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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엄마곰 Mar 24. 2022

그저 그렇게 피고 지면 좋겠다.

불쑥 피어도 또 당연한 듯 질 수 있는. 

울지 말고, 욕해버리고 잘 살아.

-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21,300번째









아 이 책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는 이 책을 펼쳐 들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한, 그러나 닿길 바라는 통화"를 엮은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왜 이리도 울고불고한단 말인가. 솔직히 나는 별 이벤트도 없이 성장해온 사람이 아니었던가.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부족함이 없는 집에 태어나 복작복작 형제들과의 우애도 누리고, 정이 많은 부모님께 부족함 없이 사랑받고 자라 (지금도 부모님 그늘에 살고 있고), 적당한 학교, 적당한 직장, 적당한 결혼을 하여 보석 같은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러니 엄연히 말하자면 이 책의 반 이상은 나는 겪지도 못했을 일이라는 거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에게 얻어맞는 중이다. 호되게 혼이 나는 중이다. 맞다. 어쩌면 이 책은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한, 그러나 닿길 바라는 말들"임과 동시에 "누군가에게서 들어주지 못한, 그러나 한 번은 들었어야 할 말들"인 거다. 나는 들어주지 않은 죄로 혼이 나고 있는 거고.


평소에는 물러 터진 순두부 같은 게, 특정 순간에는 얼음궁전을 짓는 엘사보다 차가워지는 그 망할 놈의 성격 때문에 9번을 잘하고도 1번으로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세상 무슨 죄를 지어도 용서할 것처럼 달달한 아홉 번으로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어놓고서는, 갑작스러운"그만"을 외치며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물론 내 딴에는 그 모든 순간들이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걸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테다. 더 큰 일들도 덤덤하던 녀석이 그저 한마디 말에 과거형이 돼버리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내게 마지막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고. 아니, 듣지 않았다는 게 더 적합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종종 쓴 약이라도 삼킨 듯 마음이 썼다. 매 순간은 아니지만 살며 불쑥 떠오를 때마다, 그때 용서를 했더라면 그 사람과 나는 달랐을까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제와 생각한 듯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난 그렇게 종종 죄지은 사람이 되곤 했다. 따지고 보면 9번을 달고, 한 번을 썼으니 대체로는 단 사람이었다고 우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나는 안다. 그 마지막이 참 아프다는 것을. 아픔이 모조리 가시고 나야, 그 앞의 달았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때로는 아픔이 길어 달았던 기억조차 같이 희미해지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그 사람에게서 들어주지 못한 우리의 마지막 날을 이 책을 통해 들으며 온 마음이 아프게, 온 가슴이 시리게 맞는 중인 거다. 그때 이야기를 들어주었더라면, 지금쯤이면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는데, 들어주지 않은 죄로 막연한 죄책감이 남은 거다. 무엇을 잘못했고 잘했는지는 기억도 안 나면서, 차갑게 돌아서던 내 모습만이 두고두고 아픈 거다.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보니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참 오래도 미안함으로 품고 살아온 거다. 그러는 동안 내 마음이 상한지도 모르고, 내 마음이 시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바보처럼 죄책감만을 품었다. 이 책에서 전화를 거는 이들은 그렇게 뒤돌아서버린 이들을 미워하다가, 원망하다가, 아파하다가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 그리움 단계에서 비로소 상대방도 나처럼 울었겠구나, 상대방도 나처럼 아팠겠구나 하며 이해를 한다. 그러면서 알았다. 아, 내가 정작 아홉 번 참았던 내 마음은 위로해준 적이 없었구나- 하고. 이제라도 나를 좀 토닥여줘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 이제야 겨우.  









이제는 봄이 되면 당연한 듯 꽃은 피고 핀 꽃은 또 당연한 듯 지고하듯,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꽃이 피고 지듯 당신도 나에게 가끔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라도 당신의 이야기라도 좀 들어줄 수 있게 나에게 좀 피면 좋겠다. 그리고 꽃이 질 때만큼의 아쉬움으로 나에게서 졌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길가에 벚꽃이 지듯, 또 목련 색이 변하듯 나 역시 당신이 지는 것도 담담하겠지. 반대로 또 당신에게도 내가 그렇게 꽃처럼 피고 지면 좋겠다. 어디엔가 박혀 계속 당신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닌, 또 봄이 갔구나- 하는 덤덤한 말처럼 "또 네가 나에게서 갔구나"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서로의 가슴에 또 미련처럼 서로의 얼굴이 피어나면 곧 질 거라며 그냥 덤덤히 지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렇게 서로에게 우리는 가끔 불쑥 피어도 또 당연한 듯 지는 사람으로 피고 지면 좋겠다. 


이제야 나는 내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턴다. 너도 부족하고 나도 부족했던 시간들에 대한 죄책감은 탁탁 털어버리고, 그래도 아홉 번 다정했던 그때의 나에게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쩌면 나도 오늘, 아주 오랜만에 한걸음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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