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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빈 Feb 10. 2021

완벽한 타인

재희와는 중1 때 처음 만났다. 은호아파트 101동, 102동에 살았던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아침이 되면 102동 앞으로 가 재희네 아빠 차를 얻어타고 함께등교했다. 재희네 아빠는 유명한 학교의 이사장이었는데, 무뚝뚝한여느 아빠들과 다르게 아저씨는 상냥했고 재희는 그런 아빠를 자랑스러워했다. 하굣길엔 종종 재희네 집에가서 아줌마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재희네 집에선 늘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흘렀고 그게 좋았다. 우리는 아줌마 몰래 담임이 얼마나 늙다리이며 재수 없는지, 같은반 재경이가 민지를 진짜로 좋아하는지에 관해 토론하며 깔깔댔다.


“나는 네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해할 수 있어.”


재희는 우리 사이에 정적이 생길 때마다 이 말을 하곤 했다. 별생각없이 “나도”라고 대답하면 재희는 서운해하며 진심을 담아달라고 말했다. 그리고선 내 눈치를 흘끗 보곤 했다. 재희는반에서 인기가 많은 친구였다. 재희는 쾌활한 반장이었고 모두가 재희에게 호감을 보였다. 그런 재희가 나에게 왜 자꾸만 확신을 얻고 싶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학년이 높아지면서 반이 달라져도, 고등학교에 올라가도 우리의 우정은그대로였다. 여전히 하굣길엔 굴다리 분식에 들러 떡꼬치를 사 먹었고 남들은 모르는 짝사랑하는 2학년 선배에 대해 조잘댔다. 재희와 소원해진 건 내가 이사를 하면서부터였다. 아빠의 사업이 무너진 후 멀리 떨어진 작은 주공아파트로 옮기면서 우리의 하굣길은 갈라졌다. 재희와 유일하게 만날 수 있던 시간이 사라지니 반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잦아졌다. 매일 돈 때문에 싸우는 집이 싫어 꾸역꾸역 야자를 하겠다고 남았고, 공부보다는반에 관한 비밀을 공부하며 새로운 우정을 두터이 했다.



우리 반으로 종종 나를 보러오던 재희는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즈음나는 첫 연애를 시작했고 단체 생활에 익숙해졌다. 야자를 째고 다 같이 몰려가 먹는 떡볶이와 비밀 얘기, 뒷담화로부터 얻은 소속감에 마음이 붕 떠 있었다. 가끔 혼자 걷는하굣길엔 재희에게 문자를 넣었지만 ‘나 오늘 약속’, ‘미안너 먼저가’ 식의 퉁명스러운 답장에 마음이 상해 더는 먼저 문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혜수야, 너 1반 한재희랑친하지 않아? 걔네 아빠 잡혀갔대.”

“맞아. 그 아저씨 사기꾼이래. 몇십억꿀꺽했다고 뉴스에도 나왔던데.”

“와.. 그럼 걔 이제 학교 어떻게 다니냐. 오늘도 안 나왔나봐”


아침 조례가 끝나자 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예상치 못한 재희의소식에 다들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갑자기 생긴 가십거리에 눈을 반짝였다. 화장실로 달려가 재희에게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은 꺼져있었다. 그 사이 재희에 대한 소문은 부풀려져 있었다. 단조로운 학교생활 속 누군가의 가십은 먹잇감이 되기 마련이었다. 재희네아빠가 유명한 사이비 신도라는 말부터, 재희네 집엔 뇌물로 받은 금붙이가 박스 채 쌓여있다는 허무맹랑한소문들이 뒤엉켜 복도를 휘감았다. 재희와 친하다는 사실만으로 아이들은 나의 눈치를 봤다. 그렇지만 목소리를 낮출 뿐, 멈추진 않았다.


재희가 우리집 앞으로 찾아온 건 그 다음날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쭈그리고 앉아있던 재희는 나를 보더니 엉거주춤 일어났다. 잠시 어색한 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오랫동안피상적인 대화만을 이어나갔다. 아저씨 일은 사실인지, 정체불명의소문들은 또 다 무엇인지 묻고 싶은게 한가득이었지만 왜인지 입 안에만 끈적이게 맴돌아 침과 함께 삼켜냈다. 그간쌓아진 서먹함과 서운함은 몇 년의 우정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주일 후, 재희는 학교에 왔다. 재희네엄마와 선생님, 재희가 교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가로지르자 모든 아이들이 창가에 달라붙어 숨을 죽이고지켜봤다. 재희는 아이들이 부담스러운지 눈을 내리깔고 걸어갔다. 나는그런 재희를 보며 재희가 멀쩡하다는 안도감보다도 배신감과 불안함을 느꼈다. 일주일 내내 연락이 안 되던것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저기서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재희네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얼굴이 굳어져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쿵쾅거려 그들이 멀어질 때까지 쳐다볼 수 없었다. 그때 내가느낀 감정은 이질감 단 하나였다. 내가 알던 재희, 그리고상냥한 아저씨, 아줌마는 더 이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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