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은 단순히 ‘한 장의 사진’ 혹은 ‘한 줄의 대사’로 정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련의 놀이 과정에 가깝다. 필자는 밈이 다음 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한다.
주목 → 놀이화 → 대중화 → 소멸
너무 웃겨서 주목받은 콘텐츠가, 이를 활용하고 전파하는 놀이로 확장되고, 매체를 통해 대중화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지고, 상업적으로 사용되거나 너무 유명해져 대중이 즐기던 의미에서 벗어나면서 소멸한다.
이 과정이 가장 근명하게 드러난 것이 가수 비의 ‘깡’ 밈이 되겠다. 올드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여러 세대가 공통으로 알만한, 밈의 정석을 밟은 사례가 깡임을 이해 바란다.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네
비 <깡> 뮤직비디오
2017년 12월 발매된 비의 앨범 <MY LIFE 愛>의 수록곡 ‘깡’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 올라왔다.
시작은 미미했다. ‘요즘 애들 유행어’를 배워 오신 부장님의 감성처럼 중요한 건 빠져있으며 쓸데없는 건 많다는 평이었다.
물론 이것이 추후 ‘깡’ 밈의 핵심이 되었다. ‘어딘가 웃기고, 뭔가 할 말이 샘솟는 웃김’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 댓글에서는 이를 ‘가죽케이스 낀 삼성폰 감성’이라고 표현해 뜨거운 공감을 샀다.
1단계. 주목
주목이 시작된 것은 대략 2018년 3분기부터였다.각지에 숨어있던 입담꾼들이 몰려와 재치있는 감상평을 남기기 시작했다.
<깡>이 주목받기 시작한 이유는 이러한 댓글들에 있다.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댓글을 즐기기 위해 뮤직비디오를 찾아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깡> 뮤직비디오에 달린 '비 시무20조'
그리고 한 ‘팬’의 댓글이 올라왔다. 이름하여 ‘비 시무 20 조’라는 제목의 댓글은 어록으로 남아 여기저기서 활용되었다. 비의 부활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이 팬이 비를 향해 ‘팩폭’을 날려 화제가 된 것이다.
이 팬은 사람들이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나 ‘깡’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로 추정되는 부분들을 콕 집어 ‘시무 28조’를 패러디한 시무 20조로 댓글을 남겼다.
이 상소문은 비의 시그니처 동작인 ‘입술 깨물기’ 등을 금지하고, 깡 뿐만 아니라 평소 비 노래들도 언급되어 대중의 공감을 사고 웃음을 자아냈다.
그렇게 깡은 본격적으로 대중의 놀이가 되었다. (물론 비가 이를 방송에서 쿨하게 받아들인 모습에 안심하며 글을 쓴다)
2단계. 놀이화
학술적으로 놀이화는 다음과 같이 놀이의 3가지 전통적 요소를 갖추게 되었을 때를 말한다.
자발성: 외부의 보상과 관련 없는 자발적 행동이다.
분리성: 놀이 기간 동안 일상생활의 공간과 시간에서 이탈된다.
규칙성: 놀이 참여자의 행동을 지배하는 규칙이 존재한다.
밈도 놀이와 다를 바 없다.
깡을 가장 잘 놀린 댓글에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며, 놀려야 한다는 의무도 없었다.(자발성)
화제가 된 댓글들에는 어느 정도의 규칙도 있는데, 비를 향한 부정적 비방보다는 해당 작품 혹은 무대 위의 비에 한해 적정선을 지킨 댓글이어야 한다는 무언의 규칙이다.
예를 들어, 비의 노래 ‘차에 타봐’ 중간에 나오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토익(TOEIC)’처럼 들린다고 표현하거나, 영상 속 춤 동작을 ‘척추 수술한 강아지’라고 말하는 등.(규칙성)
그리고 현실에서는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월드 스타 비’임을 알지만, 놀이 기간에는 현실과 분리된 다른 차원의 인식이 작동한다.(허구성)
3단계. 대중화
그렇게 사람들이 하루에 한 번은 꼭 깡을 본다는 ‘1일 1깡’ 운동을 펼쳤고, 안무 커버 영상도 매일같이 올라왔다.
그리고 드디어, 2020년 5월 즈음, MBC 예능방송 <놀면 뭐하니?>에서 비를 초대해 본격적으로 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밈이 대중매체에서 소재로 채택할 정도로 대중적인 코드가 되었다는 것이다.
해당 방영분에서 비는 ‘화려한 조명은 포기 못 한다.’ 등 ‘비 시무 20조’에 대한 본인의 입장까지 밝히면서 화제가 되었고 이제는 전국적인 신드롬이 되었다.
이후 댓글들이 그렇게 원하던 비x농심새우깡 광고도 결국 세상에 나왔고, 놀면 뭐하니를 시작으로 활동을 다시 활발히 재개한 비는 뜨겁게 환영 받았다.
4단계. 소멸
깡은 많은 이들이 그리워하던 연예인에게 제2의 전성기를 안겨주었고, 충분히 밈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적절히 대중화가 되어 밈치고 꽤 오랜 기간동안 화제성을 보였다.
그리고 <깡>도 소멸의 단계를 밟았다. 더 이상 깡에 대해 새로 해석할 여지가 없다고 느껴졌는지, 뿌듯하면서도 허무함을 느끼는 듯한 댓글들이 깡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트위터, 밈의 시발점
우리나라 대다수의 밈은 커뮤니티와 트위터에서 시작된다.
특히, 글자 수 제한이 있는 트위터 환경에서는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다들 이해할만한 짧은 말에 뉘앙스를 담거나, 한 장의 사진으로 말을 대체하는 편이 쉽고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트위터 발 밈들도 깡과 비슷한 생애주기를 거친다.
슈슉 슉 시X럼아
인터넷 방송 플랫폼 ‘트위치’에서 청각 도네이션으로 종종 사용되던 문구다.
기계음이 ‘슈슉.슉.시.시X럼아.슈슉.시.시’ 등으로 발음되는 긴 텍스트를 읽다 보면 시끄러워 방송인을 괴롭힐 방법이 된다.
한동안 잠잠했던 이 문구가 다시 널리 알려진 계기는 아래 짤이다.
출처: 경향신문
1단계. 주목
트위터에서 입소문이 난 해당 짤은 중고거래 도중 자동완성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슉슈슉’ 문구가 전송되고, 이후 서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 더해져 웃긴 사건으로 화제가 되었다.
2단계. 놀이화
그렇게 다른 게시물과 댓글에도 등장하며 적재적소에서 웃음을 자아내던 와중에, 문구에 안성맞춤이 돌하르방 조형물과 가게들의 센스있는 간판까지 소개되면서, 놀이화될 소재가 풍부해졌다.
출처: 트위터
한 누리꾼이 제주도 ‘호텔 난타’의 독특한 돌하르방 조각상을 이 밈과 결합해 또 하나의 밈을 만들었고, 이처럼 새로운 밈들도 ‘슉.슈슉’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트위터에서 다시금 확산되었다.
3단계. 대중화
출처: 충주시 인스타그램 꽤 높은 인지도를 쌓은 ‘슉.슈슉’은 홍보성 게시물에도 빈번히 사용되었고, 심지어 충주시 공식 인스타그램의 ‘폭염경보’ 게시물에도 등장해 이미 충분히 대중화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4단계. 소멸
출처: SNL 2021년을 달궜던 이 밈은 (그렇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유머다) 21년 하반기에 신조어를 주제로 한 SNL의 한 에피소드에도 방영되어 전성기를 찍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소멸의 단계를 밟아 조용히 사라졌다.
이렇게 두 유명 밈 사례를 통해 밈의 생애를 살펴봤다. 개인적인 이론이긴 하지만 꽤나 일리 있는 구조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