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를 다 읽었다
작품을 론칭했다. 휴대폰에 들어가 웹소설이 연재되는 사이트를 열고, 내 눈에 익숙한 표지를 손가락으로 톡 누르면 내 작품이 나온다. 읽고 또 읽어서 지겨움직한 그 작품이 생경한 필체로 타인의 작품들과 함께 론칭된 모양이 참으로 새롭다. 하지만 작품이 나오면 그 새로움을 즐기고 있을 수만은 없다. 웹소설 사이트에서, 실시간으로 웹소설은 순위를 오르내린다. 초반 순위가 어떠냐에 따라 그 웹소설의 운명은 결정된다. 초반에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면, 그 웹소설은 더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런데 초반에 제대로 인기를 끌면 연재되는 플랫폼에서도 상당히 신경을 써서 그 작품을 반복해서 노출시켜 준다. 그러면 그 작품이 계속해서 잘 되고, 출판사들은 그 작가에게 너도나도 러브콜을 보낸다. 그 작가의 차기작은 출판사에서나, 연재되는 플랫폼에서나 이전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으며 론칭된다. 그러니 초반 순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작품이 론칭되었을 때 작가는 초긴장 모드가 된다.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댓글 이벤트를 열어서 일정 댓글 이상 달아주면 상품을 주기도 한다. 출판사에서도 이벤트를 열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벤트를 열고 상품을 많이 주어도 작품이 재미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여기서 작품의 '재미'란, 단순히 흥미를 끄느냐 안 끄느냐 하는 문제는 아니다. 웹소설은 장르에 따라 독자들이 다르고, 그 독자들이 그 웹소설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다르다. 작품에 독자들의 니즈가 잘 드러나면서도, 또 그것만 지나치게 신경써서 다른 작품과의 차별점이 없다면 독자들은 금세 지루함을 느끼고 외면한다.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있으면서도 그 작품만의 개성 또한 있어야 한다. 그 작품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잘 표현되어야 다른 작품들보다 더 잘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이 '살아남아' 계속해서 플랫폼에 노출이 되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웹소설을 읽는 것은 사람의 인생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옷이 없으면 안 되고, 먹을 것이 없으면 안 되지만 웹소설은 안 읽어도 잘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웹소설 작가들은, 때로는 밥을 굶으면서도 옷을 살 돈을 절약하면서도 작품을 읽도록 독자들을 매혹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가. 첫 작품을 론칭한 지 꽤 시간이 흘러 몇 년 차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매 작품마다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출판사에서 출간하자고 콜이 왔을 때, 그리고 플랫폼에서 콜이 왔을 때는 내가 꽤나 대단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믿었고 특히 그 어렵다는 플랫폼과 직계 계약 작가가 되었을 때는 앞으로 내 인생은 탄탄대로일 줄만 알았다. 하지만 작가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떤 작가는 "한 작품 끝낼 때마다 백수가 된다."고 넋두리를 하기도 했다. 그 작가는 굉장히 잘 나가는 작가여서 소위 대박작을 많이 낸 작가임에도 작품을 끝내고 새로 시작할 때의 불안감을 이길 수 없어 그런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에 십분 공감한다.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는 웹소설 작가가 쓴 책은 아니다. 소설 작가로 데뷔하여 칼럼과 에세이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가 정아은의 작가에 대한 에세이다.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한창 작가의 정체성에 대해, 매번 작품을 낼 때마다 성적이 기대 이하이니 그만 이쯤에서 때려쳐야 하는가를 몇 년 간 고민만 하고 있다가 그냥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에 빌려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동력이 된 첫 부분을 읽었다.
잘 쓰지 않겠다
끝까지 쓰겠다
나는 그저 많이 쓰겠다
글쓰기는 양이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정아은 작가가 하는 말은, 내가 이제까지 글을 써온 방식을 마치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잘 하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위로가 되었다. 성적은 늘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나는 그럼에도 꾸준히 썼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도 1년에 2작품, 많게는 3작품씩 꾸준히 론칭을 했다. 그중 몇 작품은 차마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처참한 성적으로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이미 그 성적이 나왔을 때 나는 차기작을 쓰고 있었고 그 차기작의 론칭일도 대부분 정해져 있을 때였으므로 쉴 수가 없었다. 정말 이렇게 하는 것도 재주다 싶을 만큼 나는 작품 수만 늘려가면서 그렇게 꾸준히 이 세계에서 살아남았다.
좋은데? 잘 쓰지 않아도 된다니. 이제까지 잘 쓰지 않고 열심히 써온 나도 존재 가치가 있다는 말이잖아. 그때까지 나는, 동료 작가들이 번번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보며(물론 번번이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나에게는 좋은 성적을 내는 작가들만 보였다) 나는 세상 무가치한 작가라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언제는 모 플랫폼에 이벤트를 제안했다가 '작가님은 그런 이벤트에 대상이 안 되십니다'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들은 적도 있었다. 내가 그렇지 뭐, 라는 생각에 며칠 동안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이런 세계를 모르는 지인들에게는 물론 말할 수가 없었고, 동료 작가에게도 초라한 느낌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동료 작가들에게 말을 했고 플랫폼 너무한다는 대답을 들었으나 솔직히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내가 그 이벤트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내가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웹소설은 일반 소설에 비해 출간 자체가 허들이 낮고 쉽기 때문에 출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적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꼭 완고를 쓰지 않고 초반 원고만 보여줘도 출판사들은 웬만하면 출간을 하자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출간한 이후에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작품 또한 그만큼 많다. 그러니 몇몇 잘 나가는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아등바등 경쟁하다가 도태되어서 나처럼 성적이 안 좋아도 꾸준히 쓰거나, 아니면 견디지 못하고 나가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작가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나는 내가 존재 가치가 없는 작가라는 생각에, 누군가 내 직업을 디테일하게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했다. "웹소설 작가입니다. 그런데 작품이 잘 되지는 않아요." 굳이 내가 인기 없는 작가임을 말하는 것은, 내 정체성에 그만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초반만 읽고는 꽤 오랫동안 그저 두었다. 그러다 우연히, 내 작품의 론칭일에 다시 읽게 되었다. 그것은 론칭일이 되면 작가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몇 달 동안 고생해서 내보낸 '내 아이'의 운명이 정해지는 날이라, 특별히 내가 할 일이 없어도 조마조마하며 휴대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게 된다. 나는 그 날에 휴대폰 대신 이 책,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를 들었다. 장르에 따른 작법 소개, 그리고 어떻게 그런 장르의 글들을 쓸 수 있었는지 경험담이 담담하게 펼쳐졌다. 그러다가 나는, 작가의 가장 아프고도 깊은 경험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부분을 읽게 되었을 때, 미안하지만 앞부분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는 머릿속에서 모두 휘발되고 말았다.
그 일은 작가가 문학상을 타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후에, 몇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 투고한 원고가 출판사에서 반려를 당했을 때 일어났다. 나도 숱한 반려를 당해 보았지만 웹소설 작가가 당하는 반려와 일반 소설 작가는 그 차이가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웹소설 작가는 일단 작가 허들 자체가 낮기 때문에 반려를 당해도 며칠 좀 괴로울 뿐 작가 정체성까지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정아은 작가는 꽤 유명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했고, 자신이 드디어 작가가 되었다는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진 후였다. 작가라면 당연히 출판사에서 글을 모셔가야 할 것이요, 그가 작품을 낼 때마다 평단에서는 '경이로운 작품이 나타났다'며 박수를 해야 할 것이다. 드라마며 영화계에서도 판권을 사기 위해 앞다투어 몰려들 것이다. 그것이 보통 생각하는 '작가'의 이미지이며 정아은 작가도 자신이 그런 작가가 된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열심히 쓴 글을 투고했을 때 투고한 출판사마다 그 작품을 반려하는 것이었다.
정아은 작가가 생각하는 작가와, 그가 맞닥뜨린 작가는 달랐다. 거기에서 그는 무너진다. 나는 작가가 되었는데, 더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도망친다. 다른 공부를 하고 대학원을 가려고 준비를 한다. 이제 작가의 삶은 접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대학원 원서를 내러 가는 날, 그는 결국 집밖을 나서지 못한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작가의 삶을 벗어날 수 없음을. 자신의 작품이 어떤 평가를 받든, 반려를 받든 어쩌든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인 것을. 그 통렬한 깨달음의 부분에서 나는 작가와 함께 멈칫거렸고 작가와 함께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맞아, 나도 그랬지. 성적이 안 나왔다 투덜대면서도 차기작을 썼고, 동료 작가보다 내가 더 대우를 못 받는 것 같아 가슴을 치면서도 그래서 결말은 어떻게 내야 할까를 고민했다. 웹소설 쓰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브런치 작가가 되어서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남편과 다투고 나서, 지인에게 상처를 받고 나서, 아이를 키우다가 지칠 때에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정아은 작가는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 새롭게 작가의 정의를 내렸다. 작가는 내는 작품마다 족족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평단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분기마다 문학상을 받고 출판사와 드라마PD의 러브콜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작가는 지극히 일부고 또 한 작가 항상 그런 '영광'을 누리지도 않는다. 정아은 작가가 생각하는 작가는 바로 '거절을 견디는 사람'이다. 출판사에서, 독자가, 때로는 함께 출간하자고 하는 편집자가 하는 거절의 말들을 견디어 내고 그럼에도 자신의 글을 써내는 사람을 정아은 작가는 작가라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정아은 작가 역시 예전에도 지금도 작가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 거절을 견디는 힘이 약했다. 작가로서의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매우 힘든 시절을 지나야 했다. 그럼에도 정아은 작가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렇게 '작가가 되었다'. 제대로 거절을 견디어 내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웹소설 작가는 누구인가? 단순하게는 웹소설을 쓰는 사람이 웹소설 작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보이도록 어디든 내보이는 사람이 웹소설 작가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견뎌야 하는 과정들이 참으로 많다. 론칭 되자마자 순위로 다른 작품과 비교가 되는 것을 견뎌야 하고, 동료 작가가 나보다 잘되는 모양을 견뎌야 하고, 출판사에서 선인세나 인세 비율로 다른 작가들과 차등을 두는 것을 견뎌야 하고, 플랫폼에서 작품을 차등 있게 노출해 주는 것도 견뎌야 한다. 그러니 웹소설 작가도 따지고 보면 숱한 거절 속에서 어떻게든 제 작품 하나를 세상 속에 내미는 사람일 것이다.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부끄럽다 하지 않으며 작품 속에 드러내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웹소설 작가이다.
그러니 나 역시, 최초 작품을 론칭했을 때가 아니라, 드디어 플랫폼 직계 계약 작가가 되면서 조금 더 많은 독자와 만날 수 있게 되었을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도 계속해서 만들어져 가는 웹소설 작가인 셈이다. 론칭을 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들 것 같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론칭일에 스트레스에 허덕이면서도 조금씩은 견뎌가는 힘을 길러간다. 아마 내가 죽는 날까지 내가 원하는 웹소설 작가로서의 '성공'에는 이르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숱한 세월을 견뎌냈고 꾸준히 작품을 론칭했다는 것에서 '작가의 자격이 없는 존재'가 아닌 충분히 '작가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도 작가가 되어 간다. 매일매일, 내가 선택한 길을 걸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