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논리는 정신의 분열증을 낳고 나는 가난한 마음으로 글을 쓰지
Mild High Club- Going Going Gone
‘드디어 글을 쓸 수 있겠군’ 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여러 개의 글쓰기 주제들이 산란해 있는 머릿속에 불평의 형태로든 비판의 형태로든 ‘문장들’이 마침내 꾸려졌을 때이다.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문장들이 떠올랐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전, 그러니까 문장들이 떠오르기까지의 생각들 혹은 인상들이 폭죽처럼 동시에 빛을 발하는 과열현상이다.
이 때 모든 생각들과 인상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다. 가장 정확한 묘사는 유투브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생각들은 마치 유투브의 인터페이스처럼 구성되어 있다. 유명인의 결혼식 이미지, 이국적인 소년들의 슬픈 이미지, 저녁식사 이미지들로 생각이 옮겨 가기 까지의 시간은 그 마우스 커서 그러니까 0.5센티미터 남짓과 비슷하다. 정신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기에 정신이라지만 요즘 (내) 정신은 너무 빠르다. 생각들과 인상들간 순서가 더이상 없어지고 모든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팡-팡 터져버린다고 느껴질만큼. 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은 멀미와 달아오르는 볼, 경미한 두통이다.
그래서 나는 며칠 내내 집중력 장애를 겪고 있는 것만 같다. 읽어야 할 혹은 읽을 수 있는 논문는 너무 많고, 봐야할 혹은 볼 수 있는 교양도, 삶에 대한 지혜도, 철학도, 실소를 선사할 영상도 너무 많다. 하나씩 음미하기 보다는 마음 급한 욕심쟁이처럼 한입 빨리 물어 뜯고 꿀꺽 삼키기 전에 또 하나 물어 뜯고 삼키고 이런 것의 연속이다. 스크롤 내리는 순간에 봐둔 흥미로운 영상이 너무 많아, 하나를 클릭 해 놓고도 중간까지를 못 보고 옆의 영상으로 옮겨간다. 아이쿠, 생각도 부스러기처럼 훌훌 부서지고 흩어져 버렸다. 지식은 점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지식과 점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지식 간 점선이라고 하던데 여기서 생각과 인상들 간에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우연적인 연관을 제외하고, 한꺼번에 등장하는 생각들 내지는 이미지들의 동시성으로 인해 어떤 생각도 사다리를 댈 만큼 단단하게 존재하지 못하고 그저 떠나가 버리는 탓이다.
생각이 이런 식이라면 인생에서 내리는 선택들도, 그 삶의 모습 자체도 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분열되고 ‘선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 말이다. 세상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너무나도 많은 선택지를 제시한다. 이 선택지들은 1번 2번 3번…숫자가 적힌 매뉴얼이 아니고 동시다발적으로 팝업(pop-up)하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말그대로, 선택지 그 자체이다. 좋고, 재밌고, 유용한 것은 너무나도 많아 다수를 동시에 선택하는 분열이 발생한다. 그런데 다수를 동시에 선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어느날 아트 잡지를 취급하는 유명한 서점에 널리고 쌓인 ‘아티스틱’을 보고 질려버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날처럼. 또 어제 저것을 택했다 오늘 이것을 택하는 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역사가 없을 수도 있다. 어제는 냉소적인 조언을 택했다 며칠 후에는 인간을 믿어라 한다. 알고리즘이 다른 입력 값을 넣기만 하면 어제, 오늘, 내일 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변화하듯.
콘텐츠의 생산 속도와 그것이 동시다발적으로 진열되어 있는 방식, 이런 특성이 가져오는 특유의 가벼움은 내용 혹은 지식의 권력화, 그리고 파시즘의 반대에 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콘텐츠의 논리는 아무것도 깊게 음미하지 못하는 병적인 분열증을 수반한다. 방법은 이 컨텐츠의 논리에 충성심을 바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콘텐츠들을 그것의 생산 속도와 디스플레이 방식에 역행하여 대하는 것…인터넷에서 배운 레시피를 수첩에 옮겨 적고 체화하는 것, 10분의 영상이 10분 그 이상이 되도록 하는 것, 떠오르듯 존재한 내용을 그 존재방식 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오래 음미하는 것. 혹은 반대로 콘텐츠들을 그것의 생산속도와 디스플레이 방식에 딱 순행하여 대하는 것. 가벼운 것은 가볍게 대하되 생각의 심지는 또 다른 어딘가에 분리해 둬야한다.
그런데 이것은 엄청난 자제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콘텐츠의 논리에 대한 안쓰럽고 힘겨운 싸움일 수밖에 없다. 콘텐츠와 분리되지 않고서 콘텐츠의 논리를 이기기는 매우 어렵다. 같잖은 아날로그를 가지고는 콘텐츠 논리에 우위를 가질 방법이 없다는 것은 경험상 알고 있다. 콘텐츠를 밖에서 바라보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일말의 세레니티, 고요를 가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생각이 잦아들게 하고 자신의 맥박이나 호흡에 집중한다던지 기막히게 멋진 앨범 하나를 통째로 감상만한다던지 하나의 질문에 생각을 집중하는 집요함 같은 것. 낮은 환하고 모든 요소들이 속속들이 보이지만 밤이 되기 시작하면 남는 것은 먹색의 하늘과 더 짙은 먹색의 육지 뿐이듯 듯 정신에도 불빛이 꺼지는 밤이 필요하다. 고요라는 단어는 지겹고 고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의 수행과 실천은 전혀 그렇지 않다..긍정과 긍정의 세상속 고요는 부정이라..방법으로써 고요라는 것도 어딘가 어폐가 있지만.
그리고 나는 글을 썼다. 양 볼을 때리는 파도 속에서 문장이 하나 올라오면 그것을 잡고 기어나온다. 한 문장은 두문장이 되고 두문장은 세문장이 된다.
파도들의 정체는 또렷해지고 나는 조금의 고요를 되찾는다. 각자는 자신을 둘러싼 내용들을 청순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생각해 볼 수단이 필요하다. 언젠가 다시 내용들의 세계를 탐닉하다 못해 허덕이게 되겠지만 분열증의 종말을 맞지 않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동아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