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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나비 Aug 15. 2024

공감의 오류

유독 나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나

나는 유독 거절에 민감하다.

고등학교 때였다. 여학생들은 초반에 무리를 짓는 것이 꽤나 중요하다. 무리에 들어가지 못하면 놀 사람이 없게 된다. 숫기가 없고 주체적으로 친구를 잘 사귀지도 못했던 나는 운이 좋게도 초반에 마음이 잘 맞는 세 명의 친구를 얻게 되어서 네 명이 무리지어 다녔다. 그중에 조금 기가 쎈 편인 친구도 있었지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잘 들어주는 착한 친구도 있었다. 나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학교 생활을 해 나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이 생겼다.

우리 무리라고 규정짓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와 종종 어울렸던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를 A라고 하자. A는 우리 무리의 한 친구(B)에게 갑자기 말을 안 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짝꿍이었고,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 B우리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A에게 화가 났으나 그것을 A에게 말하기는 또 어려웠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A가 나에게 지나치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계속 둘이 어디를 가자고 하고, 둘이 뭘 하자고 했다. 나는 그러는 것이 B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거절했고 얼마 후에 A는 자퇴를 했다.

A가 자퇴를 한 것이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는 성적이 좋지 않아서 담임에게 불려가 혼이 나기도 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A는 중학교 때 오래 따돌림을 당해서 혼자인 것에 민감하다고도 했다. 자퇴를 하기 전, A는 B에게 전처럼 말도 잘 걸고 했다고 전해들었다. 아무튼 어떤 것으로도 내 죄책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그룹에 새 친구가 들어왔다. 전학생이었는데, 외국에서 전학을 와서 그런지 조금 남다른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내가 가장 의지하고 좋아했던 그 착한 친구에게 달라붙으며 친한 척을 했고 그 착한 친구는 착했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았다. 좀 자리를 잡았다 싶었는지 C는 노골적으로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나와 C, 그리고 그 착한 친구가 함께 가는데 갑자기 착한 친구에게 자기하고 둘만 저쪽으로 가자고 하는 식으로 나를 노골적으로 소외시켰다. 

나는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날 버리지 말아라, 같이 친하게 지내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 역시 한 친구를 소외시켜서 자퇴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더 다가가기 어려웠다. 나는 스스로 외톨이가 되었고 그후로 반년을 그냥 혼자 지냈다. 시간은 미치도록 가지 않았고 나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럭저럭 버티니 반년은 흘러갔고 2학년이 된 나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서 다시 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꼭 그 자퇴생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밀려났을 것 같다. 나를 싫어하고 밀어내는 사람이 있으니 더는 그곳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나를 싫어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런 똑같은 일이 마흔이 넘은 지금에 또 일어나고 있으니, 이것은 상황의 문제보다도 나의 문제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오늘, 나는 나를 싫어하는 그 엄마가 단톡방에 등장한 것을 보았다. 별일은 없었다. 그저 등장만 했을 뿐이다. 나에게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단톡방에 대화가 있었고 거기에 등장했고 적절한 말을 남겼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 다시 스트레스가 올라오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고 나쁜 기분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얼굴을 본 것도 아니고 글만 봤는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 생각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서 밀어내는 사람은, 어떻든 '선택적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 원인을 내가 제공했을 수도 있지만 그 옛날의 C도, 그리고 지금의 그 엄마도 아무 일도 없었거나 혹은 언쟁이 있었어도 이미 서로 사과를 한 사이라서 사건은 표면적으로 종료가 된 상태이다. (그 옛날에도 나는 C와 다툰 적도 없고 무슨 대화를 깊이 나누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C와 그 엄마는 나를 미워했고 노골적으로 밀어내거나 혹은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이것은 명백하게 그쪽의 책임이고 잘못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C와 그 엄마 모두 내게는 공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기분일지, 자신의 그런 행동으로 내가 어떤 타격을 받을지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오히려 '지나친' 공감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를 싫어하고 밀어내는 사람들에게. C가 밀어내니 그냥 밀어내는 대로 밀려나서 혼자가 되었다. C가 원하는 모습이 그거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말이다. 나중에 C와 다른 반이 되고 나서야 다시 친구를 사귀고 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나를 미워하는 그 엄마도 마찬가지다. 그가 나를 밀어내고 소외시키니, 그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나는 뭐 하나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근 한 달 전에 갔던 모임에서도 나는 입도 제대로 뻥긋하지 못했다. 그의 눈치가 보여서였다.

왜 나에게 의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 이에게 나는 더 공감을 하고, 더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고, 더 그들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나. 만약에 내가 어릴 때부터 서로 감정 소통이 원활하고, 내 할 말을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으며, 내 최초 양육자와 감정을 서로 교류하는 것이 어려움이 없었다면 나는 나에게 공감하는 사람에게 더 잘 공감해주고, 나를 싫어하고 공감하지 않으며 밀어내는 사람에게는 더는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엄마는, 나의 최초 양육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힘들고 괴로워 할 때 달래줄 줄도 몰랐고, 내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묵살했다. 그러면서 내 진짜 모습이 아닌, 자신이 생각하는 '내 모습'을 내게 강요했다. '너는 약해.' '너는 이런 것을 잘 먹지.' '너는 못됐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는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인정해주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자신의 문제로 가득 차서 나를 제대로 봐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왜곡된 나를 진짜 나로 인식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무조건 타인에게 나를 맞추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내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대신 꾸며진 말을 해대는 아이가 되었다. 그러니 나는 거절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내 부모로부터도 거절되었기 때문이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용납 받지 못한 아이는, 그러므로 거절을 느낄 때마다 더 간절하게 용납되기를 바라도록 자랐다.

잘못은 최초 양육자에게 있었다. 그는 나를 그렇게 키워서는 안 되었다. 일단 자신의 상처에서 벗어나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나의 감정과 상태를 용납하며 나를 제대로 훈육했어야 했다. 하지만 엄마는 늘 세상에 대해 불평불만을 했고, 나의 아빠를 비롯한 모두를 욕했으며, 너도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나에게 잘하라고 협박했다. 나는 내가 아닌 내가 되어 엄마에게 용납받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나를 최초로 거절했던 사람은 바로 엄마였고, 나는 나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마치 엄마에게 용납 받으려는 아이가 되어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자기 기분에 따라 선택적 공감을 했던 엄마, 그 밑에서 자란 나는 그래서 거절에 취약하고, 나를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공감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의 이름만 봐도, 그 사람이 톡방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의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고 싫으니까. 자꾸 공감을 하게 되고, 그에게 공감을 하면 나를 밀어내야 하는 것이 아프니까.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처음부터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을 뿐인데, 나는 오늘 또 그렇게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제 틀에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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