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초년생의 첫 퇴사 A to Z #2
퇴사를 결심했다. 늦어도 너무 늦은 결심이었다. 사실은 진즉에 했어야 하는데, 너무 안일했었다.
퇴사를 결심한 표면적인 이유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재미, 회사를 재미로 다니는 사람은 당연히 없다. 나 역시도 그렇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재미를 느끼느냐, 느끼지 않느냐의 차이는 정말 크다. 쉽게 말하자면, 과거의 나는 일을 할 때 누군가 방해를 하면 (그것이 남자친구일지라도) 그 흐름이 끊기는 것이 너무 싫었다. 퇴사 시점의 나는 일을 할 때 누군가 말을 걸면 그 기회를 틈타 쉬기 바빴다. 후자가 사실 정상일끼?
물론 과거에도 모든 일이 재미있던 것은 아니다. 너무너무 하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일을 신나게 했다. 팀원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고 뜬구름잡는 내용이더라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함께 기획해보고,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를 하는 과정이 참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이 재미가 없어졌다. 팀원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왜 일이 재미가 없는가에 대하여. 왜 이렇게 일 하기가 싫은지, 왜 자꾸 다른 곳에 한 눈을 팔고 싶은 것인지. 또한 어느 순간부터 대표가 하는 말에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나를 발견하였다. 헉, 평소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라는 사상을 가지는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다니던 회사는 참 다이나믹했다. 대표가 참 여러 번 바뀌었다.
어이가 없지, 대표가 바뀌다니. (주주가 CEO를 임명하는 대기업도 아니고 말이다.) 결국 내가 퇴사를 할 시점에 남아있는 원년멤버는 나뿐이었다. 허허.
내가 생각하는 스타트업 CEO의 가장 중요한 역량은 두 가지이다.
1. 비전 제시 : 팀원들이 회사의 비전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도록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
2. 동기 부여 : 그러한 비전을 향해 팀원들이 전력을 다해 달려갈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
CEO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 동기 부여는 커녕 회사의 비전이 점점 더 흐릿해졌으니 사실 내가 재미를 잃어가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을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평소와 다름 없던 주간회의에서 불쑥,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퇴사를 선언하고 남은 업무들과 인수인계를 준비하면서 재미를 잃은 이유를 더 자세히 분석해보았다.
1. 명확하지 않은 업무범위
권한이 없는데 내가 책임져야 하는 범위가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회사의 모든 히스토리를 아는 마지막 남은 원년멤버였다. 그래서였는지 나에게는 정말 넓은 범위의 과업이 주어졌다.
마케팅, CS, 홈페이지 기획, 개발 검수, 재무까지...! 그러다보니 깊이있는 업무보다는 넓고 얕은 업무를 하게 되었다. 좋게 말해 올라운더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어느 분야에서도 스페셜리티를 가지지 못했다.
특히 CS가 나에게 생각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주었다. 주말, 명절에는 물론 새벽에도 휴대폰이 울리면 바로 확인해야했다.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 보는 동안에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불안하고 초조해서 마음놓고 영화 한 편을 보지를 못했다. 어느 날 이런 내가 너무 싫어지고, 나를 이렇게 만든 회사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로 인해 즐거운 시간을 망치거나 내가 서운하게 한 나의 친구들, 가족들에게도 미안해졌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이 회사로 인해 변해가는 나의 모습이 너무 싫었다.
혹시라도, 현재 회사에서 '음, 그래. 이 일 뭐,, 할 수는 있어. 그런데 왜 내가 해야하지?' 라는 생각이 든다면 즉각 회사에 말하여 R&R을 분배하는 것을 권한다. 일 손이 없다는 것은 근로자인 내가 양해해줄 바는 아니다. 정 일손이 없다면 대표가 밤을 새서라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실, 스타트업에서 이 일은 내 일, 저 일은 네 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도 적극 동감하는 바이다. 입사 초기 나는 모두가 모든 일을 한다는 마인드였다. 나는 입사할 때부터 스톡옵션을 받기로 되어있었으나, 3년이 넘은 시점까지도 흐지부지되어 받지 못했다. 물론, 나 역시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대표도 나서서 주겠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점점 '나는 근로자일 뿐이야'라는 생각이 짙어졌다. 점차 일을 하면 할 수록 동기가 떨어지고 '회사가 나를 단순 근로자로 취급한다면 나도 딱 그 정도만 해주겠다!' 라는 마인드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건강하고 오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마인드가 중요하다.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에 더욱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든 일을 한 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책임자가 불분명하다는 말이다. 즉, 모두가 100% 몰두하지 않게 되기 쉽상이다. 이런 방식은 나의 성장을 위해서도,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2. 권한과 책임의 불일치, 실무와 의사결정의 괴리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나에게는 정말 많은 범위의 과업이 있었다. 또한 그 과업은 내가 책임을 져야했다. 가끔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일에 대해서도 종종 나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 때마다 나는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이에 대해서는 정말정말 할 말이 많아, 추후 글을 별도로 작성하려한다. 내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 너무너무 많았다.
반면 내가 가진 권한은 정말 적었다. 내가 다닌 회사는 스타트업임에도 불구하고 수직관계과 명확하고 대다수의 의사결정이 탑다운으로 이루어졌다. 가끔 CEO가 '답정너'라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본인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말해주지 않으면서, 원하는 것을 말하거나/결과물을 가져올 때까지 퇴짜놓았다. 나와 한 팀원은 그것을 '주상전하의 심기'라고 불렀다. 그럴 거면 애초부터 명확하게 말을 해주면 서로 시간낭비하지않고 참 좋을텐데! 아무튼, 어떤 일을 하든 내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것은 아주 적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해도 전하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것이고, 전하가 맞다고 하면 맞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CEO는 실무를 하지 않았다. 실무를 하지 않는 CEO의 의사결정을 위하여 모든 팀원들은 끊임없이 '보고'를 해야했다. 팀원들과 이슈를 공유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스타트업에서 '보고를 위한 업무'는 지양해야 할 바이다. 그럴 시간에 치열하게 하나라도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스타트업은 대기업이 아니다. 대표는 회사의 A to Z를 속속들이 알고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한 의사결정이 가능하고, 회사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CEO가 4번이나 바뀐 우리 회사의 CEO는 실무를 하지 않았다. 그저 보고만 받고 의사결정을 내렸다.
3. 영혼없는 업무
나는 자타공인 '배움에 목마르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현실에 안주하고, 당장 해야할 일만 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돌이켜보았다. 문득 한 프로젝트가 생각났다. 그 때 나는 운영효율화를 위하여 새로운 관리 플랫폼을 기획했다. 개발이 90%정도 이루어졌을 때 CEO가 파이널 미팅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그 프로젝트는 아예 중단되었고, 다시는 진행되지 않았다.
담당자가 되어 업무를 진행할 때, 매 미팅 때마다 전 팀원들에게 랩업을 했다. 그러나 랩업 당시에는 이렇다할 피드백을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중간보고를 할 때에는 마땅한 피드백이 없다가 프로젝트 막바지에만 결과물을 보고 엎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의 시간와 노력을 쏟은 프로젝트들이 한 번, 두 번 엎어질 때마다 나는 열정을 잃어갔다. 점점 열정 없이 일을 하게 되었고 퇴사를 결심했을 때에는 그야말로 '영혼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영혼없이'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일을 할 때 내 모든 것을 쏟지 않고 그저 '시키는 일을 한다'에 그치는 것이다. 일? 하기는 한다. 성과? 나기는 난다. 그러나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100%라고 쳤을 때, 퇴사 무렵의 나는 내 에너지의 30%도 채 사용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회사와 나 모두에게 최악이었다. 특히 나 스스로에게 몹쓸 짓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 꿈에서 깨는 것처럼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이 회사를 다닌다면 이 '노답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영혼없이 회사를 다니고 있을 내 모습이 갑자기 눈에 보였다.
4. 무엇보다도, 신뢰
사실은 앞의 모든 이유들은 '신뢰'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연인, 친구, 동료, 어느 사이건 간에 신뢰는 모든 관계의 기본이 되는 전제 조건이다. 서로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물며 대표와도 당연히 신뢰를 쌓을 시간이 필요하다. 단기간 내에 대표가 계속 바뀌며 서로 신뢰를 쌓을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퇴사할 때 마지막으로 온 CEO에게는 앞으로 회사가 나아갈 방향과 엑싯에 대한 전략을 생각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답변은 받지 못했다. 이런저런 과정 속에서 나는 회사와 CEO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CEO가 나를 신뢰했는지는 미지수이다. 사실 그가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했는지조차 모르겠다. 퇴사했을 당시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모두가 문제가 없는 척 행동하는 것이었다.' 문제 제기와 갈등해결 역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만 진행될 수 있다. 신뢰하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내 솔직한 마음을 말할 수 있을까? 퇴사 당시 모든 팀원은 지쳐있었고,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만한 에너지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럴 의지가 없었을 것이다.
신뢰가 없는 관계에서는 긍정적인 시너지가 절대 발생할 수 없다. 더 짧은 시간 안에 큰 가치를 창출해야만 하는 스타트업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동료간의 신뢰이다. 나는 더 이상 회사를 신뢰할 수 없었고, 퇴사를 결심해야만 했다.
내가 유일하게 신뢰했던 CEO는 떠나면서 우리팀의 유일한 경력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호야는 늘 배움에 목말라있어요. 새로운 일을 할 때면 호야를 데리고 해주세요."
또한 나에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생각 좀 하고 사세요~!"
생각 없이 살던 과거, 반성합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머리 굴면서 살기를!