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처음 만난 지 20년이 훌쩍 지난 친구들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이 술술 지났다.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우리 중의 한 명이 최근 아주 힘든 일을 겪었다고 톡방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는 다른 이야기들은 하면서 그 이야기만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힘든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금 어물대다가 대답을 했다.
"내가 임신을 했었거든."
마흔이 넘은 나이. 그 친구는 십여년 전부터 시험관을 준비했으나 수차례 실패했고 결국은 임신을 포기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마흔이 넘어서 자연임신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정신없이 떠들던 우리는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런데 왜 '했었거든'일까. 왜 힘든 일이었을까. 기쁨과 동시에 불안감이 우리를 휘어 잡았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아니고."
이 경악할 만한 이야기의 전말은 이랬다. 친구는 생리가 하지 않아서 조짐이 좋지 않다고 여겼으나 설마 임신일까 싶어서 그냥 몸이 안 좋은 거라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결국 너무 이상해서 테스트기를 했고, 임신으로 표시가 되어 산부인과에 갔다. 직장에서는 당장에 휴가를 내라고 했고 직장 동료들은 온 마음을 다해 축하를 해 주었다. 부모님께 알리고, 산부인과에서 산모수첩을 받고, 그렇게 모든 일이 폭풍처럼 지나갔는데.
"아이 심장이 안 뛴다고."
유산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임신 극초기의 화학적 유산. 갑자기 나타났던 아이는 그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친구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고 했다. 교회를 다니는 친구는, 왜 바라지도 않은 것을 주셨다가 다시 거두어 가는 것인지 하나님까지 원망했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유산 소식을 듣고 푹 쉬고 나오라 하고, 가족들은 어떻게든 그를 웃겨주려고 하고. 그래서 아무튼 지금은, 많이 회복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일이 아닌데도, 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니 왜 진짜로 바라지도 않았던 아이가 갑자기 생겼다가 이렇게 갑자기 없어질 수가 있을까. 누군가 친 아주 고약한 장난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체 이 친구를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친구와 나는 방향이 같아서 다른 친구와 헤어지고 단둘이 걸었다. 나는 무어라 할 말이 없어서,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되게 많은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많은 일을 겪었지. 그런데 엄마가 자식 없는 게 낫다, 무자식 상팔자라더라고."
"네 엄마가 그러는 거면 상처가 되지 않아? 네가 자식인데."
"근데 그냥 나는 그 말이 좋던데?"
어느새인가 우리는 같이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는 가족들이 계속 자기한테 이런저런 말을 걸면서 어떻게든 수렁으로 빠지지 않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자기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라, 그냥 그런가 보다 싶다고 했다. 감정형이 아닌 사고형인 친구의 성격 탓도 있었지만, 매사에 낙천적인 면도 있어서 그 깊은 수렁을 그래도 잘 건너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는 어떤 감정이 들면 그 감정을 깊이 깊이 공감해서 끝까지 이르러야 스스로 나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떤 감정에는 차라리 빠지지 않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감정이 꼬리를 물고 나쁜 생각까지 이어지면 사람이 진짜 수렁에 빠져서 나올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정말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제 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끌어줄 수 있는 성격도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도 같이 구렁텅이에 빠져버린다. 혼자만 수렁에 있고 싶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처음에 어떻게 위로를 해주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오히려 그 친구에게 더 힘을 받은 것 같았다.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툭툭 털고 일어서는 것을 보면서 나 역시 내가 처한 상황에 휘둘리지 말고 그냥 어쩔 수 없는 건 그대로 두고 나와야 겠다 싶었다. 우리는 타인을 구할 수 없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이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때에 그것은 반드시 타인에게도 영향을 주어서 '모두가 사는 길'로 인도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힘써 나를 오늘도 건져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