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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숲 Apr 17. 2023

단편소설/ 두 겹의 노래(6)

<2023 아르코 문학창작 발표 선정작-박숲>


     탁자 위 어지럽게 쏟아진 스팽글을 통에 쓸어 담았다. 복지사 팀장이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복지사 팀장은 하얀 봉투를 앞으로 내밀었다. 지극히 사무적인 딱딱한 표정의 그녀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달 재료비예요. 그녀의 손에서 봉투를 건네받았다. 나는 유리코가 왜 계속 나오지 않는 것인지 물었다. 복지사 팀장은 평소 사적인 얘기 나누는 것을 꺼렸다. 참 전형적인 타입이었다. 어쩌면 오랜 시간 진행된 반복된 일상이 그녀를 심한 매너리즘에 빠트렸을 것이다. 그녀는 늘 수업을 마치면 내게 상담일지를 건네받은 뒤 딱딱한 인사와 함께 사무실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뭘 그렇게 관심을 가지세요?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잘 계시긴 한 거죠? 그녀는 못 들은 척 일지를 달라고 했다. 

    나는 일지가 담긴 파일을 손에 든 채 말했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팀장은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인사를 한들 뭐합니까? 어차피 순간만 존재하는 분들인데 돌아서면 아무것도 기억 못 해요. 그녀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일지를 그녀의 손에 넘겼다. 기억을 못 하면 감정도 사라지나요? 나는 항의하듯 말했고, 복지사 팀장은 눈을 치켜뜨며 툭 내뱉었다. 그 할머니 나간 지 벌써 이 주 넘었어요. 왜요? 어디로요? 복지사 팀장은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아, 이 사람에겐 또 어떤 피로와 고통이 있기에 저토록 냉정할까. 피로와 고통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팀장은 일방적인 인사를 남긴 뒤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날따라 유리코는 병실로 올라가지 않으려 했다. 간병인이 데리러 왔는데도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간병인이 짜증을 부렸다. 당황한 나는 간병인에게 좀 있다가 모셔 드릴 테니 먼저 올라가라고 했다. 간병인이 투덜거리며 나간 뒤로도 유리코는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마무리를 한 뒤 외투를 걸치고 나는 유리코 앞에 앉았다. 지금 가기 싫어요? 나랑 더 있고 싶어요? 유리코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나는 당황하여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 무서워, 살려 주세요, 와따시와 유리코데스. 그녀는 손을 싹싹 비볐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조금만 힘을 줘도 낙엽처럼 바스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그래요 유리코 맞아요. 제가 지켜 드릴 테니 무서워 마세요. 약속해요. 나는 그녀의 손가락을 끌어당겨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건 채 쓰러지듯 내 품에 안겼다. 유리코는 상처 입은 새처럼 내 품에 안겨 바들바들 떨었다.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달랬지만 그녀는 끝내 아이처럼 엉엉 울다 스르륵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정신을 잃었다. 

    시디를 9번 트랙으로 옮겼다. 유리코가 좋아하는 음악이었다. 유리코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 할머니와는 전혀 다른 삶, 모든 면에서 풍족한 삶을 살았을 것 같았지만 어쩌면 아닐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새삼 들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 노인들은 유난히 고운 선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기억들 역시 어딘지 모르게 여유와 기품이 있었다. 내 할머니의 처절한 삶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특히 유리코의 싸늘한 냉대와 조소가 깔린 말투에는 부유했던 삶의 순간들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조 군은 유리코에게 늘 당하면서도 그녀의 쌀쌀맞은 말투나 행동마저도 모두 예쁘다고 했다. 의도적이라 할 만큼 그녀는 자신의 삶의 행적들을 적재적소에 집어넣는 걸 좋아했다. 

    탁자 위에 널린 재료들을 정리하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최 할머니의 간병인이었다. 최 할머니 손수건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간병인은 의자 아래에 떨어진 손수건을 챙기며 말했다. 아쉽네요. 우리 엄마는 선생님 시간을 제일 좋아했는데. 하긴 809호 할머니가 더 좋아했던가? 나는 귀가 솔깃해져 물었다. 그 할머니는 어떻게 된 거예요? 간병인은 사무실 문을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그 할머니 쫓겨난 거나 다름없어요. 입실비가 많이 밀렸다나 봐요. 이곳 노인들은 축적한 재산이 많거나 자녀들의 후원으로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한다고 들었다. 입실비가 밀려 쫓겨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간병인에게 요구르트를 건네며 잠깐 얘기 좀 하자고 했다. 우리 엄마 낮잠 주무실 시간이라 상관은 없는데, 왜요? 

    여긴 어디지? 집에 데려다줘. 와따시와 다레데스까? 나는 누구야? 그녀는 증세가 갑작스럽게 심해졌다고 했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 보는 사람마다 붙들고 일본어와 한국어를 뒤섞어 물었고, 종일 중얼거리며 유령처럼 복도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너무 신기한 게요, 어쩌다 정신이 들면 꼭 선생님을 찾더래요. 나는 울컥 올라오는 덩어리를 목 아래로 구겨 넣었다. 집도 몇 채나 있고 아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아들이 재산을 몽땅 정리해서 해외로 떠났다는 거 같기도 하고. 암튼 옛날엔 선생이었다, 사업가였다, 가수였다, 수시로 직업을 바꿨더랬죠. 일본에서 살다 왔다는데 그것도 사실인지 아닌지, 우리 간병인들이야 다 그러려니 받아 주지만, 노인들 거짓말은 항상 뻔해요. 나는 당황스러웠다. 노인들이 자신의 치매 증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을 꾸며 낸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밴 행동과 말투 등은 치매를 인정하기 싫어서 단순히 꾸며 낸 거짓과는 확연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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