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분노의 감각을 찾아서
오늘자 신문에는 유독 빡치는 이야기가 많았다. 부산의 한 요양병원에서 코로나 집단감염이 발생했다는 기사. 코로나의 끝은 결국 요양병원이라는 첨언. 코로나에도 불평등이 있다고, 전염병은 약자에게 더 가혹하다고 말하던 숱한 사설들이 떠올랐다. 해당 요양병원에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에 걸린 환자가 많아서 거리두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었을 거라고 한다. 대부분이 고령자라 이번 집단감염이 더 위험하다고.
병원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해 코호트 격리 수준까지 이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3월 대구에서는 정신병동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해서 코호트 격리 조치가 내려졌다. 이미 사회로부터 격리된 그 폐쇄병동에 다시금 내려진 코호트 격리를 보며 꼭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 떠올랐었다. 인간이 아닌 좀비들을 관아에 처넣고 문을 걸어 잠그는 장면이 생각났다. 화가 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자 기사를 읽고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눈물이 고였다. 그곳에는 몸 또는 정신, 또는 둘 다가 온전치 않은 노인들이 수두룩 빽빽할 것이다. 바깥은 콧구멍만 내놔도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데, 그들은 방역이라곤 되지 않는 병동 안에서 영문도 모르고 코로나에 걸려갔을 것이다. 다들 늙었고, 무기력하겠지. 치매 등으로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환자가 절반에 이른다고 했다. 코로나가 뭔지도 모를 그들에게 이상하게 감정 이입이 됐다.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나, 예전 같으면 화가 났을 텐데 그냥 괜히 슬펐다.
아프가니스탄에 여성 헬스장이 생겼다는 기사도 있었다. 현지의 한 여성단체에서 세운 곳이라고 한다. 레깅스에 브라탑은 개뿔 부르카나 니캅을 입고 운동을 해야 한다고. 이슬람 여성 하면 떠오르는 그 가오나시 같은 복장이 맞다. 기사 사진도 그런 가오나시 같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싸이클을 타는 모습이었다.(아래 첨부) 그 나라에서는 이조차도 용납이 안 되었던지, 헬스장 이용자들을 향한 언어폭력과 위협이 심각하다고 한다. 헬스장에 계속 다니면 죽이겠다고 돌을 던진다고, 그래서 헬스장이 창문도 없는 지하에 있다고 하는데… 이 상황이 빡쳐야 하는데 이상하게 너무 슬펐다. 까만 김 같은 천을 온몸에 둘둘 감은 여자들과 싸이클의 조합에서 아이러니를 느끼고, 그것도 못 참아주는 그 나라 문화에 분개해야 하는데 그냥 뭐랄까. 저기서 싸이클 밟고 있는 저 여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으로 운동을 하고 있을까, 여기까지 사고가 미치니까 이상하게 슬퍼졌다. 그래서 애꿎게 신문 읽다가 코가 시큰해졌다.
이상하게 요즘은 빡치지가 않고 슬프다. 분명 좋은 신호는 아니다. 분노야말로 상황을 변화시킬 가장 큰 동력이 되곤 하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늘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을 목격할 때마다 화가 났다.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서 화가 났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어도, 뭔가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꼈었다. 그리고 분노는 그 느낌을 표출하는 가장 뚜렷한 방법이었다.
분노 대신 슬픔을 느낀다는 건 변화에 대한 기대가 꺾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슬픔은 곧 무력감이다. 내가 분노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는, 어차피 이 세상에는 똑같은 일이 계속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라는 무력감. '내가 뭐라고'라는 자조와 옹색함. 무력해서는 안 되고, 무력감을 느껴서는 더더욱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요즘은 자꾸, 슬퍼진다.
아무래도 일상의 우울함과 한껏 낮아진 자존감이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신문을 읽다가 자꾸 시무룩해지고 눈물이 고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사실 기분이 더러웠다. 원래 같으면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쌍욕을 박으면서 읽었을 텐데 싶어서. 내일은 좀 마음을 다잡고 신문을 읽어야겠다. 건강한 분노를 느낀 지가 오래되었다. 내 정신머리가 별로 건강하지 않다는 뜻이겠지. 그걸 깨닫고 나니까 식탁에 편하게 앉아 신문이나 넘기고 있는 스스로가 좀 빡쳤다. 어찌 됐든 빡치는 감각을 되찾는 건 좋은 신호다. 내일은 좀 더 빡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