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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나비 Nov 14. 2024

작가에게 편집자란

<편집자의 사생활>을 읽고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와 <편집자의 사생활>은 자매 같은 책이다. 까닭은 전작의 저자 정아은 작가와 후작의 저자 고우리 편집자는 함께 작업을 한 적이 있고 그 내용이 각각의 책에 나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 책이 오묘하게 결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론 문체며 내용이며 구체적인 것들을 따져보면 다른 점이 더 많지만 다 읽고 나면 '자매의 책을 읽은 건가' 싶을 만큼 비슷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아마도 두 작가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사상이나 결이 비슷하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싶다.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정아은 작가는 위의 책에서 제가 '미물'임을 고백하며 자신과 함께 작업한 편집자들과 동료 작가들에 대해서 나름 '객관적'인 분석을 하고 있는데 그 편집자 중에서 고우리 편집자는 굉장히 유능하면서도 세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작가로서는 참으로 만나기 힘든 보석 같은 편집자이다. 하지만 고우리 편집자는 제가 이런저런 실수도 하고 작가의 마음도 잘 못 읽는 우를 범하기도 하는, 정아은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미물인 편집자'임을 고백하며 정아은 작가를 편집자가 참으로 귀하게 여길 만한 보배 같은 작가라 표한다. 이러니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그 시너지가 어떠하겠는가. 


"저는 미물이에요."

"아이고 미물은 제가 미물입니다. 편집자님은 제가 참 만나기 힘든 대단한 편집자님이세요."

"과찬이십니다. 저야말로 작가님을 만나 얼마나 기쁜지."


미물과 보석을 넘나들며 하는 대화들이 벌써 마음속에 그려진다.


작가와 편집자는 시너지가 잘 맞으면 참으로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친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편집자는 없다. 직접 편집자를 만난 적은, 출판사에서 여는 '작가의 밤' 등을 통해서가 아니고도 없다. 내가 일하는 웹소설계에서는 대부분 편집자가 작가를 직접 만나지는 않는다.(물론 아닌 작가들도 있다. 내가 웹소설 작가계의 '미물'임을 기억하라.) 작업도 주로 메일이나 톡을 통해서 하기 때문에 목소리조차 들을 기회는 별로 없다.(이것 역시 내 경우 한정이다. 내가 사람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를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슬프지만 내가 미물 웹소설 작가여서일 수도 있다.) 일반 소설이나 기타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웹소설계에서 편집자와 작가는 거리가 가까운 느낌은 아니다. 작품이 안 풀리면 만나서 술 한 잔 같은 문화도 물론 없다. 


(예전에 내 작품이 하도 똥망이라서 한 번 편집자가 만나자고 한 적이 있으나 내가 무서워서 '멀다'는 이유로 피한 적은 있었다. 그 편집자는 실력은 상당하였으나 카리스마도 그에 못지 않아서 내가 작업하는 내내 무서워하였다. 물론 그 편집자는 지금도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편집자라도, 내게 도움이 되었던 기억은 많이 있다. 한 번은, 내가 기한에 맞추기 위해 정말이지 글자수만 우겨 넣어서 원고를 보냈을 때였다. 당시 편집자는 꽤나 깐깐했고, 문장 하나하나를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분이었는데 내 원고가 어찌나 똥망이었던지 꽤 고민을 하신 모양이다. 그리고 12월 31일, 내가 남편과 아이와 함께 무슨 시골 초가집 같은 곳에서 문설주에 쾅쾅 이마를 부딪혀 가며 하룻밤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오던 길이었다. 편집자에게 전화가 왔다. (아 앞에서 전화를 안 한다고 했는데 가끔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다) 나는 왜 메일로 안 보내고 전화를 할까 생각하면서 전화를 받았고, 편집자의 주저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 원고가 제대로 망했나 보군. 예상했던 결말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편집자는 꽤 오랜 시간을, 내 원고가 얼마나 이상한지를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면서도 "아, 이야기가 두서가 없죠." "메일로 보낼까 했는데 너무 많아서." "지금 다 이해가 되세요?"를 열 두 번쯤 이야기를 했다. 메일로 적었다면 아마 졸업 논문 하나 쓰셨을 것 같은데 그런 분량을 말로 하려니 걱정이 많이 되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들으면서 그것을 적을 필요도, 그리고 기억을 할 필요도 없었다. '다 갈아 엎으라는 이야기군.' 작품에서 인물들은 계속 성격이 변했고 그저 독자들에게 재미있을 것이라 고안된 대사들은(하지만 불행히도 재미있지도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인물들을 벗어나 이리저리 튀었으며 한 마디로 스토리는 시궁창에 쳐박히고 말았다. 꽤나 초반 스토리가 신선하다 평가 받았었는데 중간 스토리가 이렇게 되다 보니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머리에 스팀이 오르는 것 같았다. 남편이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지 않으면 어쩌랴. 다행인 것은, 이것이 누군가와 함께 작업하는 것이 아니고 혼자 작업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밤을 새든 어쩌든 혼자서 이리저리 굴러가며 다시 쓰면 된다. 그리고 비록 망한 원고라도 베이스가 있으니 고쳐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정말로 그날로 집에 돌아가자마자 원고에 몰입했고, 단 며칠만에 새 원고를 써서 보냈고, 편집자의 극찬을 받으며(원고가 진짜 좋았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 똥망 원고가 사라져서 기뻐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원고로 론칭을 했다. 작품은 엄청나게 잘 되지는 않았으나 스토리적인 면에서는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작가로 데뷔하기 전에는 나는 작가란 혼자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쓰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는 것은 작가로서 무척이나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 많은 도움을 받는다. 동료 작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도 있고, 독자의 평가를 통해 글을 다시 되돌아보고 차기작을 더 신경쓸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존재는 바로 편집자라고 생각한다. 편집자는 해당 분야에 대해서 작가보다 더 전문가적인 면이 있다. 때로 작가들은 제 작품에 대해 무언가 조언을 받는 것을 수치스러워한다. 내가 부족해서 이런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편집자가 더 넓은 안목으로 작가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봐준다고 생각하면 그 조언을 수용하는 것이 더 수월해진다. 그렇다고 모든 조언을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고유의 목소리를 빼앗기면 작품을 쓰는 동력 자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의 사생활>을 읽으며,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데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던 편집자라는 분들도 나름 고충을 가진 한 사람의 인격체라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 계약서를 쓸 때마다 작가를 갑, 출판사를 을, 이라고(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라는 현실) 하는 것이 은근히 불만이었는데 고우리 편집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좋았다. 계약서상의 갑과 을이라도 쓰면서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편집자와 작가는 '좋은 작품'을 위해서 손을 잡는다. 누가 위에 서고 아래에 서는 것 없이 의견이 틀어지거나 마음이 안 맞는 부분이 있으면 서로 대화를 통해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런 협력 관계가 잘 이루어졌을 때 좋은 작품이 탄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편집자와 작가가 불화하면, 작품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다.)


작가가 좋은 편집자를 만나는 것이 참으로 행운이듯이 편집자도 좋은 작가를 만나는 것이 참으로 축복일 것이다. 다행히 지금 나와 같이 작업하시는 분들은, 나름의 특성은 있지만 정말 티가 나게 결격 사유가 있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점은 없다. 조금 안 맞거나 하는 부분들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있지만 크게 문제가 될 부분은 아니다. 무엇보다 글을 열심히 읽어주시고 고쳐주려고 하는 마음이 느껴지시는 분들이다. 편집자가 내 작품을 아껴줄 때에, 나 역시 좀 더 힘을 내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작가가 열심히 하는 것이 보이면 편집자도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의 사생활>을 통해서, 내게도 내 작품을 응원하는 좋은 동료가 있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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