 제8조에서 말하는

'동물학대'규정에 합당한 증거들을 찾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고  나는 어떻게든 내가 속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했다.


 

"선생님, 개를 저렇게 키우시면 안 돼요. 개집 주변 좀 치워주세요."  



"아이고, 알아서 한다고요. 내가 동물학대를 한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아침저녁으로 손님들이 먹는 거랑 똑같이 고기도 잔뜩 넣어서 주는데. 주방에 한번 가봐요, 저기 먹다 남은 밥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요, 절대 안 굶겨요."


 

동물보호법 제7조에는

'동물에게 적합한 사료 물을 공급하고, 운동ㆍ휴식 및 수면이 보장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되어있지만 그 노력을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때문에 나름대로

사랑과 정성 그리고 큰 비용을 들여가며

개를 키우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는 견주들 앞에서


그들의 사랑과 정성이

법과 원칙에 위배됨을 주장하며

시정을 강제할 수 없는 나는

언제나 무력해질 뿐이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

'어르고 달래기, 그리고 부탁하기.'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도 있으니

조금만 더 신경 써달라는

나의 구구절절한 읍소에

일부 견주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지만


대부분은

'내 개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다.'

태도를 유지한다.



마당개들이 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과거에는 '동물복지'라는 의식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중도 부족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

스승이 제자를 대할 때

상급자가 하급자들을 대할 때

'애정'은 있다고 말하되  '존중'은 없는 태도가 만연했다.


어린아이의 옷을 벗기고 문 밖에서 벌을 세우는 일이

부모가 자식을 훈육하는 흔한 방법이기도 했고

아이가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공포에 질릴 때까지

장난을 치는 일을 '관심'이라 믿는 어른들도 많았으며

'애들은 맞으며 커야 한다.'는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세상은 조금씩 변했.


타인의 고통에 무감했던 역사에서

다른 생명고통을 헤아리는 방향으로

특정인에게 집중되었던 권리가

모두에게 공정하게 나누어지는 방향으로

누군가에 대 '사랑'과 '폭력'을

명백히 구별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과거에는 옳은 줄 알았으나

사실은 틀린 것이었음을 마주하면서

인정하고, 반성하며

앞으로의 태도를 다르게 결정하는 일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기에 앞서

스스로 더 나은 인간이 되는 일이다.  

 



무엇이 '동물학대'인지를 규정하고 처벌하는 보다 세심한 법제도가 필요하다



나는 동물학대에 대한 규정과

그를 위반했을 경우 처벌하는 법제도가

조금 더 세심하고 정교하게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랄 뿐 아니라


외적인 조건과는 상관없이

모든 견종, 더 나아가 모든 동물에게

우리 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동물보호의 '기본원칙'이 지켜지기를 바란다.


사람의 피부색과 생김새로 그의 쓸모를 결정짓거나

사회경제적 지위로 차별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고

오직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이에게 부여한 존엄한 권리가 있다면

동물들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쓰레기 더미에 살아도

'괜찮은' 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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