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일 설교 말씀은 베드로에 대한 말씀이었다. 베드로에 대한 말씀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베드로의 흑역사'인 바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말씀이다. 당사자인 베드로는 그 말씀을 가장 싫어하겠지만 놀랍게도 교인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씀은 그 말씀이다. 예수님의 수제자도 미끄러질 때가 있었다, 그 역시 그런 '흑역사'를 거쳐서 결국 위대한 순교자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며 나의 실패와 부족함도 위로를 얻는다.
주일 설교 말씀도 그런 말씀이었다. 베드로는 실패했고, 그 실패에 대해 뼈아픈 자책을 했으며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그런 베드로를 용서하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으로 세워주셨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 '실패'에 대한 말씀에서 나는 울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실패했다. 직장에서, 결혼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육아에서. 모든 부분에서 실패한 나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고, 마음 속에서 울려나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귀를 닫았다. 베드로처럼 나를 세우고 싶어하는 그분과 베드로처럼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나. 나는 나를 용납하고 인정할 수가 없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내가 알고 있는데.
그러나 계속해서 나를 두드리는 말씀에는 그만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 중에 남편이 있었다. 남편은 요즘들어 자주 교회를 빠진다. 나는 교육 봉사를 하므로 남편을 챙겨서 같이 집에서 나설 수가 없어 예배가 끝나고 나면 묻는 편인데, 그날도 남편은 교회에 가지 않은 것이었다. 어설픈 변명을 하는 남편을 보고 그만 화가 나고 말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왜 화가 날까. 남편이 교회를 가지 않아서, 남편 신앙이 걱정되어서, 그래서 화가 나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남편이 그분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화가 났다. 자신이 교인이라고 하면서, 예배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나는 믿으니까 세세한 것은 안 지켜도 되지, 교회 한두 번 빠지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 나는 그분을 사랑하는 구나.
그것이 정말 목숨을 걸 정도로 대단한,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아마도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고 예수님의 제자라면, 나는 베드로와 같이 대제사장 집 안뜰까지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잡히시고 나서 도망쳤을 것이다. 내 털끝 하나라도 다칠까 봐 집에 숨어서 이불을 덮고 떨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베드로는 나름 대단한 것이다. 부인은 했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가서 예수님의 지척에 있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갑자기 생각이 바뀌면서 베드로의 실패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통하게 울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후 부활하고 나서도 다시 고기를 잡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컸다. 하지만 예수님이 뻔히 듣고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부인을 하고 말았다. 베드로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분명히 실패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생각하기에도 그러했을까.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미리 알려주셨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가 실패를 하고 나서 닭이 울었을 때 뒤를 돌아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부활 후에는 베드로에게 찾아가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그것 봐, 내 말이 맞았지, 넌 역시 그런 인간이었어.' '차라리 오지를 말지, 면전에서 그게 무슨 짓이니.'라고 말하는 대신 엉뚱한 말씀을 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뻔히 자신을 부인한, 그것도 자신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뻔히 알고도 그렇게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그래도 내가 사랑한다'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네가 그런 짓을 하고도 나를 사랑하느냐, 뻔뻔한 것.'이라는 뜻은 분명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죄를 저지르기도 전에 그를 용서하셨기에.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미리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어쩌면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사랑을 읽어주신 것이 아닐까. 베드로는 그래도 대제사장 안뜰까지 들어왔고, 예수님을 지켜보았다. 다른 제자들은 도망친 상황에서도 그는 예수님이 걱정되었다. 저들과 한 패냐고 물었을 때 바로 예수님을 부인할 정도로 두려웠으면서도. 예수님 역시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희롱당하고 린치까지 당하면서 극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분은 베드로의 그 '최선의 사랑'을 보셨다. 그래서 미리 그가 자신을 부인할 것도 알려주시고, 실제 그 행동을 했을 때 뒤돌아 그를 바라보셨을 것이다. 괜찮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미 알고 있었고, 용서했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
남편과 다툴 때, 내가 서운한 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 남편이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다. 내가 원한 것은 따뜻한 말 한 마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인데 남편은 그런 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서 대화를 하는 시간에 설거지를 한 번 더 한다. 예배를 가라고 하면 가지 않고 어설픈 변명을 하다가, 저녁 예배는 온라인으로라도 들었다며 설교 말씀과 광고까지 줄줄 이야기한다. 나는 내 기준에 맞추어 남편이 나와 맞지 않는다 투덜대지만, 그것은 남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안뜰까지 들어왔듯이, 두려움을 이기고 그곳에 앉아 예수님을 지켜 보았듯이 남편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은 그 마음을 읽었고 나는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아셨다. 그래서 부활 후에 찾아가셨을 때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랑에는 정도가 없다. '네가 나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죽도록 사랑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신다. 아주 겨자씨만한 사랑이라도, 나를 사랑하면 그렇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날, 내가 실패했다고 절망했을 때 나에게도 같은 물음을 던지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사랑은, 내 목숨까지 내어줄 아주 대단한 사랑은 아니어도 상관 없었다. 그저 남편이 예배를 가볍게 여길 때에 화가 나는 정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전 예배와 저녁 예배까지 참석하는 정도, 그 정도이면 되었다.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사랑이 대제사장 안뜰까지 따라올 정도였듯이. 베드로도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당신은 내 사랑을 알아보십니다. 나도 몰랐던 사랑을, 스스로를 저주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했던 제게 그래도 네가 나를 사랑했던 거라고 당신은 알려 주셨습니다.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랑을 할 줄 알았지만 나는 그 정도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실패도, 부족함도 당신은 아시고 내 작은 사랑을 받아주셨습니다.
아이가 어버이날에, 분명히 학교에서 만들라고 해서 만든 작은 카드를 들고 온다. 누가 봐도 참 조악한 작품이지만 나는 그것을 받고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이가 표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비슷할 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당연하게 드리는' 예배, 내가 부족하다 생각하는 헌신도 그분은 기쁘게 보시고 그 마음을 알아주실 것이다. 다른 이들을 대할 때, 그들이 내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해도 어쩌면 그들이 나를 대하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에 용서를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중에 가장 집중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이제 곧 십자가를 지어야 함을 알면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인지하였음에도 베드로의 마음을 알아주신 예수님일 것이다. 편할 때는 누군들 이해하지 못할까. 사람이 다툴 때는 가장 민감하고 아프고 피로할 때이다. 그럴 때에 남을 알아주는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이 친히 가르쳐주시는 사랑이 아닐까. 오늘은 그 기록을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