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말레이시아. 어쩌다 보니 방콕.
나도 모르는 사이 말레이시아로 해외취업을 해 근무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두 차례나 이직을 했고, 20대 후반을 신나게도 보냈다. 말레이시아에서 3년 반을 살게 될 줄이라곤 꿈도 꾸지 못했었는데, 하물며 태국에서 일하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인터뷰 과정은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따로 글을 쓸지 모르겠다. 짧게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건 정말 힘들었다는 점. 사실 인터뷰의 수준이 높거나 기술적인 질문이 많아서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인터뷰 보는 과정이 3개월이나 걸렸던 점과 채용팀의 늦은(아니면 아예 없는) 피드백이 가장 힘들었다. 추가로 오래 걸렸던 이유는 인터뷰 단계에서 태국의 가장 큰 명절인 송크란이 있었던 것. 송크란을 지나고 나니 유럽팀이 장기휴가를 가는 바람에 세월아 네월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최종적으로 떨어지게 되더라도 좋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회사와 팀에 대한 좋은 인상을 받았다. 매니저 레벨에서 VP에 이르기까지 단계별로 팀에 대해서, 이 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인터뷰어들이 팀에 대해서 느끼는 점과 채용하는 포지션에서 바라는 점이 각자 다 달랐던 건 정말 흥미로웠다.
경력을 다 합쳐봐야 5년이 채 안 되는 나를 VP가 보기에는 얼마나 애송이로 보였을지. 그런데도 이야기를 막거나 가르치려들거나 하는 점이 전혀 없었다. VP 인터뷰까지 보고 나니 정말 여기서 떨어져도 기분 좋게 다음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터뷰어들이 Malaysian - Italian - Korean - South African - British로 이어졌던 것도 정말 재밌었다. 다국적, 다문화 팀에서 일하는 게 즐거웠던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인터뷰 과정에서 진을 빼고 나니, 합격부터는 왠지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말레이시아에서 일하고 있던 곳에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승인을 받기까지 고작 3일이 걸렸다. 비자를 취소하고, 텍스 클리어런스를 하고, 말레이시아 출국까지 두 달간의 여정이 눈 깜짝할 새에 순식간에 흘러갔다.
방콕 지사에서 리로케이션 과정을 순조롭게 도와준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항상 나를 애먹이던 취업비자 과정이 이 회사에서는 너무나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태국 입국을 위해 비자를 받는 과정도 단 하루 만에 모든 과정이 끝났다. 방콕 입국 티켓과 방콕에서 머무를 호텔 부킹까지 아주 빠르게 진행됐다.
이렇게 모든 과정이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와중에,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곤 했다. 너무 순조롭게 일이 풀리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비자, 호텔, 회사 계약까지 모두 다 준비가 되어있었다. 단 한 가지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내 마음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3년 반을 살았다. 정착하기가 쉬운 나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주 기간이 2년이 되어가는 시점부터는 말레이시아가 정말 '내 집'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든 친구들도 많았고, 적응이 되고 나서는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생활이 너무나도 편했다. 좋아하던 카페, 자주 가던 식당, 매일 걷던 퇴근길. 떠날 때가 되니 이 곳도 다 추억으로 남겠구나 아쉬워졌다.
방콕에서 거주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태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정이 많이 든 것도 있었지만, 항상 다음 목적지는 '싱가폴'이 되지 않을까 어렴풋이 생각하곤 했다. 이곳저곳 문을 두드렸지만, 연이 닿지 않는 나라였다. 그렇게 나는 태국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수완나품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하던 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본격적으로 우기가 시작되는 6월 마지막 날 나는 태국에 도착했다.
바로 다음 날 첫 출근을 앞두고, 으슬으슬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켜지 않았는데도 추워서 이불을 돌돌 말았다. 두 시간마다 깨어 식은땀에 축축해진 몸을 다독이며 다시 잠을 청했다.
출근 첫날. 잔뜩 긴장한 상태로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회사에 도착했다. 밝고 깨끗한 느낌의 사무실. 9시 출근에 10분 일찍 도착했는데 웬 걸. 아무도 없다. 뭐지?
다음 이야기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