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제의 시선으로
내가 막 고등학생이 되었던 그해 겨울,
여섯 살 위였던 큰언니와 자취했던 이층 집 맨션 앞, 그곳의 겨울은 시렸다. 자취방 대문 옆에서 마주친 슈베르트. 활처럼 휜 등뼈가 유난히 시리게 보이던 그. 세 번의 마주침 모두 그의 옷차림은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색 정장바지였다. 바람이 품은 냉기에 몸서리치던 그 겨울. 골목의 바닥 구석구석엔 서리가 하얀 꽃처럼 피어 있었고, 회색의 시멘트 담벼락 끝자락 환기통에선 연탄 연기가 모락모락 뿜어져 나왔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어도 움츠린 어깨가 펴지지 않던 추위.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탄 배출구의 연기는 오히려 따뜻한 유혹이었다. 얇은 셔츠 차림으로 추위를 고스란히 견디던 그의 창백한 얼굴.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던 그 모습은 어린 내 안에 고스란히 몇 장의 사진처럼 저장되었다. 마치 순정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인물처럼 한없이 쓸쓸해 보이던 나의 슈베르트.
그가 부르던 가곡이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였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어른이 된 이후였다. 언니는 활짝 핀 꽃처럼 모든 것이 예뼜던 시기였다. 추운 겨울, 집 앞에서 구애의 노래를 부르던 슈베르트. 요즘 그렇게 했다면 누군가는 곧바로 신고를 했을 것이고 그 남자는 스토커나 정신 이상자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을까.
언니는 이상하리만치 그에게 냉정했다. 어쩌면 언니의 마음속에는 다른 누군가가 이미 도착해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벽에 기댄 그를 보기 위해 자꾸만 이층 작은 창문 아래를 내려다 보았고, 그런 날은 꿈속에서 꼭 울고 말았다. 언니가 밉기도 했다. 가능하다면 내가 언니를 대신하고 싶기도 했다. 해마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서면 늘 그가 나를 찾아온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변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언니에게 그에 대해 물었다. 언니의 기억 속엔 그가 담기지 못했지만, 가끔 갔다는 레스토랑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게 담겨 있었던 걸까. 우리가 살던 동네엔 작은 쇼핑센터가 있었다. 그곳 레스토랑 기억의 한구석에 그가 옹색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구겨져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일하는 웨이터였다고 했다. 언니가 싫다는데도 여러 번 구애를 했던 모양이다. 그는 당시 폐병을 앓았던 거 같다면서, 음식점에서 폐병이라니, 결국 그는 오래 일하지 못하고 잘렸고 했다.
언니는 그의 낭만적 성격이 싫었다고 했다. 그렇게 대답해준 언니가 고마웠다. 만약 언니가 현실적인 이유를 댔다면 나는 몹시 슬펐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쩌면 오랫동안 비밀처럼 품고 있던 나만의 슈베르트가 내 안에서 떠나 버릴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의 하얀 와이셔츠가 순정만화 속 남자들이 입는 예쁜 블라우스로 보였던 그 시절. 우울과 병에 찌든 얼굴이 짝사랑을 앓고 있는 자의 쓸쓸함으로 여겨졌던 그 시절.
그곳엔 여전히 나의 슈베르트가 있다.
겨울 나그네의 노래를 멈추지 못한 그가.
그리고,
겨울을 지나 봄의 한가운데 서 있다. 아침의 햇살이 고층 빌딩 유리창에 슬픈 조각으로 부서지는 것을
사거리 신호 대기중 지켜보던 순간 라디오에서 흐르던,
또다른 나의 슈베르트의 곡..
불행을 전유물처럼 앓다 간 슈베르트의 아픈 생의 결들이 고스란히 스며들던
그 아침의 떨리던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