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법은, 뭐든 하나 정도는 있다.
"저는 의대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인턴을 마칠 때까지 부끄럽게도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 고민해본적이 없었습니다. (중략) 하지만 우습게도 20년동안 전업주부로 두 아이를 키워내고 간이식이라는 대수술을 경험한 지금에서야 정말로 괜찮은 의사가 되고싶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 경험이 의사로써 좋은 밑거름이 되리라는 확신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바램은 면접에서 뽑혀야 가능한 일입니다."
tvN 드라마 '닥터 차정숙' 에서 차정숙(엄정화 분)가 20여년만에 경력 단절을 딛고 전공의 면접을 보는 장면이다. 정말로 괜찮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이 모든 바램은 면접에서 뽑혀야 가능한 일이다 라고 단언컨대 확신을 갖고 말하는 차정숙을 보며 나는 한낱 내 고민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다시 쓰기로 했다.
차정숙이 그 말을 했을 때,
나도 그랬다고 박수를 쳤다!
차정숙이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해본 적 경험이 없다고 했을 때, 나 역시 그랬다. 쓰는 일을 하게 됐지만, 그저 쓰는게 좋았지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생기기 않았다. 남들보다 빠르게 기회를 얻곤 했지만, 이게 정말 나한테 맞는 일인가 고민했을 뿐 그다지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써야겠다고 다짐을 했었던 건 그 이후였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이야기를 쓸 때마다 더더욱 열심히 그려야겠다는 장면들이 눈 앞에 자주 그려졌다. 쉬는 날에도, 일하는 중간에도, 밥 먹다가도, 백수 기간일 때는 혼신의 힘을 다해 썼다. 나는 정말 드라마를 쓰고 싶었다.
실패가 잦아질수록 내심 속은 쓰라렸지만 그래도 쓰는걸 멈추고 싶지 않았다. 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으니까. 그러던 중 작년 중순쯤 나는 글이라면 이제 넌더리가 나서 그만두기로 했다. 회사로 인한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명확하겐 나한테 자신이 없었다. 그때부터 입에 붙은게 '아무거나', '괜찮아', '그렇긴 해도, 그냥 내가할게요' 였던거 같다. 그게 나한테 독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기분이 없는 기분으로 일하고
생각이 없는 생각으로 살기
놀랍게도 기분이 없는 기분으로 일하고, 생각이 없는 생각으로 살다보니 나는 종종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를 잊고 있었다. '아무거나', '괜찮아' 등 나를 배제하고 내뱉는 순간, 내 자리도 내 위치도, 나를 보는 상대방의 눈빛도 참 줏대 없었다. 나를 오랜 시간 지켜본 친구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
"사람들이 널 쉽게, 우습게 볼까 했어. 너는 실력도 있고 다 잘하는데 말이야. 왜 다들 너한테 대하는 태도가 무례할까 했는데... 잘 들여다보니까 스스로한 정이 없어서 그런거 같아. 그러니까 다른사람들에게 정을 더 먼저줘서 너한테 줄 애정이 없으니 만만하다고 생각하는거 같아 보이더라고"
맞는 말이였다. 나 스스로를 아껴줄 마음이 없었으니까. 남한테나 해주기나 알지, 나한테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으니까. 나를 아끼지 않았으니까 고귀하게 여겨주지 않으니까 사람들도 나 스스로도 너무 우습게 알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어떻게든 쓰자고. 쓰면서 버티기로. 나를 귀하게 여기는 법은 결국 나만 알테니까.
쓰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
나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이유는 너무 뚜렷했다. 나는 회사에서도 충실한 직원으로 남고 싶고, 업계에서 좋은 선배로 남고 싶고, 쓰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오래 존속하고 싶다.
이런 마땅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귀하게 여기는 법을 고작 '기분이 없는 기분', '생각이 없는 생각'들로 치부하며 살았다.
짬을 내서 쓰기로 했다. 몇번을 쓰고 지웠던 원고를 다시 켜서 보면서 생각했다. 진즉에 이렇게나 해볼걸. 깊은 생각을 핑계삼아 나를 대충 대하지 말걸 하면서 말이다. 몇번이고 쓰고 지우면서 생각했다. 차정숙이 말한 이 모든 바램은 면접에서 뽑혀야 가능한 일이라는걸 곱씹으며 언젠간 백상에 오를 날을 고스란히 그려본다.
그러니 쓴다. 어떻게든. 그러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테니까. 귀한 나를 위해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