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마가 간다(시바 료타로) X IB를 말한다(이혜정, 이범 외)]
“점을 찍는 역사 수업을 하세요.”
마지막 실습이었던 교대부설초등학교 실습에서 담임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씀을 떠올리며 수업에 참관했다. 아이들은 삼국시대-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과 살수대첩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교과서와 선생님이 준비하신 추가자료를 통해 학생들은 살수대첩의 전개와 주요 사건 등을 배웠다. 아마 이렇게만 끝났으면 선생님의 교수력과 을지문덕 장군 최고...! 정도만 기억에 남는 무난한 수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시더니 말씀하셨다. “여러분도 이렇게 살수대첩의 한 장면을 정지 장면으로 표현해봅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연구소)
고민하던 아이들은 ‘찰칵’이라는 선생님의 신호에 저마다의 장면으로 멈춰섰고, 모든 학생들이 멈추자 선생님은 돌아다니시며 한명씩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물으셨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정말 다양한 대답이 나왔다. ‘이히히힝’ 말소리를 내며 모두를 웃긴 아이부터, 주변 지형을 탐색하는 고구려의 책사들, 승리를 기뻐하는 을지문덕 장군까지.
발표를 마친 학생들도 자연스레 다음 친구의 발표를 기대하며 바라보았고, 마침내 평소에 조용하던 남학생의 차례가 되었다. 친구와 함께 책상 밑에 숨어있는 아이에게 선생님께서 살며시 다가가 물어보셨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저희는 병사들입니다.”
“지금은 어떤 마음인가요?”
이어지는 질문에 두 학생이 대답했다.
“집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걱정됩니다. 그래서...살고 싶어서 숨어있는 중입니다.”
“저는 사실... 전쟁이 처음이라 무서웠습니다.”
조용한 교실이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로 채워졌다. 모든 그림이 을지문덕 장군의 뛰어남을 그릴 때, 아이는 캔버스에 담기지 못했을 병사에 주목했다. 그들의 삶을 상상하며 뱉었을 대답에 아이의 진정성이 묻어 있는 것 같아 조금 먹먹했다.
수업 참관 소감에 나는 ‘좋은 수업이란, 아이들이 저마다의 점을 남기게 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수업 후에 선생님께서는, 역사적 맥락을 선으로 연결하는 것은 나중에 배울테니 초등에서는 아이들이 인상깊게 간직할 수 있는 포인트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고 설명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그것보다 선생님께서 아이들의 눈에 찍으셨던 점들을 떠올렸다. 물 만난 물고기들처럼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 그 눈빛이 좋았다. 실습이 끝나도 그 눈빛이 오래 기억날 것 같았다. 마지막 실습을 마친 그 해, 나는 교사가 되기 위한 임용시험에 응시했다.
그때의 수업처럼, 어떤 책들은 우리에게 찾아와 찐한 점을 찍는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인생에 강한 점을 찍은 것으로 유명한, 메이지유신의 주역 ‘사카모토 료마’를 그린 책 1) ‘료마가 간다’(시바 로타료)처럼 말이다.
이와 함께 우리 교육이 계속해서 점을 찍기 위한 소중한 방안을 소개하는 2) ‘IB를 말한다’(이혜정, 이범 외)를 만나보자.
(출처 : United States East India Squadron in Tokyo Bay, Osay, 1862-1880)
“태평의 단잠을 깨우는 조키센
고작 넉 잔으로도 밤잠을 설친다.”
-가에이 6년 시절, 에도 시내에 돌던 시
(조키센=교토의 고급 차. 증기선의 일본어와 발음이 같음.) (일본식 펀치라인)
시계바늘을 돌려보자. 앞에 고구려에서 1,200년 정도만 뒤로.
19세기 근대화를 앞둔 일본은 ‘칼의 세계’다. 하급무사(고시)와 상급무사(조시), 그리고 쇼군과 다이묘를 영주로 섬기는 엄격한 ‘신분의 세계’이기도 하다. 300년간 이어져온 막부(바쿠후)의 세상에서 무사정신은 사무라이의 칼만큼이나 예리하고, 신분의 위계는 바위처럼 단단하다.
그 평화로운 일본 앞바다에 미국의 ‘흑선’(쿠로후네)이 등장한다. 서슬퍼런 검 따위는 얼마든지 집어삼킬 정도로 새까맣고, 일본이 떠받들던 관료들을 벌레보듯 내려다볼 정도로 커다랗다.
구로후네가 움직이고 있었다. 에도만을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
바쿠후의 각료를 비롯하여 연안을 지키던 여러 한의 경비진, 그리고 에도 시민은 간이 콩알만해질 정도로 놀라 피난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시나가와 앞바다에서 발포한 몇 발의 포성처럼 일본의 역사를 크게 바꾼 것도 없다. (료마가 간다, 1권 p.147-8)
칼의 세계에서 감히 벨 수 없는 존재를 만났다면,
당신은 어떠했을 것 같은가?
두려웠을 것이다. 강도를 만났을 때 그러듯이, ‘원하는 것은 다 드릴테니, 제발 살려주시오.’ 라며 두 손을 들었을 수도 있다. 그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막부(바쿠후)들이 그랬다. 문호를 개방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적극적으로 화친을 맺고자 하였다.
반면에, 두려움이 객기처럼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그 두려움을 목청껏 토해냈다. 자신이 믿어오던 칼의 세계를 저 정체 모를 존재가 집어삼키는 것이 가당치도 않다면서, 절대로 저 흑선을 우리 땅에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고 배척했다. 심지어 저 세력에 굴복한 바쿠후를 몰아내고, 천황을 중심으로 다시 모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화와 척화,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래퍼토리다.)
그러나 때로는 기존의 범주와는 다른 반응이 나타나기도 한다. 일본 남서부 시골 ‘도사 번’에서 에도(지금의 도쿄)로 검술유학을 온 하급무사 ‘사카모토 료마’의 호기심이 그랬다.
‘한 척이라도 좋으니 저 배가 내 것이 되었으면’
순진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원하는 듯한 심경이었다. (p.141)
당시에는 꽤나 여유 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날의 충격은 료마의 인생을 강력하게 바꾼다. 이 자가 누구길래 그렇게나 많은 일본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일까? 심지어 손정의 회장은 자신의 꿈을 키운 단 한 명의 인물로 이 료마를 꼽는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나에게 찍었던 세 가지 점을 통해 료마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후 료마는 검술에 전념하여 꽤나 큰 실력과 유명세를 얻는다. 한편, 당시 젊고 실력있는 검객들은 바쿠후 타도를 외치며 근왕파(+외국세력 반대)로 뭉치고 있었다. 옳다고 여기는 신념에 목숨 정도는 얼마든지 던져야 했고, 그렇지 못하는 자들은 겁쟁이 취급을 받았다. 료마는 그런 취급을 받을 때마다 ‘아직 하늘이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며 검술 연마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하루는 같은 도장 친한 동문의 간곡한 요청으로 바쿠후의 핵심 관료를 암살하기 위해 함께 떠난다. ‘가쓰 고고로’ 라는 해군함장이었는데, 함께 식사하는 척하다가 암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식사 자리에서 미국과 유럽열강 등 바다 건너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따라서 지금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고로를 통해 듣게 된 료마는 그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를 ‘스승’으로 모셔버린다. 놀란 동문과 달리 료마에게 중요한 것은 바쿠후 타도라는 객기어린 구호가 아닌 바쿠후를 압도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리고 가쓰에게 군함조종과 항해술을 배울 생각을 하자, 눈 앞의 상대는 더 이상 정적이 아니라 큰 도움을 줄 스승이 되었다.
이러한 료마의 ‘실리중심’ 사고는 ‘관찰력’에서 비롯한다. 당시 바쿠후 타도를 준비하던 가장 큰 두 세력은 ‘조슈’한과 ‘사쓰마’한이었다. 그런데 이 두 한 사이의 원한이 너무나 깊어서 바쿠후와 싸우기 전에 두 한이 서로를 없앨 듯 하였다. 여기서 료마의 최대 공적 중 하나인, 사쓰마와 조슈의 통합이 등장한다. 료마는 이를 논쟁이나 당위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상인기질이 있던 료마는 그들의 ‘이익’에 집중한다.
“우리 샤추(료마가 세운 무역회사)를 중심으로 사쓰마와 조슈가 손을 잡게 하겠네. 즉 상업을 통해 손을 잡게 하겠다는 말일세. 그래서 서로 상대의 속마음을 알게 되면 동맹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료마가 간다 7권, p.240)
이어 료마는 사쓰마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 가뭄으로 인해 흉작이 들었다는 것과, 바쿠후 견제를 위해 많은 군사를 교토에 파병한다는 것. 한에서는 쌀이 없어 감자를 먹을지라도, 다른 한이 다 보는 궁성의 도시에서는 비싼 쌀을 사서 먹인다는 것을 말이다. 이어서 료마는 많은 산출량을 지닌 조슈의 쌀을 떠올린다. 실제 사쓰마 군이 파병한 것도 바쿠후가 조슈 정벌에 나서는 것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사실 조슈로서는 이보다 고마운 것이 없다.
그런 조슈가 사쓰마에게 군 식량으로 쌀을 선물한다면?
이처럼 관찰에 기반한 료마의 실리주의는 정치적으로 꽉 막혀있는 상황을 타개하는 요술을 일으키곤 했다.
+ ‘료마가 간다’에는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할복 문화’가 생생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료마는 달랐다. 무사로서의 명예가 더럽혀지거나 친구의 원수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마저도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값을 지불했을 때 얻게 되는 이익이 무엇일지.’ 그래서 사사로운 것마다 목숨을 걸기보다, 진짜 가치 있는 한 가지 ㅡ 낡은 바쿠후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일본을 세우는 일ㅡ에 전념했다.
‘흑선’이라는 존재에서 모두들 두려움을 느낄 때, 료마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읽는다. 손꼽는 검술 실력으로 고향에서 도장을 차려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하급무사 료마는 신분제로 꽉 막힌 ‘도사한’을 탈퇴하고 가쓰로부터 항해술과 서양열국의 정세를 배운다. 그리고 ‘가이엔타이(일본을 바다에서 돕는다)’라는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를 창립하여 무역거래와 해군력증진에 힘쓴다. 앞으로의 미래가 그곳에서 결정될 것임을 읽었던 것이다. 그렇게 흑선을 등에 업은 료마의 영향력은 점점 강해진다.
료마가 배를 끌고 오사카로 가던 어느 날, 료마와 가이엔타이 선원들이 탑승한 배가 기슈한이 운행하는 거대한 함선과 충돌하게 된다. 목숨들만 간신히 건지고, 여태 준비한 물자와 배는 바다 깊숙한 곳으로 침몰한다.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료마를 기슈한이 한의 권력으로 무마시키려 하자, 료마의 부하들은 분노하며 쿠데타를 제의한다. 여기서 그의 반응이 료마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쳐들어가야 합니다!”
사야나기와 고시고에 등은 다시 불같이 화를 냈지만 료마가 이를 굳게 말렸다.
‘쳐들어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료마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료마에게는 이 일본 최초의 기선 충돌 사건을 법적인 선례로 남기겠다는 것이 정열의 목표였다. (료마가 간다 9권, p.138)
료마는 이 사건이 ‘만국공법’에 따라 질서 있게 처리한 최초의 해상사고 사례로 남기를 원했다. 가쓰의 배움으로부터 시작하여, 료마의 관심은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이 만든 ‘헌법’에 있었다. 선진국들은 법과 체계가 신분의 높낮이 없이 모두를 지배하며,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를 지킨다. 그리고 그 법은 천황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농부, 상인 등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료마는 그 변화들을 들으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을 구체화시켰다. 그래서 앞으로 일본도 제대로된 법과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내다본 것이다.
그렇기에 료마는 이후 일어나는 바쿠후와의 해전도 순탄할 것임을 예측했다. 시대의 정세가 변하고 있기에, 낡은 체제의 바쿠후가 계속해 집권하는 것이 더 이상의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분이 없는 전투는 전력을 잃는다. 따라서 ‘모든 시민을 위한 일본을 만든다’는 대의를 등에 업고 싸우는 료마를 막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료마는 신분제 사회에서 모두가 평등한 나라를 상상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료마는 이를 자신의 꿈으로 그치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전염시키는 사람이었다. 당시 ‘바쿠후 타도’와 같이 엄격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말들은 입에 담기에 너무나 위험했다. 그런데 누구나 튀기는 침을 맞아가며 료마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껄껄 웃으며 새로운 상상을 하게 되었다.
한편 이 상상에 동참하는 세력이 많아질수록, 교토는 폭발 직전 화약고가 된다. 사쓰마 한과 조슈 한을 중심으로 한 이들 세력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바쿠후를 무너뜨릴 준비를 하며, 전쟁의 개시를 앞당기려 한다. 그런데 이들의 정신적 리더 격이었던 료마가 갑자기 ‘유혈사태는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무슨 말이냐며 당황해하는 이들에게 료마는 설명한다.
“일본을 위해서야.”
내란이 일어나면 가장 좋아할 것은 사쓰마 한을 지원하는 영국과, 바쿠후를 지원하는 프랑스 등 열강들이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단어와 개념조차 없어서, 다들 자기 ‘한’(지역구)의 이익만을 생각할 때 료마는 ‘국가’를 떠올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자꾸만 우리나라를 떠올리게 되어서 가슴이 참 아팠다.) 그렇게 료마는 유혈사태 없이 쇼군이 메이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납하는 ‘대정봉환’을 이끌어낸다.
상상하는 사람 료마가 가진 힘은, 그의 비판이 지닌 탁월한 대안에서 비롯한다. 그저 바쿠후 타도만을 외치던 당시 무사들과는 달리, 료마는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건데?’ 를 계획하던 사람이었다. 훗날 메이지 유신의 강령이 된 ‘선중팔책’이 그것이었다.
제 1조. 천하의 정권을 조정에 반환하고 모든 정령은 조정으로부터 나온다.
제 2조. 상하 의정국을 설치하고 의원을 두어 정치상으로 중요한 모든 안건을 의논케 하고, 공의로 모든 결정을 내린다. (...)
제 4조. 외국과의 교제는 널리 공의로써 채택하고 새로 합리적인 규약을 맺는다.(...)
외에도 해군설치와 경제법 제정, 낡고 불합리한 제도의 일소 등 료마의 초안에는 일본을 풍미한 근대적인 관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시바 료타로가 그려낸 ‘사카모토 료마’는 많은 일본인에게 점을 남겼다. 타지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어떤 청년에게는 사업가로서의 꿈을 갖게 했고, 혼미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사카모토 료마와 그가 만난 흑선은 나에게는 ‘질문’을 던졌다. 다소 투박했던 질문이 조금 더 구체화되었던 것은, 내가 ‘흑선’이라는 말을 다시 만났을 때였다.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