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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단상>

바울의 이야기를 다룬 김학철 교수의 책

by 나무나비


얼마 전에 새로운 필라테스 센터를 등록했다. 첫 수업을 갔다가 깜짝 놀랐다. 강사분이 왔는데 목에 2000년 전에 로마에서 사용했던 가장 잔인한 사형 도구가 걸려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에게 '아니 대체 왜 지금 쓰지도 않는 로마의 사형도구가 당신의 목에 걸려 있습니까?'라고 물을 뻔했다.


대통령이 당선되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여러 평가가 있지만 꾸준히 댓글로 오르는 말이 있다. 바로 '범죄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말이다. 국무총리를 임명한 후에는 이제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쌍으로 범죄자이다'라는 댓글이 오른다. 나는 대통령이 왜 전과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찾아보았다. (궁금하면 찾아보기를 바란다. 별로 오래 안 걸린다.) 중요한 건 전과 자체가 아니라 '왜'인지인 듯한데, 그런 글은 꾸준히 오르고 아마 임기 끝날 때까지 오를 것 같다.


범죄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문장 자체는 그리 좋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따지지 않고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 범죄자 중에서도 가장 중한 범죄를 저질러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은 사람이 실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는. 심지어 그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도 귀족도 아닌 가난한 시골의 육체노동자 출신의 미천한 신분이었다. 그런 사람을 인류의 1/3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이 상황이 굉장히 놀랍지 않은가.


많이 접했다고, 절대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집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베개하기 딱 좋은 빨간색 표지의 책이 두 권이나 있지만 남편과 나 어느 누구도 그 책을 읽지 않아서 다만 제목만 알고 있다. 하지만 '존 스토트가 지은 빨간색 표지의 두꺼운 책'이라고 하면 바로 이름을 말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책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내게 예수님이 그랬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교회에서 하도 들으니까, 주기도문도 매주 하니까, 습관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니까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말을 주로 하였는지는 그저 주워들은 것 외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인이다 교회에 다닌다 하고 다니면서 어디 아프거나 힘들면 예수님을 원망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은 바울에 대한 책이고, 교양으로서의 기독교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다. 분명 기독교적인 내용인데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것이 굉장히 신기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가 오늘날에 이른 것이 굉장히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범죄자가 대통령이 되어도 계속 말이 많은 것이 세상인데, 단순 범죄자보다 더 심한 사람이 신이라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제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그것을 기념해서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고 차에 달고 다니고 집에 붙여놓고 벽에 걸어놓는다.


소설을 쓴답시고 첫 번째 단편 <야고보>를 쓰고는, 절망에 빠졌었다. 실은 내가 이 소설을 다 쓰면 유명해져서 미국에 인터뷰하러 가는 거 아닌가, 하고 혼자 김칫국을 마셨었다. 미국은 커녕 한국에서도 나밖에 안 볼 것 같은데 말이다. 쓸 때는 신이 나서 썼지만 초고를 쓰고 나니 캐릭터는 휘청거리고 문장도 날아다니고 내용은 구렁텅이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챗gpt에 어떤지 봐달라고 했더니 내가 쓰지도 않는 문장을 분석하길래 그냥 관두라고 했다.


그러다가 그냥, 이 과정을 즐겨야 겠다고 생각했다. 소설이 구렁텅이에 좀 빠지면 어떤가. 누군가는 라면 받침이 꼭 필요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소설을 쓰면서 다양한 책을 보았고 새로운 예수님을 만났고 다시 2000년 전의 유대 민족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도 느껴봤으니 나에게는 여러가지로 좋은 기회이다. 나도 아무것도 아닌 자인데, 너무 별것이라도 되는 듯이 구는 게 잘못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자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 살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솔직히 아무것도 아닌 자도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은 아무것도 아닌 자들로 태어나 아무것도 아닌 자들인 것처럼 십자가에 달렸고(당시 십자가형은 로마인이 아닌 식민지배 백성이나 노예가 받는 최악의 형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구원했으며 아무것도 아닌 바울을 불러서 그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게 하였고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공동체를 꾸리게 했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 이르러 아무것도 아닌 나를 불러서 마찬가지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계속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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