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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Nov 20. 2020

쓰레기봉투와 오동나무

"포로리는 치매 중에서도 증상이 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몇 개월 전.

나의 반려견이 치매를 앓게 되었다진단을 받았다.


어느 순간부터 포로리는 새벽에 몇 번이고 일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렀고

나는 온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다른 곳으로 한 걸음을 이동할 때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배설을 할 때마다.


아니 사실.

시도 때도 없이.


포로리는 기운이 빠질 때까지

하울링을 하며 나를 찾았다.


동물에게도 치매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나의 반려동물이 치매를 앓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큰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세상을 떠나도

'나는 설마 아닐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이

나의 반려동물을 두고서도 동일하게 물든 것일지 모르겠다.


치매를 앓는 개를 돌보는 일은 

생각만큼이나 어렵다.


매 순간.

나라는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의 인내심을 발휘하다

무너져 버리게 되는지 배우는 일이고


사랑하는 존재가 삶에서 죽음으로 걸어가는 시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했다.

 

한동안

치매를 앓는 반려동물을 돌보는 이들이 올린 정보를 자주 찾아봤다.


대부분 포로리와 증상이 비슷했다.


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아이도 있었고

밤새 짖는 아이도 있었고

아무 곳에나 배설을 하고 몸에 묻히는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보호자들은

치매를 앓던 반려견이 세상을 떠나자

하루 종일 짖고 울던 소리가

환청처럼 일상을 따라다닌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올린 정보를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 순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나의 반려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돈이 필요한 때가

'탄생'과 '결혼' 그리고 '죽음'의 순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전 생에 걸쳐서

사회의 가치, 규범, 그리고 사회적 관행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생애과정들 중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에

특히 더 많은 의례적인 행위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시장은 그 틈을 정확히 파고들어

의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재생산하고

다양한 상품을 쏟아낸다.


그렇기에  '생애 단 한번 있는 일'이라는 말은

진부하지만 늘 유효하게 작동할지도 모르겠다.


외면하기만 했던 포로리의 마지막 순간을

조금씩 준비해 나가기로 한 날부터

나는 반려동물 장례업체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찾아보았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장례 역시

절차나 사용하는 장례물품의 질에 따라

3-40만 원에서 그 열 배가 넘는 금액까지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반려동물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준다는 곳도 있었고

유골을 담아 평생 곁에 두고 보관할 수 있는

돌로 만들어 준다는 곳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죽었을 때보다

더 세심한 절차들이었다.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나의 장례식도

최대한 간소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죽음 이후가 아닌 내가 아직 살아있을 때

소중한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방식으로

치르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행여라도 직접 챙길 수 없다면


나의 마무리를 도맡아 정리해 줄 이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로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과 비용만 들여주었으면.


빨간 육개장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위해 귀한 시간을 내고 모인 이들이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시간으로 채울 수 있다면.

하는 정도의 생각만 가지고 있다.


어쨌든 생을 마무리하는 순간에서도

중요한 건 형식이 아니라 의미다.


내가 당신들을 사랑했고

당신들이 나를 사랑했다는 


당신들과 내가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였다는 의미를 충분히 나눌 수 있다면

그 순간에 우리가 갖춰야 할 의례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가능한 포로리의 마지막도

나는 그렇게 준비하려고 한다.






얼마 전.

농원에서 개 두 마리를 키우던 민원인이 나를 찾았다.

키우던 동물 중 한 마리가 세상을 떠났는데

땅에 묻어줘도 되는지를 내게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현행법상 허가받지 않은 동물의 사체를 땅에 묻는 것은 불법이다.


동물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사망한 동물은

인체에 감염 등 위험을 끼칠 우려가 있을 경우 '의료폐기물'로

그 외 동물의 사체는 '생활 폐기물'로 분류되며


의료폐기물은 수거 전문 업체에

나머지는 동물보호법에 따라 등록된 장묘업체를 통해 화장을 하거나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릴 수 있다.



"아휴. 그럼 어쩔 수 없이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처리해야겠네요. 그쵸?"



나의 설명을 듣던 보호자가 되물었다.



"저한테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님이 선택하실 이죠."



보호자는 반려동물 장례업체를 찾는 일의 어려움과

자신이 요즘 시간적 여유가 없음에 대해

나에게 설명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우리의 법이 동물의 사체를 생활폐기물로 분류하는 이상

누구도 쓰레기봉투에 반려동물을 담아 버리는 행위를 비난할 수는 없다.


'정서상'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말은

법에서 허용한 타인의 선택에 붙이는 사족일 뿐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 또한

저마다의 가치와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기에

그마저도 아무 상관없는 타인이

당사자가 요청하지 않은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법이 반려동물의 사체를

'못 쓰게 되어 내다 버릴 물건'으로 취급하는 상황에서

어떤 반려동물 정책이 현실에서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값을 지불한 생명을 소유하기 쉽고

생명이 다한뒤에 처리하기도 쉬운 법 안에서

반려동물을 보호하는 정책이

실제로 의미가 있을까


함께 살던 반려동물을 위해

최고급 오동나무관으로

그를 추모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옳지는 않고


장례비용이나 절차에 따른 수고가

죽은 이를 애도하는 마음과

정비례하지는 않겠지만


쓰레기봉투와 오동나무관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반려동물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살아있는 생명을 어떻게 다루는지 만큼이나

죽음 이후의 존재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태도도

한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족'이라 이름 붙인 들에 대한 것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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