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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숲 Apr 17. 2023

단편소설/ 두 겹의 노래(7)

<2023 아르코 문학창작 발표 선정작-박숲>


     나는 물티슈 한 장을 뽑아 탁자를 닦으며 간병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유리코가 일본에 살다 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실버타운 노인 중 그녀와 비슷한 세대는 수탈과 전쟁의 피해자였고, 그들의 기억은 대개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유리코가 일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상담 초기에 그녀는 어떤 이유에선지 자신은 조국에게 버림받았다고 말했다. 고국에 뼈를 묻겠다는 소원은 이뤘지만 아직도 조국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 주지 않는다며 횡설수설 말을 이어 붙였다. 그때는 단순히 공통된 세대가 지닌 상처의 부작용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녀는 유령과 다름없던 김미자의 삶보다 유리코였을 때 삶에 치열했고, 그래서 현재를 증명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자신을 유리코라고 소개했을 때의 표정은 결연하고 단호했으며 소모적이지만 에너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아유, 전 이 생활 꽤 해 봐서 아는데, 재산이 많으면 뭐 해요. 어차피 늙고 병들면 짐승 취급받는 건 다 똑같아요. 그래도 고독사하는 노인들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죠. 유리코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자살자’들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유리코는 한 줄기 가느다란 바람 같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디로 갔을까요? 간병인은 한숨을 쉬며 이곳의 마지막 코스는 지방 요양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처럼 쫓겨난 사람은 어떻게 될지 몰라요. 간병인은 벽시계를 쳐다보더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냐며 인사를 했다. 

    실버타운을 벗어나자 커다란 눈송이가 공중에서 어지럽게 흩어졌다. 산발적으로 흩날리는 눈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문득 사라진다, 는 단어가 가진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사라진다 나는 낮게 소리 내어 발음해 보았다. 눈송이가 차창 유리에 닿자마자 사라지듯 나 역시 눈송이처럼 공중으로 휘발되는 기분이었다. 센터의 기관장은 돈도 안 되는 노인들 치료는 왜 계속하냐고 타박했다. 그 시간에 장애우나 아동 치료를 더 늘리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거였다. 나는 기관장의 타박을 들으면서도 노인들의 집단치료를 고집했다.

    할머니의 제사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시장으로 차를 몰았다. 시장 입구에 차를 주차한 뒤 시장으로 뛰어갔다. 건미역과 황태포와 제수용 과자를 사고 포장된 대추와 밤과 몇 가지 나물을 샀다. 생선 가게 주인은 조기에 소금을 뿌리며 싱싱하다는 말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따져 볼 여유가 없었다. 물건을 담은 검은 봉지가 늘수록 손가락과 팔목이 저리고 아팠다. 할머니가 좋아했던 인절미도 한 팩 산 뒤 시장을 빠져나왔다. 할머니 제사에 늦지 말고 일찍 와. 아침 일찍 동생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여전히 답이 없다. 

    동생은 어떻게 된 걸까. 나는 물건들을 식탁 위에 쏟으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시험 기간이겠지. 시험이 끝나도 다음 시험을 준비한다는 동생은 언제나 시험 기간이었다. 동생의 얼굴은 늘 초췌하고 창백했다. 점점 공부에만 집착하는 동생이 무서웠다.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다섯 시간 정도, 그마저도 자는 동안의 얼굴뿐이었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치고 소고기를 볶아 미역국을 끓였다. 두부를 썰어 부치고 조기 세 마리를 깨끗이 다듬어 프라이팬 위에 올리고 가스레인지 불을 올렸다. 콩나물을 삶아 낸 물에 시금치를 데쳐 놓고 고사리를 삶아 물에 불려 놓았다. 다진 돼지고기와 두부와 여러 가지 다진 야채를 반죽하여 동그랑땡을 만들었다. 수육 대신 등갈비를 만들었다. 등갈비는 어린 시절 고모네 식당에서 할머니가 종종 몰래 싸 왔던 메뉴였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제사상 앞에 앉아 음식들을 훑어보았다. 지금쯤 동생은 집으로 오고 있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가 하얀 쌀밥의 김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두커니 앉아 바라본 제사상은 온기가 사라진 뒤처럼 싸늘했다. 어린 시절 동생이 재잘거리던 장면이 흑백영화처럼 떠올랐다. 할머니 왜 밥 먹기 전에 꼭 담배를 피웠어? 고요한 침묵을 깨는 내 목소리가 처연하게 울렸다. 우리 곁에서 빠져나간 생의 어느 한 지점의 텅 빈 공간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깊은 슬픔이 몰려왔다. 액자 속에서 할머니가 인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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